한화 코치직에서 물러난 정민철은 내년 시즌부터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으로 새로운 인생을 펼칠 계획이다. 사진제공=한화 이글스
“사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보낸 2년을 제외하고 1992년부터 줄곧 이글스 선수로 살았던 시간들을 정리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공교롭게 김성근 감독님 취임 직후 사표를 내는 바람에 여기저기 눈치를 보게 됐다. 하지만 김응용 감독님이 물러나실 때부터 줄곧 고민했던 부분이고, 과연 내가 팀 재건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팀에 잔류하는 것만이 팀을 위하는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코치는 1년 단위로 계약한다. 난 (김성근 감독으로부터) 선택받지 못할 줄 알았다. 감독님이 고심 끝에 날 잔류시키셨을 텐데, 그 뜻을 거스르게 돼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한화의 레전드들이 팀을 떠나는 데 대해 팬들의 안타까움이 컸다.
“팀을 떠나도 난 이글스 사람이다. 다시 이 팀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정민철이 이글스와 맺은 인연은 죽을 때까지 갖고 갈 것이다. 프랜차이즈 스타로 이 팀이 수년간 하위권을 맴돈 데 대한 안타까움이 컸다. 팀의 중심을 잡아줘야 한다는 생각에 열심히 선수들을 지도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으니까 허탈하기도 했다. 어떤 형태로든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었다.”
―22년간 야구장을 떠나지 않았다. 일반인으로 살아가기가 어렵진 않았나. 어색했을 것도 같고.
“팀을 나온 지 한 달 조금 넘었는데, 여전히 마음이 무겁고, 선수들의 근황이 궁금해서 내가 먼저 연락하게 된다. 비록 팀 성적은 안 좋았지만, 투수들을 부상 없이 이끌었다는 데 대해 자부심은 있다. 한 야구선수의 인생이 부상으로 망가지지 않도록 관리했고, 새로운 감독님이 오셔서 어떤 훈련을 시켜도 최대한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몸을 만들었다. 나도 선수 시절 부상으로 고생한 적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선수들 부상 관리에 최선을 다했다. 팀 상황에 의해 투수를 연투시켜야 할 때 감독님과 마찰을 빚는 걸 겁내지 않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김성근 감독님의 마인드를 흠모하는 편이다. 지도자는 때로 아빠이기도, 여자친구이기도, 팬일 수도 있는데, 가장 중요한 건 선수들을 비싼 상품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김성근 감독님만 한 능력자가 없다.”
―코치 생활하면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나.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한대화 감독님이 부임하셨을 때 평코치에서 갑자기 메인 코치가 됐다. 의욕이 앞서다보니 자꾸 무리수를 두게 되더라. 그러다 조기에 메인 코치에서 물러나 2군이 있는 서산에 내려가 있으면서 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경기 속에 들어가 있지 않고 한 발 빼서 1군 경기를 지켜보며 드는 깨달음! ‘아, 내 시야가 너무 좁았구나’였다.”
―한화는 성적 부진으로 인해 감독이 자주 교체됐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감독 밑에 새로운 코치들이 선임된다. 기존에 있는 코치들 입장에선 2년마다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당연히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이글스 출신들과 새로온 코치들의 갈등 또는 화합 등의 문제에 직면했을 텐데.
“난 현역 은퇴 후 코치를 맡으면서 직업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선수 때에 비해 형편없는 연봉을 받으면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왜? 그동안 내가 받은 데 대해 보답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코치들이 오셔도 걱정할 게 없었다. 모두의 목표가 같았다. 선수들을 잘 만들어서 좋은 성적을 내고자 하는 목표 앞에선 싸울 일도 없었다. 물론 생활하면서 불거지는 소소한 잡음들은 존재했지만, 어느 조직이나 있는 문제들이라 개의치 않았다.”
―김응용 감독이 물러난 뒤 한화 팬들이 ‘김성근 감독 모시기’에 앞장섰다. 1인 시위를 하고, 동영상을 만들고, 포털사이트를 통해 청원 운동까지 벌였다. 그걸 지켜보는 심정이 어떠했나.
“팬들이 오죽했으면 그럴까 싶었다. 어느 한 개인의 생각이 아니었다. 모두가 한 마음이 돼 그런 행동을 벌였다. 코칭스태프 모두의 책임이었다.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왜 해설위원인가? 원래는 일본 또는 미국으로 연수를 떠난다고 했었는데.
“사실 해설위원은 여러 회사에서 수년 전부터 오퍼가 있었다. 하지만 현장이 좋았기 때문에 정중히 거절해왔다. 사표 내기 전에 해설위원을 염두에 둔 것은 절대 아니었다. 팀을 떠나기로 하면서 내 진로에 대해 다양한 고민을 했다. 야구인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지금 당장 내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다른 시각’이었다. 이전 서산으로 내려가 야구를 봤던 그 시각처럼 현장을 떠나서 다른 시각으로 야구를 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해설위원 만큼 좋은 직업이 없었다. 팀 성적에만 매달리는 야구가 아닌 전체적인 그림 속에서 야구를 보다 보면 내가 알지 못했던 깨달음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다. 미국 연수는 (박)찬호가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로 했었다. 한화에서 선수와 코치로 만난 이후 서로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게 됐는데 자신보다 내 걱정을 더 많이 한 사람이 박찬호이다.”
동기 박찬호와는 한 시즌을 선수와 코치로 인연을 맺었다. 오른쪽 사진은 1999년 한화 이글스 우승 멤버 강석천 송진우 장종훈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한화 이글스
―박찬호와는 동기인데 한 시즌을 선수와 코치로 인연을 맺었다. 묘한 기분이었을 듯 하다.
“찬호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복귀했을 때 친구라는 감정은 철저히 배제했다. 우리 팀 전력에 어느 정도의 도움이 될지에 대해서만 고민했다. 무엇보다 찬호가 합류하면서 젊은 선수들이 기회를 잃게 될까 걱정했다. 한대화 감독님과 오랜 대화 끝에 선발투수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결국엔 찬호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찬호는 우리 팀에 올 때 다 버리고 왔다. 아니 완전 발가벗고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군말 없이 선발 로테이션을 따랐다. 불펜행도 감수했다. 메이저리그의 코리안 특급 박찬호였는데, 과연 내가 찬호였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아마 못했을 것이다.”
―시즌 초반에는 박찬호답지 않은 구위로 흔들리기도 했다. 살짝 걱정이 되지 않았나.
“시범 경기 때 8실점을 했다. 팬들은 물론 우리 스태프들도 그의 실력에 대해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마흔 살 가까운 고참에게 뭘 더 바라겠나 싶었다. 로테이션 거르지 않고 자기 몫을 해내는 찬호를 보고 내가 ‘존경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부럽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박찬호니까 가능했다. 한화 이글스에서 보낸 1년은.”
정민철은 공교롭게도 92학번 동기생인 고 조성민과도 이글스에서 선수로 인연을 맺었다. 조성민도 야구선수로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 중에 있을 때 김인식 감독이 그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물론 조성민도 한 시즌 만에 팀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정민철과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새삼 그가 프로에서 올린 기록들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8년 연속 10승 이상을 기록했고, 데뷔 해에 14승 4패를 찍었으며 해마다 완봉승을 기록했고, 1999년에는 18승8패로 개인 최다승을 거둔 점 등등 정민철의 커리어는 화려하고 남달랐다. 이제 이글스의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비상을 꿈꾸고 있는 그이지만, 그가 해설위원으로, 아니면 또 다른 그 무엇을 하든, 정민철은 야구 후배들을 위해 헌신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정민철, 참으로 매력적인 야구인이었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정민철과 사람들 ‘국민감독’ 노트 읽고 0승→12승 정민철의 야구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제일 먼저 떠올린 이는 정민철과 배터리를 이뤘던 포수 강인권(현 두산 코치)이다. 1997년 5월 두산전에서 한국 야구사 최초의 퍼펙트게임이 나올 뻔했지만, 9회 심정수의 낫아웃되는 공을 강인권이 놓치면서 1루를 허용, 결국에는 노히트노런으로 마무리했던 ‘사건’의 주인공이다. # ‘퍼펙트게임’을 ‘노히트노런’으로, 포수 강인권 “포수와 투수는 ‘비키니’ 같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란 뜻이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진 않았지만, 둘만의 텔레파시가 있다. 인권이와는 13살 때부터 동네 친구로 함께 성장했다. 인권이가 포수를 맡을 당시 사인을 낼 때 고개를 가로 저은 적이 없었다. 그만큼 신뢰가 두터웠다. 그날 두산전을 퍼펙트게임이 아닌 노히트노런으로 경기를 마무리했지만, 인권이가 리드했기 때문에 노히트노런 기록을 달성한 것이다.” # 안타까운 생을 마감한 조성민 박찬호 임선동 조성민…. 전설의 92학번 세대다. 정민철이 그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대학 진학 대신 일찍 프로에 뛰어들었다는 것. 정민철은 이들과 자신이 ‘동기’라는 범주에 묶일 수 있다는 게 고맙단다. “난 대학 학번이 없다 보니 나이로 92학번생들과 동기를 먹었다. 워낙 대단한 선수들이 많아 그들과 친구라는 사실에 자부심이 생길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조성민과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같이 생활하며 속내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2000년 시즌 끝나고 가을에 LA로 들어가 한 달가량 숙식을 함께 하며 훈련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제대로 조성민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바탕이 참 깨끗한 사람이라고. 그 친구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렇게 삶을 마감하기엔 너무나 아까운 친구였다. 조성민에 대해선 회한이 참 많다.” 정민철은 1999년 시즌을 마치고 조성민이 뛰고 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그러나 거기서 보낸 두 시즌 동안 그는 8시즌 연속 10승 이상의 성적을 보인 에이스의 모습을 잃고 말았다. 그에 대해 이런 설명을 곁들인다. “당시만 해도 한국 무대가 좁다는 생각에 일본행을 감행한 것인데, 겉멋이 잔뜩 든 나머지 냉정하게 현실을 돌아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면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한국 프로야구가 투고타저였는데 방어율이 3점대 후반이었다. 즉, 1999년을 기점으로 난 하락세로 접어든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일본으로 갔으니 그 후유증이 얼마나 컸겠나. 마치 영국 가면서 파리 지도를 들고 간 셈이었다.” # 고교시절의 ‘거물 투수’ 임선동 “대전고 투수로 활약할 때 대통령배대회에서 휘문고의 임선동과 맞붙은 적이 있었다. 임선동의 공은 고등학교 선수가 던질 수 있는 수준의 공이 아니었다. 우리들과는 두 단계 위의 수준이었고,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듯했다. 나중에 프로에서 만났을 때는 그제야 그 친구의 공이 제대로 보이더라. 나도 당시에는 ‘다리 좀 떨 때’ 였으니까(웃음).” # 선수 생명을 연장시켜 준 김인식 감독 “2004년 0승7패, 방어율 7점대의 성적을 냈다. 2년 전 뼈조각 제거 수술을 받은 게 계속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때 운 좋게 김인식 감독님이 이글스 감독을 맡게 되셨다. 그 분이 나타나신 덕분에 야구를 몇 년 더 할 수 있었다. 그때 야구 안하고 그만뒀더라면 억울할 뻔했다. 감독님 덕분에 투구에 대한 재미를 알게 되었다. 당시 감독님이 내게 주신 노트가 있었다. 투구 이론이었다. A4 용지 15장 분량이었는데 그 노트를 보면서 내가 해온 야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 계기가 되었다. 감독님이 내게 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읽으면서 용기가 생겼다. 거짓말처럼 다음 해 12승을 올렸다. 2점대의 방어율을 찍고. 통증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정말 신기한 세상이었다.” # 류현진은 ‘난 놈’ 1997년 5월 ‘노히트노런’ 달성 당시와 한화 코치 시절 류현진을 지도하는 모습. 사진제공=한화 이글스 # 불멸의 투수 선동열 “감독님이 해태에서 주니치로 건너가실 때 나를 후계자로 점찍으셨다.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가. 95년 일본에서 열린 한일슈퍼게임에 갔을 때 나를 데리고 30분가량 원포인트 레슨처럼 볼을 잘 던지는 법에 대해 가르쳐주셨던 기억이 있다. 그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메시지가 스트라이크보다 볼을 더 잘 던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대부분 스트라이크를 던지려다 잘못 가면 볼이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선동열 감독님은 오히려 볼을 잘 던져야 스트라이크를 잡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말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