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화재가 유독 많았던 지난 8월 15일 광복절.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이날의 단신이 모든 일의 서막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타버린 2700만 원의 집기들 아래 금광이 묻혀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화재로 타버린 사무실을 수습하던 조 아무개 씨(38)와 김 아무개 씨(34) 등은 붙박이장을 뜯어내다 수상한 상자를 발견했다. 20㎝ 정도 파인 바닥에 라면박스보다 약간 작은 나무 상자가 있었던 것. 함께 일하던 세 명은 상자 앞으로 모여들었다. 상자를 열자 빛바랜 신문지로 싸인 손바닥만 한 직육면체의 물건들이 빼곡했다. 조 씨는 그 중 하나를 꺼내 조심스레 신문지를 벗겼다. 말간 금덩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머지도 확인했지만 내용물은 모두 같았다. 조 씨와 동료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경찰에 신고해야 할까’, ‘주인에게 알려야 할까’, ‘이렇게 큰돈이 묻혀 있는데 왜 아무도 오질 않지’… 한바탕 금괴를 둘러싼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금괴를 싸고 있던 신문지는 1980년대 날짜였다. 누군가 금괴를 묻어놓고 죽었거나, 찾으러 오기 힘든 상황인 게 분명했다.
난생 처음 본 큰돈 앞에서 판단을 내린 건 조 씨였다.
“딱 한 개씩만 나눠 갖자. 그리고 상자는 덮어서 다시 넣어두자.”
조 씨는 동료 두 명에게 금괴를 하나씩 주고, 자신의 주머니에도 한 개씩 넣었다. 다시 일에 집중하려 했지만 방금 본 광경 때문에 손이 떨렸다. ‘말 그대로 일확천금의 기회를 이대로 흘려보낼 순 없다’고 조 씨는 생각했다.
결심이 선 조 씨는 동료들의 금괴마저 욕심을 냈다. 퇴근 전 “이런 장물은 요령이 있어야 현금화할 수 있다. 내가 현금으로 바꿔서 주겠다”고 말하고 각자 하나씩 나눠가진 금괴를 챙겼다. 한 덩이에 5000만 원 가까이 값이 나가는 금괴를 팔아 며칠 후 동료들에게 2000만 원가량을 나눠줬다.
몸은 집에 왔지만 마음과 생각은 금괴 앞에 가 있었다. 동거녀 김 아무개 씨(40)에게 금괴를 내놓았다. 눈이 휘둥그레진 김 씨에게 “120개 정도가 더 있다. 가지러 가자”며 함께 잠원동으로 향했다.
새벽을 틈타 두 사람은 금괴를 나란히 나눠들고 현장을 빠져 나왔다. 로또 1등보다 더 큰 행운에 두 사람은 흥이 났다. 금괴가 사라진 걸 동료 중 누군가 알아채도 어차피 경찰에 신고하지 못할 터였다. 그야말로 완전범죄였다.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침대 밑에 65억 원을 두고 누웠다. ‘금방석’을 깔고 누운 김 씨는 더 큰 집에서 조 씨와 함께 행복하게 살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동상이몽이었다.
‘돈 맛’을 본 조 씨의 욕심은 점점 커져갔다. 괜히 김 씨에게 금괴의 존재를 알린 것 같아 후회가 밀려왔다. 한 번 그런 생각이 들자 3년을 동거하며 살아온 김 씨가 초라하고 미워 보였다. 이제 부자가 됐으니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미모의 여성 윤 아무개 씨(35)도 자신을 받아줄 것 같았다. 조 씨는 범행 3일 만에 변심해 조용히 모든 짐과 금괴를 싸들고 윤 씨의 집을 찾아갔다.
YTN 관련 보도 화면 캡처.
애인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된 김 씨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수십억 원의 금괴와 핑크빛 미래를 꿈꿨지만 단 3일 만에 김 씨에게 남겨진 건 금괴 한 개 값어치밖에 안 되는 단돈 몇 천만 원과 배신이었다. 그렇다고 조 씨를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김 씨는 고민 끝에 흥신소를 찾았다.
“남편이 금괴를 100개도 넘게 들고 도망갔어요.”
씩씩거리며 찾아온 초라한 행색의 40대 여성을 보고 흥신소 직원은 수상쩍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수십억 원이 넘는 절도 사건임에도 경찰이 아닌 흥신소를 찾은 점도 이상했다. 그대로 김 씨를 도왔다간 함께 철창신세를 질 것만 같았다.
김 씨가 사라진 애인을 찾아 헤매고 있을 시각, 조 씨는 새로운 애인 윤 씨와 함께 꿈같은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서울 중구에 3억 원짜리 전셋집을 구하고, 외제차를 몰며 매일 수백만 원을 유흥비로 썼다. 윤 씨에게도 선물을 척척 안겼다. 21억 원은 투자회사에 맡기고, 가족들에게도 수천만 원씩 생활비를 건넸다. 주변에는 “사업이 잘 돼 큰돈이 생겼다”고 말했다. 불과 3개월 만에 금괴 90여 개(약 45억 원)가 조 씨 수중에서 사라졌다.
흥신소의 제보로 수원경찰서에서 사건을 넘겨받은 서초경찰서는 끈질긴 추적 끝에 지난 2일 조 씨를 검거했다. 또 조 씨와 함께 금괴를 발견한 동료 두 명과 금괴를 자세한 확인절차 없이 사들인 금은방 업주 3명과 전 여자친구 김 씨까지 줄줄이 잡아들였다. 무려 7명이 연관된 대형 절도범죄였지만 정작 피해자는 이런 소동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피해자는 이미 10년 전 사망했기 때문이다. 금괴가 10년 넘게 잠들어있던 까닭은 이랬다.
금괴 주인인 박 아무개 씨(사망 당시 80세)는 생전 수천억 원대 학원재단을 설립한 자산가였다. 1960년대 서울 강남구 신사동 일대의 땅을 사들였고 한남대교가 69년 준공되면서 그 일대 부동산 가치가 크게 오르면서 박 씨는 부자가 됐다. ‘믿을 건 금뿐’이라는 신조로 돈을 벌어들이는 족족 금괴로 바꿔 차곡차곡 모았다고 한다. 금괴가 발견된 잠원동의 사무실은 원래 박 씨가 아내와 함께 살았던 집이다. 가족들도 모르게 붙박이장 서랍 밑에 그간 모은 금괴를 숨겨두었던 것. 그런 박 씨가 말년에 알츠하이머에 걸렸고, 병이 진행되던 2000년 가족들을 한차례 불러 모아 붙박이장 왼쪽 서랍 밑에 있던 금괴를 꺼내 10여 개씩 나눠주었다. 오른쪽 서랍 밑에도 금괴가 있을 거라고는 가족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같은 해 유언장도 작성했지만 병세가 악화되고 있던 터라 금괴에 관한 내용은 적지 못했다. 2003년 박 씨가 숨지면서 65억 원은 장롱 밑에서 잠들었다.
조 씨의 탕진으로 박 씨의 부인 김 아무개 씨(여·84)가 돌려받은 돈은 65억 원의 절반도 안 되는 23억 원 정도였다. 경찰 관계자는 “받을 돈이 줄었지만 김 씨 할머니는 오히려 ‘말년에 쓸 돈이 더 생겼다’며 정말 좋아했다”고 전했다. 아직도 세상에는 ‘보물섬’ 같은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자, 다들 주변을 한번 둘러보시길~
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
되찾은 금괴 상속세는? 추징기간 지났어도 50억 원 이상이면… 금괴 사건이 크게 화제가 되면서 김 씨 할머니가 과연 얼마의 상속세를 내야 하는지에도 관심이 쏠렸다. 경찰 관계자는 “사건이 알려지면서 국세청 직원이 경찰서로 직접 와서 사건의 경위를 자세히 듣고 갔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경우 셈법이 복잡해진다. 원래 박 씨가 남긴 돈은 65억 원이었지만 김 씨 할머니가 돌려받은 돈은 20억여 원 정도다. 때문에 현재 상태라면 세금은 납부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다. 하지만 김 씨 할머니가 추가로 돌려받을 수 있는 금액이 남아있다. 범인 조 씨가 살았던 아파트 전세비 3억 원가량과 벤츠차량, 명품시계 세 점은 공매를 통해 가격이 결정되면 돌려받을 수 있다. 또한 조 씨가 투자회사에 맡긴 돈도 소송을 제기한다면 다시 돌려받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해서 추가로 받을 수 있는 돈이 20억여 원 정도 더 된다고 경찰 관계자는 추정했다. 돌려받게 되는 금액이 50억 원이 넘어간다면 김 씨 할머니는 상속세를 내야 한다. 게다가 사건이 크게 번지면서 자녀들과 김 씨 할머니 사이에 금괴를 둘러싼 소송전까지 벌어질 조짐이 있어 셈법은 더 복잡해질 전망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납부하게 될 세금은 개인정보이므로 자세히 공개하긴 곤란하다. 관할 세무서에서 이번 건을 두고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