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버지의 어처구니없고도 엽기적인 성행각이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이 아버지가 성폭행한 여성은 다름아닌 자신과 피를 나눈 가족들이었다. 그가 강제적으로 성관계를 가진 여자들은 처제, 친동생 심지어는 자신의 두 딸들도 포함되어 있다.
더더욱 놀라운 점은 자신의 딸이 14세 되던 때부터 강제적인 성관계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과 성관계를 맺은 딸들과 여동생을 지하공장에 감금시키고 강제노동까지 시켰다고 한다.
여자들이 반항할 경우 전깃줄로 채찍질을 가했고, 집게로 엉덩이와 허벅지를 집어뜯는 등의 폭행으로 자신에게 저항할 의지를 완전히 상실케 하는 등 도저히 믿기 힘든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딸과 거의 매일 성관계를 가지면서도 자신의 부인과 같이 한 집에서 10년 넘게 살아왔던 것이다.
수원지검 수사관계자의 증언을 토대로 피의자들이 겪었던 악몽같은 세월을 추적해 봤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경기도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A씨(45). 그의 엽기적인 행각이 처음 시작된 것은 지난 80년대 중반이다. 그가 부인과 결혼한 것은 부인이 17세 때였다. 결혼 1년 만에 그는 첫째 딸인 M을 낳았고, 19세 때 둘째 딸인 N을 낳았다.
당시 특별히 하는 일이 없던 그는 성남의 처가집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A씨의 부인은 믿기 힘든 일을 겪게 되었다. 남편이 처제인 자신의 동생을 강제로 성폭행한 것이다. 그런데 동생과 남편은 오히려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되었고 자신이 머무르는 집에서까지 애정행각을 계속했다.
도저히 참지 못한 부인이 결국 이혼을 요구하자 A씨는 부인과 이혼한 뒤 처제와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된다. 그리고 그의 딸들은 전남 나주에 있는 할머니에 의해서 키워지게 되었다.
첫째인 M이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닐 무렵이 되자 A씨는 딸들을 다시 데려왔다. 그러나 A씨는 좋은 아빠가 되지 못했다. 그는 두 딸들을 상습적으로 때렸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귀가시간이 늦다는 이유였다. 텐트의 활대로 온몸을 무자비하게 때린 것은 도저히 교육적 차원의 체벌이라고 볼 수 없는 학대였다. 결국 보다못한 할머니는 다시 아이들을 나주로 데리고 가서 키웠다.
첫째 딸인 M이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다시 아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다. 그 무렵 A씨의 여동생인 S도 중학교를 졸업하고 한 집에서 같이 살게 된다. A씨는 여전히 좋은 아빠가 아니었다. 텐트 활대로 딸들을 때렸다. 심지어는 가죽줄에 바늘을 부착해 M의 목에 거는가 하면 바늘로 딸들의 발을 찌르고 펜치로 그녀들의 엉덩이와 다리를 집어뜯었다.
온몸에 상처가 난 M은 중학교 1학년을 다니다 그만두었고 둘째인 N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게 되었다. M은 중학교에서 학교를 대표해 과학경시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공부를 잘 했으나 어린 소녀의 예민한 마음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뒤였다.
그 즈음 A씨는 가방을 만드는 공장을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두 딸과 여동생에게 가방을 만들게 했는데 특히 이들을 지하실에 감금하다시피 가둬놓고 강제노동을 시켰다. 심지어 화장실 가는 것도 못하게 해 쓰레기통에 소변을 볼 정도였다.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이들은 A씨의 학대를 받아야만 했다. 사소한 실수만 해도 여전히 매질을 가했고, 이번에는 세 여자들끼리 서로를 때리고 펜치로 서로를 잡아뜯도록 시켰다.
반복되는 매질과 학대 속에서 A씨는 딸들과 여동생에게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했다. 세 소녀는 A씨가 하는 어떤 행동에도 조그만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A씨에 의해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된 세 여자는 도움을 청할 곳을 알지 못했고 또한 보복이 두려워 ‘수렁’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큰딸인 M이 12세가 되면서 발육이 좋아지자 A씨는 자신의 딸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M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몸을 내맡길 수밖에 없었다.
M양이 14세가 되자 A씨는 어느 날 고향인 나주의 야산으로 데리고 갔다. 딸에게는 난을 캐러 가자고 했다. 순진하게 아버지를 따라나선 딸은 아버지의 만행에 치를 떨어야 했다. 산에서 갑자기 그는 딸의 옷을 벗긴 뒤 딸의 겉옷을 바닥에 깔고 강간을 했다.
M양은 아버지의 행동에 전혀 반항할 수 없었다. 이것이 이후 10년 동안 이어진 아버지와 딸의 ‘악몽같은 관계’의 시작이었다. 부인과 같이 한 집에서 살고 있음에도 A씨는 일주일에 10번도 넘게 큰딸인 M양과 성관계를 가지면서 기이한 가족생활을 이루어왔다. 특히 둘째 딸과 여동생이 옆에서 같이 자고 있는데도 버젓이 첫째 딸과 성관계를 가졌다.
A씨의 행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99년 당시 24세인 자신의 친여동생까지 건드리기 시작했다. 첫째 딸을 찾아왔다가 여동생과 성관계를 가진 것이다. 얼마 후에는 당시 19세였던 둘째 딸과도 잠자리를 가지기 시작했다. 세 여자를 한 방에 몰아놓고 기분 내키는 대로 성관계를 가지며 세 여자를 성적 노리개로 삼았다.
그럼에도 A씨가 주로 성관계를 갖는 것은 큰딸인 M양이었다. 둘째 딸과 여동생은 가끔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잦은 성관계로 결국 첫째 딸 M양은 두 번이나 임신을 했다. A씨는 그때마다 임신중절수술을 받도록 했다.
이즈음 두 딸과 여동생이 성장하여 성인이 되어가자 아버지의 통제력이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성장한 자식들을 예전처럼 일일이 통제할 수는 없었다. 이때를 틈타 둘째 딸과 여동생은 가출을 감행했다.
M양도 가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녀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아버지에게 온갖 폭행과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이후 M양은 바깥세계에 대한 무지와 아버지의 매질이 두려워 가출은 꿈도 꾸지 못했다.
두 여자의 가출로 가방공장을 운영할 수 없게 되자 공장을 정리한 A씨는 큰딸 M양을 미용기술학원에 보냈다. 그러나 결코 혼자 학원에 보내지 않았다. 학원에 갈 때도 A씨가 직접 데리러 갔고, 퇴근할 때도 직접 데리고 왔다. 학원을 수료하자 A씨는 미용실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기술을 익힌 큰딸이 주로 손님들의 머리를 만지고, A씨는 카운터와 청소를 맡았다.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환경이 되자 A씨는 큰딸에게 24시간 붙어있으면서 철저하게 감시했다. 47세의 나이에 비해 30대 중반으로 보일 정도로 인물이 좋은 A씨가 주부 고객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미용실의 운영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그런 반면 큰딸에게는 손님들과 어떤 사적인 얘기도 하지 못하게 했다. “어떻게 깎아드릴까요?” 같은 업무적 얘기만 가능할 뿐 “머리결이 참 좋으시네요” 같은 얘기를 하는 날이면 그날 밤 딸에게 심한 모욕을 주었다고 한다.
미용실을 하게 되면서 큰딸에게는 30만원가량의 용돈도 주어졌고 퇴근하면서 화장품을 사서 쓸 수 있는 약간의 여유도 생겼다. 세상에 조금씩 눈떠가기 시작한 큰딸은 아버지와 자주 다투기 시작했다. 컴퓨터로 게임을 하면서 게임 상대자들과 채팅을 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PC게임을 좋아하는 아버지가 옆에 딸을 앉혀놓고 가슴 등을 애무하면서 게임을 하느라 딸도 어깨너머로 게임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채팅 사이트도 아닌 게임상에서의 대화에도 A씨는 민감하게 반응해 딸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2003년 12월4일 이 날도 채팅을 이유로 아버지가 딸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날 큰딸 M양은 큰 결심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탈출을 또다시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용실에서 채팅한 내용을 뒤지기 위해 A씨가 컴퓨터에 한눈을 팔고 있던 사이 딸은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겉옷을 제대로 챙겨입을 새도 없이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드디어 아버지의 손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에 의해 바깥세계와 차단된 채 오랫동안 지내왔던 M양은 막상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M양은 무작정 동네 슈퍼마켓으로 달려가서 사정을 말했다. 보다 못한 슈퍼 주인은 여성단체에 연락을 했고 M양은 결국 한 여성단체 쉼터로 갈 수 있게 되었다.
M양의 얘기를 들은 여성단체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곧바로 경찰에 이 일을 신고하게 되어 20년 가까이 벌어진 A씨의 엽기적 패륜행각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