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외용 돗자리와 검은 비닐봉지에 싸여 있는 40대 여성의 시신이 발견된 서울 신정동 한 빌라 앞 주차장. 지난 6월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지만 아직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 ||
숨진 두 여성 모두 사체 발견 전 날의 행방이 묘연한데다 범인을 추적할 만한 단서를 전혀 남기지 않아 용의자의 윤곽조차 그려낼 수 없는 상황. 평범한 여성들이어서 원한에 의한 살해 가능성도 거의 없고 금품이 없어지거나 성폭행을 당한 흔적도 없다.
여성을 상대로 살인만을 목적으로 한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악몽을 되살리며 신정동 일대에 공포감이 확산되고 있다. 경찰 내에서도 “혹시 동일범의 소행이 아니냐”라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몇 개월 사이에 사체로 발견된 두 여인의 행방과 단서를 남기지 않은 범인. 경찰은 날이 갈수록 초조한 입장이다.
이씨의 사체가 발견된 것은 지난 21일 오전 8시경. 신정동 모 빌라 앞 주차장에 검은 비닐봉지와 야외용 돗자리로 싸여 있는 것을 동네 주민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외관상 온몸에 멍이 들고 목을 졸린 흔적이 있었지만 부검 결과 이씨의 직접적인 사인은 기도 폐쇄. 범인이 입을 막아 질식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범인의 지문이나 DNA 등의 단서는 발견되지 않아 처음부터 수사에 어려움을 예고했다.
경찰을 더욱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사체 발견 전날 이씨의 행적. “오전 9시쯤 직장인 인근 마트로 출근한 후 돌아오지 않았다”는 유족들의 진술에 따라 휴대폰 통화내역과 지하철 CCTV 기록 등을 조사했지만 헛수고였다.
이씨가 마트에서 퇴근한 시간은 오후 4시. 그리고 4시30분경 집 근처 지하철역에서 내린 모습이 CCTV에 잡혔다. 기자가 역에서 이씨의 집까지 직접 걸어가 보니 불과 5~6분 거리. 하지만 그녀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이후의 행방은 묘연하다. 경찰은 “휴대 전화 통화기록을 추적했지만 18일 이후 가족 이외에는 통화한 사람이 없었고 낮이라는 점을 감안해 목격자들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탐문 수사를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성과가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범행은 언제 어디서 이루어졌을까. 부검결과 밝혀진 이씨의 사망 시각은 사체 발견 12시간 전인 오후 8시에서 9시경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오후 4시30분 이후 이씨의 행적이 밝혀지지 않았고 이씨의 유가족들은 “오후 6시부터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범행 장소 또한 의문이다. 사체가 발견된 곳은 이씨의 집 뒤편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 동네 주민들이 대강 손가락으로 짚어주는 방향으로도 이씨의 집이나 사체 발견 장소들을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경찰은 “사체 발견 장소가 이씨의 집 근처라 해도 범행이 동네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다른 지역에서 살해한 후 사체를 옮겨 놓은 것인지는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따라서 이씨가 범인에게 노출된 시간은 퇴근 후인 오후 4시30분에서 6시 사이인 것으로 보인다. 어딘가로 납치되었거나 끌려갔고, 살해당한 후 다시 그 자리에 버려졌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범인의 윤곽이 좀처럼 잡히지 않자 경찰은 몇몇 주민들을 상대로 양해를 구해 최면 수사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체가 유기된 곳이 빌라 앞 주차장인데다, 범인이 사체를 노끈으로 묶은 후 검은색 비닐봉지를 씌었고, 다시 야외용 돗자리로 싸서 묶은 것으로 볼 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작업을 한 후 차량을 이용해 옮긴 것으로 보고 혹시라도 목격자가 없는지 알아보려 했던 것.
▲ 양천경찰서에서는 피해자를 싸고 있던 돗자리 사진을 전단으로 만들어 사건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 ||
주민들이 공포에 떠는 이유는 이 사건이 일어나기 5개월쯤 전 거의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었다는 점.
지난 6월7일 아침, 권아무개씨(여·26)가 쌀자루에 담긴 피살체로 발견됐었다. 경찰은 모든 가능성을 감안하고 수사를 벌였지만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다.
유가족들은 공휴일이었던 전날 “점심을 먹은 뒤 치과에 간다고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경찰 조사 결과 권씨는 치과에도 가지 않았고 집을 나간 이후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권씨의 집은 신월동이지만 사체 발견 장소는 신정동에 있는 한 초등학교 앞이라는 점에서 권씨가 어디에서 살해돼 옮겨졌는지도 미궁에 빠져 있다.
주변인물 탐문 수사에 나섰던 경찰은 “권씨 역시 며칠 전 살해된 이씨처럼 내성적이고 외부 활동이 적어 원한을 살 만한 사람이 없다”면서 “젊은 여성인데도 불구하고 휴대폰 요금이 일만원 안팎으로 나올 정도로 통화 기록이 없어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발견 당시 쌀자루에 담겨져 있던 권씨의 사체는 부검 결과, 목이 졸려 숨진 것으로 밝혀졌지만 역시 범인의 지문이나 DNA 등이 남지 않아 범인 추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발견 당시 하의가 좀 내려가 있었지만 딱히 성폭행이나 금품 갈취의 정황도 드러나지 않았다.
두 범행은 여러 면에서 공통점이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범인이 자신의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는 점과 사체가 ‘제3의 장소’에서 이동되어 버려진 점을 볼 때 범인은 매우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하고 저지른 것으로 추정된다. 더군다나 두 구의 사체가 발견된 장소가 주민들에 의해서 쉽게 발견될 수 있는 주거지역 근처이고 특히 피해자가 실종된 지점 근처에 다시 사체를 버려놓은 것으로 볼 때 범인은 상당히 대담하고 마치 자신의 범행을 과시하려는 듯한 섬뜩함마저 느끼게 하고 있다.
비슷한 수법의 살인 사건이 연쇄적으로 벌어지자 신정동 일대 주민들 사이에서는 “몸조심해”라는 말이 인사가 돼 버렸다.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한 주민은 “얼마 전 다른 지역에서 온 손님이 집을 보러왔다가 어디서 이 사건 이야기를 듣고 ‘무섭다’며 그냥 돌아갔다”며 “범인이 잡히지 않으니 소문만 무성하다”고 혀를 찼다. 만나면 연일 이번 사건에 대해 얘기한다는 동네 부녀자들 역시 “한밤중은 물론 초저녁에도 돌아다니기 무섭다”며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재판이 되지 말아야 할 텐데 걱정”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주민들의 불안감이 가중되자 경찰은 수십 명의 인력을 동원해 수사를 벌이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뚜렷한 단서를 잡지 못하고 있다. 양천경찰서의 한 간부는 “주민들을 상대로 탐문 수사를 벌이고 있으며 동종 전과자나 미수에 그친 사람들을 상대로도 범행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며 “단서가 없는 만큼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양하나 프리랜서 hana01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