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6년 1월, 전국을 무대로 여성 100여 명을 유린한 연쇄 강간범 ‘발바리’가 드디어 잡혔다. 연합뉴스 | ||
이번에 대전 둔산경찰서 강력1팀 유동하 팀장이 전하는 사건은 엽기적인 성범죄자 이 아무개 씨(46)에 대한 것이다. 민첩한 행동거지 때문에 일명 ‘발바리’로 불렸던 이 씨는 지난 수년간 100명이 넘는 여성들을 상대로 파렴치한 강도강간 행각을 벌여온 것으로 밝혀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
유 팀장은 “수사과정에서 이 씨에게 몹쓸 짓을 당한 후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여성들을 만났다. 수년이 지났음에도 ‘요즘도 악몽에 시달린다. 차라리 죽고만 싶다’던 그들의 절규를 잊을 수 없다”면서 “이 씨는 경찰 수사망을 비웃듯 교묘하게 범행을 해왔지만 과학수사가 존재하는 한 강간범죄는 결코 완전범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 기회에 알리고 싶다”고 밝혔다.
지난 2006년 1월 19일은 대전 동부경찰서 형사들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8년여에 걸쳐 무려 100명이 넘는 부녀자들을 상대로 강도강간을 저질러온 ‘발바리’를 검거한 날이기 때문이다.
당시 대전 동부경찰서에 근무하며 이 사건을 담당했던 유동하 팀장은 1년 2개월여가 지난 지금도 그때의 어려웠던 수사과정을 떠올리며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발바리’ 이 씨가 언제부터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 대략 90년대 중반부터 대전 일대에서 혼자 사는 여성들을 상대로 강간을 저지르고 다니는 한 중년사내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이 무렵부터일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당시 대전의 원룸 밀집지역에서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빌라에 그놈이 나타났다더라’ ‘어젯밤에 △△동에 사는 여대생이 당했다더라’라는 루머가 나돌았다. 또한 불안한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성폭행경계령’까지 내리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경찰이 파악한 이 씨의 최초 범행은 지난 98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 씨는 대전 일대에서 택시기사로 일했는데 어느 날 술 취한 여자승객이 모욕적인 언행을 퍼부은 데 불만을 품고 범행을 시작하게 됐다’고 한다. 이후 그는 자신의 택시에 탄 여성이 내리면 그 여성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제대로 문을 걸어잠그는지, 집에 다른 사람들이 있는지 등을 확인한 다음 1~2시간쯤 지난 뒤 따라들어가 범행을 저질러왔다”는 게 유 팀장의 설명이다.
대전 일대에서 주로 술집여성들을 상대로 행해지던 그의 범행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과감해지게 된다. 유 팀장은 “2003년 6월까지 대전을 주무대로 활동하던 이 씨는 차츰 청주와 구미 등지로 활동영역을 넓히더니 2005년부터는 전국을 무대로 범행을 저질렀다. 또 초기에 술집여성들에게 국한돼 있던 범행대상 역시 주부와 대학생 심지어 미성년자로까지 확대해 무분별한 범죄행각을 벌여왔다”고 밝혔다.
시간이 갈수록 발바리의 범행수법도 점차 다양해졌다. 이 씨는 택배기사나 가스검침원으로 위장하는 수법을 사용하거나 아무도 없는 빈집에 들어가 있다가 밤늦게 귀가하는 여성들을 상대로 몹쓸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1998년부터 전국에서 발생한 77건의 성폭행사건현장에서 채취된 DNA와 이씨의 DNA가 일치했는데 1996년부터 발생한 30여 건의 유사사건도 이 씨가 유력한 용의자로 드러났다”는 것이 유 팀장의 얘기. 확인된 피해여성들만 100여 명이 훨씬 넘는다는 사실은 이 씨가 얼마나 무차별적으로 범행을 저질러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동안 이 씨는 수많은 부녀자들을 상대로 파렴치한 강간을 일삼은 전문강간범 정도로만 알려졌던 것이 사실. 하지만 사건을 담당했던 유 팀장에 따르면 그는 결코 단순 강간범이 아니었다.
▲ 경찰이 ‘발바리’ 이 씨를 잡기 위해 뿌렸던 수배 전단지. | ||
밤마다 성폭행범으로 돌변했던 이 씨가 개인적으론 대학생 아들과 직장에 다니는 딸을 둔 평범한 가장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완벽하게 이중생활을 해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신출귀몰’하던 이 씨가 경찰에 꼬리를 밟힌 것은 형사들의 발품과 과학수사 덕분이었다. 형사들은 피해여성들을 일일이 설득해 범인의 흔적(DNA)을 채취하는 한편 광범위한 탐문 수사를 벌이며 ‘발바리’를 압박해갔다. 경찰은 이 과정에서 동종 전과자 등 용의선상에 올릴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의 DNA 샘플을 범인의 것과 하나씩 대조작업을 벌였다. 무려 50만 건에 이르는 엄청난 데이터 분석도 거쳤다. 이처럼 시간과의 지루한 싸움을 벌인 결과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인물이 바로 이 씨였다. 유 팀장은 이 씨 검거와 관련한 아찔했던 뒷얘기도 털어놨다.
“수사에 착수한 지 딱 1년 만인 2006년 1월 9일 이 씨가 살고 있는 대전 집에 찾아갔다. 무척 추운 날씨였는데 마침 집 안에 있던 이 씨가 맨발로 현관에 나왔더라. ‘이러저러한 사건이 있는데 확인차 왔다’고 하니 ‘양말 좀 신고 오겠다’고 들어가더라. 근데 한참 지나도 안 나와서 들어가보니 가스배관을 타고 이미 도주한 뒤였다. 당시 얼마나 아찔했던지…. ‘무조건 잡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추적한 결과 서울 천호동의 한 PC방에서 며칠 만에 그를 검거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연쇄 성폭행을 저지른 이 씨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유 팀장의 이어지는 설명이다.
“보통 강간범들은 우락부락하고 험상궂게 생겼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상습적인 강간범들은 대체적으로 비슷한 체형과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평범한 얼굴에 왜소한 체격을 지닌 이들이 상당수다. 또 재빨리 위험을 감지할 뿐 아니라 동작이 무척 민첩해서 위기로부터 탈출하는 능력이 탁월한 특징이 있다. 이 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 팀장에 따르면 이 씨는 키가 170㎝도 안 되는 왜소한 체구(수배전단엔 157㎝)에 소심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위협적이지 않은 인물이었다. “대신 이 씨는 흉기로 여성을 위협해 항거불능 상태로 만든 뒤 강간을 저질러왔다. 이 씨가 가지고 다니던 생선회 칼은 보기만 해도 사람을 얼어붙게 만들 정도였다”는 게 유 팀장의 설명이다.
형제가 많은 집에서 태어난 이 씨는 넉넉지 못한 형편이라 제대로 학교를 다니지 못했으며 사춘기 시절부터 가출과 날치기 생활을 반복해왔던 것으로 알려진다. 불우한 가정환경과 평탄치 못한 성장기를 겪은 탓일까. 이 씨는 성인이 되어서도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씨는 집에서 혼자 바둑이나 ‘천년게임’ 같은 컴퓨터 게임을 즐겨 했다. 특별히 친분을 갖고 어울리는 사람도 거의 없었던 폐쇄적인 인물이었다. 특이한 점은 그가 오랫동안 조기축구회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누구보다 재빠른 몸놀림을 구사했던 이 씨는 공격수로 맹활약했는데 워낙 빠릿빠릿하고 민첩해서 축구회 내에서도 ‘발바리’로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축구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오는 등 회원들과도 좀처럼 어울리지 못했다고 한다. 가정생활은 평범했다. 20년 넘게 가정을 유지했던 것으로 봐 집안 내부적으로 특별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다 큰 자녀가 있음에도 TV 위에 콘돔이 널부러져 있는 것을 보니 정상적인 집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조사 결과 드러난 이 씨의 범행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이 씨가 강간한 여성의 수에 놀랐던 경찰은 그의 엽기적인 범행수법에 또 한 번 놀라야 했다고 한다.
이 씨는 경찰 수사망이 좁혀들어오자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주 무대였던 대전지역을 벗어나 전국에서 범행을 저지르는 교활함을 보였다. 또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피해 여성을 목욕시키는가 하면 신고를 막기 위해 피해자의 휴대폰을 감추는 등 매번 지능적인 범행을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신고를 막기 위해 범행 당시 피해자들의 수치심을 최대한 자극할 수 있는 변태적인 성행위를 했으며 ‘신고하면 결국 너만 손해다’ ‘남편과 주변사람들이 알아봤자 좋을 것 없다’ ‘경찰은 죽어도 나를 잡을 수 없다’는 식으로 겁을 줬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미친듯 성폭력을 저질렀던 이 씨가 돈에 대해서도 광적인 집착을 보였다는 점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유 팀장은 “도대체 이 씨가 왜 그렇게 성에 대해 집착을 했는지 모르겠다”면서도 “이 씨의 범행목적은 단순한 성욕해소 차원이 아니라 돈을 목적으로 한 부분도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씨의 지난 행적에서도 그런 흔적이 엿보인다는 설명이다.
“이 씨는 여성을 강간하고 뺏은 돈을 거의 쓰지 않고 대부분 저금했다. 돈 쓰기를 꺼려해 검거 당시에도 도피자금 100만 원 중 70만 원 가까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그는 지독하리만큼 돈을 쓰지 않았다. 돈을 쓴 내역을 살펴보니 싸구려 트레이닝복과 운동화를 사고 빵을 사먹은 것, 찜질방 요금이 대부분이었다. 보통 피의자들이 범행으로 챙긴 돈을 도박이나 유흥비로 펑펑 사용하는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 씨의 돈에 대한 집착은 주변 사람들의 진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에 따르면 이 씨는 수전노에 가까울 만큼 돈을 아꼈다고 한다. 영하의 날씨에도 보일러를 거의 돌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휴대폰 요금 때문에 아들과 심한 갈등을 빚어왔다는 것. 심지어 이 씨의 딸은 ‘아빠는 빵 하나만 먹고도 하루종일 거뜬히 견딜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했을 정도였다니 돈에 대한 그의 집착이 어느 정도였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씨의 돈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여주는 예는 또 있다. 이어지는 유 팀장의 이야기.
“이 씨가 잡혔을 때 현금 등 1억 3000만 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만약에 징역 몇 년을 살래? 아니면 갖고 있는 1억 3000만 원으로 피해자들과 합의를 보고 풀려날래?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이 씨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절대로 합의보지 않겠다. 나는 1억 3000만 원을 내놓을 바엔 차라리 징역 20년을 살겠다’고 하더라.”
유 팀장은 “이 씨가 위험을 무릅쓰고 범행을 계속했던 것은 성폭행이 체질화·습관화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씨에게서는 특별히 죄책감이나 반성의 표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면서 “피해여성들이 입는 심각한 고통과 후유증을 생각하면 상습적인 성폭행자들에 대해서는 영구격리 같은 강력한 대응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