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5년 8월 12일 오전 8시가 조금 지난 시각. 서초경찰서로 한 여성의 다급한 신고가 들어왔다. 오피스텔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는 내용이었다. 상황이 어찌나 다급했던지 이 여성은 상황설명은 고사하고 제대로 말도 잇지 못했다. 수화기 저편에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한 여인의 고통스런 신음과 울부짖음만이 계속됐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신고를 받고 출동한 수사팀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남양주경찰서 강력 1팀 이인열 팀장이 전하는 사건은 3년 전 발생한 ‘서초동 오피스텔 살인사건’으로 이 팀장이 서초경찰서에 근무할 당시 담당했던 사건이다.
신고를 한 사람은 친구의 오피스텔에서 잠을 자고 있던 황지연 씨(가명·29)였다. 당시 상황에 대한 이 팀장의 얘기를 들어보자.
“예상대로 오피스텔 안은 엉망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피투성이 상태로 쓰러져 있는 젊은 여성이었다. 바로 이 오피스텔에 세들어 살고 있던 박정화 씨(가명·29)였는데 전날 부산에서 올라온 친구 황 씨와 함께 잠을 자고 있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녀의 몸은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는데 노끈으로 목이 졸려 이미 죽어 있었다. 더구나 신고를 한 황 씨 역시 괴한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두 여성의 상태만 봐도 끔찍한 일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지난밤에 이 여성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피해자이기도 한 친구 황 씨에 따르면 사건이 발생한 시각은 이날 새벽 5시 30분께. 깊은 잠에 빠져있던 황 씨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부스럭’ 소리에 눈을 떴다고 한다. 그리고 방 안을 왔다갔다하는 낯선 사내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다. 겁에 질린 황 씨는 박 씨를 깨울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은 채 남자의 행동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 씨는 잠시 후 사내와 눈이 마주치고 만다. 겁에 질린 그녀는 엉겁결에 비명을 질렀고 당황한 남자는 들고 있던 흉기로 황 씨를 무자비하게 찔렀다. 남자가 휘두른 흉기에 무려 일곱 차례나 찔린 황 씨는 많은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피투성이가 된 황 씨가 죽었다고 판단한 남자는 황 씨를 침대 밑으로 밀쳐내고 옆에서 자고 있던 박 씨에게로 다가갔다.
친구의 비명을 듣고 잠에서 깬 박 씨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친구를 보고 기겁했다. 게다가 자신의 눈앞에 피묻은 흉기를 들고 서 있는 낯선 사내. 박 씨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도움을 요청할 방법은 없었다. 밀폐된 오피스텔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외부에서 알 리 만무했다.
박 씨가 소리를 지르며 반항하자 남자는 흉기로 그녀의 몸을 찌르며 강제로 유린했고 변태적인 성행위를 요구하기도 했다. 오피스텔에서는 한 여성의 고통스런 신음과 울부짖음만이 가득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세차례나 성폭행을 당한 박 씨는 거의 초죽음 상태로 널부러져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좀처럼 오피스텔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박 씨가 경찰에 신고할 것을 염려한 탓이었을까. 그는 미리 준비한 청테이프로 박 씨의 양 손과 발을 묶었다. 박 씨는 겁에 질려 “결혼이 석 달밖에 안 남았다”며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범인은 박 씨의 애원은 들은 체만 체 준비해온 노끈으로 목을 졸라 살해하고 만다. 그리고 현장 뒷정리까지 말끔하게 마친 남자는 유유히 오피스텔 문을 나섰다. 남자의 흉기에 찔린 후 죽은 듯 쓰러져 있던 황 씨가 경찰에 신고한 것은 남자가 사라진 직후, 그러니까 범행이 시작된 지 3시간여가 지난 뒤였다.
한 젊은 여성을 무참히 유린하고 목숨까지 빼앗은 잔악한 범인은 대체 누구일까. 또 그는 왜 이런 짓을 한 걸까. 다음은 이 팀장의 얘기.
“수사는 쉽지 않았다. 가장 난감했던 것은 현장에 범인을 특징지을 만한 어떤 흔적도 남겨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현장은 어지럽혀져 있었지만 범인을 드러내는 단서가 아무것도 없었다. 지문은커녕 머리카락 한 올 나오지 않았다. 그는 박 씨를 성폭행한 후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그녀를 욕실로 데려가 몸을 씻게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범인은 테이프를 이용해 박 씨의 손발을 결박하고 노끈으로 목을 졸라 살해한 것으로 확인됐는데 범행에 사용한 흉기는 물론 노끈과 테이프까지 깨끗이 수거해간 상태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체액이 묻어있는 침대 시트까지 깔끔하게 오려냈더라. ‘이거 보통 놈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격자가 없다는 사실도 수사팀을 막막하게 했다. 친구 황 씨가 현장에 있긴 했었지만 중상을 입고 극도의 공포상황에서 숨죽이고 있었던지라 범인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해낼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게다가 황 씨는 병원으로 급히 후송,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기는 했지만 정신적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단서는 현장에서 나오는 법. 다음은 이 팀장의 얘기.
천만다행으로 피살된 박 씨의 몸에서는 남자의 체액이 발견됐다. 수사팀은 국과수에 체액의 유전자 분석을 의뢰하는 동시에 박 씨의 오피스텔에 거주하는 입주자들을 상대로 탐문 수사에 들어갔다.
하늘이 도운 것일까. 극적으로 정신을 차린 황 씨는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범인의 인상착의를 희미하게 기억해냈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170cm 정도의 작은 키에 둥근 형의 얼굴’이라는 황 씨의 기억을 토대로 수사팀은 용의자를 좁혀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용의자를 특징짓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살인사건이 발생했다는 소식에 입주자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피하려고 할 뿐 수사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해당 오피스텔에는 300여 세대 1000여 명의 입주자가 거주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오피스텔의 특성상 대부분의 입주자들은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몇 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수사팀은 갖은 욕을 먹으면서도 오피스텔 입주자들을 상대로 일일이 탐문수사를 해나갔다. ‘강간도 모자라 죽이기까지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혹시 원한에 의한 것은 아닐까’ 수사팀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조사를 했지만 숨진 박 씨는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탐문수사 도중 의심스런 인물을 포착하게 된다. 바로 박 씨의 옆집에 살고 있던 김창식 씨(가명·28)였다. 다음은 김 팀장의 얘기.
“지방의 한 대학을 졸업한 후 광고업계에 종사한 적이 있던 김창식은 사건이 발생하기 약 1년 전 오피스텔에 입주했다. 당시 무직이었던 그는 전과하나 없는 그저 평범한 청년이었다. 수사 초기 우리는 그가 범인일거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의 행동이 너무도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김창식은 수사를 진행 중인 수사팀과 오피스텔에서 수차례 마주쳤지만 전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유유히 스쳐지나가곤 했다. 바로 옆집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는데도 다른 입주자들과 달리 그는 그다지 놀라는 기색도 아니었다. 오히려 사건이 일어난 직후부터 매일 밤 술을 진탕 마시고 유유자적 귀가하는 모습이 수사팀의 눈에 띄었다.”
하지만 사건 발생 11일째 국과수에서 통보해온 유전자 감식결과는 놀라웠다. 살해된 박 씨의 몸에서 나온 정액과 김 씨의 구강세포에서 채취한 DNA가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또 비디오 대질 결과 황 씨도 김 씨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수사팀이 그토록 찾아다닌 범인은 바로 ‘옆집 남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김 씨는 무려 5일 동안이나 범행사실을 극구 부인, 수사팀의 애를 먹였다고 한다. 조사 결과 드러난 사실은 이렇다.
약 1년 전 숨진 박 씨와 비슷한 시기에 오피스텔에 입주한 김 씨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인 박 씨를 눈여겨 보고 있던 중 욕정을 느끼고 몹쓸 범행을 결심하게 된다. 하지만 김 씨가 잡은 범행 날짜는 공교롭게도 박 씨가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와 함께 있던 날이었다. 모두가 잠든 늦은 새벽 욕정을 채우기 위해 박 씨의 집에 침입한 김 씨는 인기척에 눈을 뜬 친구 황 씨와 마주치게 된다. 박 씨 혼자 있을 것으로 알고 있던 김 씨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비명을 지르는 황 씨를 마구 찌른 김 씨는 황 씨가 쓰러지자 죽었다고 판단, 그녀를 침대 밑으로 끌어내렸다. 그리고 원래 범행 타깃이었던 박 씨에게 달려든 김 씨는 준비한 흉기로 그녀를 위협, 세 차례나 욕심을 채웠다. 또 반항하는 박 씨의 옆구리와 팔 부위 등을 수차례 찌르고 입에 담기 힘든 변태행위까지 요구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김 씨의 범행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다음은 이 팀장의 얘기.
“당시 박 씨는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였다. 박 씨는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창식의 머릿속에는 범행이 발각되지 않으려면 박 씨를 없애버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결국 그는 준비한 청테이프로 박 씨의 양손과 발목을 묶고 노끈으로 목을 졸라 살해하고 만다.”
김 씨가 잔악한 범행 후 증거인멸을 하는 등 나름대로 ‘완전범죄’를 모두 마치기까지 걸린 시간은 총 3시간. 그는 범행을 끝내고 옆 방인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흉기 등 범행도구를 낚시용 가방에 담아 한강으로 가져가 버린 뒤 태연히 미리 예정된 입사면접까지 봤던 것으로 밝혀져 경찰을 경악케했다.
특히 김 씨는 교사로 재직 중인 부모 밑에서 남부럽지 않게 자란 중산층 자제로 밝혀져 충격을 더했다. 특수강간 및 살인으로 기소,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김 씨는 항소심에서 우발살인을 주장하며 선처를 호소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피고인은 한 사람을 흉기로 찔러 사망한 것으로 착각한 후에도 다른 피해자를 성폭행하고 살해해 죄질과 결과가 중하고 치밀하게 흔적을 제거하는 등 범행수법이 잔인해 형이 무겁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재판부의 의견이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