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관계자는 “보너스나 성과급이 나오는 연말연시에 비밀계좌 문의가 급증한다”고 했다. 일요신문 DB
비자금을 숨기기 위한 남편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새로운 비밀금고 영역을 확장했다. 금융가에서 소리 소문 없이 인기를 얻고 있는 비밀계좌 서비스가 그것이다. 비밀계좌란 본인 이외에는 예금조회를 비롯한 어떠한 서비스에도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계좌를 뜻한다.
비밀계좌는 적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지 않아 존재를 알 수 없는 ‘스텔스기’와 비슷하다고 하여 ‘스텔스 계좌’로 불리기도 한다. 또 모바일 뱅킹 같은 스마트한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멍텅구리 계좌’라는 이름이 붙기도 한다. 보안 수위는 조금씩 다르지만 보안계좌, 숨김계좌, 투명계좌, 시크릿 통장 등으로 통하기도 한다.
2007년부터 등장한 비밀계좌는 당초 남편들의 비자금 조성과는 거리가 먼 서비스였다. 비밀계좌 서비스는 보이스피싱이나 파밍(정상적인 홈페이지 주소로 접속해도 가짜 사이트로 유도돼 개인 금융 정보 등을 몰래 빼가는 수법) 같은 전자금융사기를 예방하기 위해 금융감독원이 보완 대책을 주문하면서 생겨났다. 이에 시중은행들이 인터넷이나 모바일 뱅킹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고, 본인이 은행을 방문하지 않는 이상 계좌존재도 확인할 수 없는 서비스로 비밀계좌 상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비밀계좌 상품이 처음 나왔을 때는 가입자가 거의 없었다. 상품의 특성상 은행에서 별다른 홍보를 하지 않았고, 현재 널리 사용되는 인터넷이나 모바일 뱅킹을 이용할 수 없어 고객들의 외면을 받았다. 하지만 2~3년 전부터 비밀계좌가 비자금 관리에 용이하다는 풍문이 퍼지면서 기혼 남성 가입자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국민·신한·우리·하나은행 등 시중은행이 2014년 발표한 금융자료에 따르면 2012년 말 8만 1892계좌이던 비밀계좌는 2014년 말 12만 6383계좌로 늘어났다. 2년 사이 54%나 증가한 셈이다.
비밀계좌 서비스가 남편들의 새로운 비밀금고로 주목받게 된 이유는 ‘불편함’에 있다. 비밀통장은 본인이 신분증을 가지고 창구로 오지 않는 이상 계좌조회를 할 수 없고 입출금도 불가하다. 이는 부인이 남편의 공인인증서를 가지고 있거나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또한 다른 사람이 인터넷으로 접속해 거래를 해도 비밀계좌 존재여부 및 잔액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시중은행들은 이 같은 비밀계좌 서비스를 조금씩 다른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다. 신한은행·우리은행·농협은 ‘보안계좌’, 국민은행은 ‘전자 금융거래 제한 계좌’, 하나은행은 ‘세이프 어카운트’ 라는 이름으로 비밀계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 은행들마다 보안 수위의 ‘급’을 조정할 수 있다. 기업은행의 경우 지정한 지점에서만 계좌조회와 입출금이 가능하도록 설정할 수 있는 식이다. 물론 보안수위 설정에 따라 ATM과 통장계좌로 연결된 카드 정도는 사용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인터넷이나 모바일 뱅킹을 통한 금융거래는 불가능하다. 결국 이러한 불편함이 역으로 비밀계좌가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장점이 된 것이다.
이에 농협의 한 관계자는 “은행이 따로 홍보를 하는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창구에 있는 직원들도 비밀계좌 상품을 잘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비밀계좌 서비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설마 하는 마음에 남편의 비밀계좌를 확인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분들이 계신다. 하지만 본인 외에는 직원도 비밀계좌를 조회할 수 없기 때문에 도움을 드릴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실제로 보안계좌를 이용하는 고객 대부분은 남성이지만 최근에는 결혼 전 개인자산으로 묶어두기 위해 비밀계좌를 개설하는 미혼남녀들도 있다. 노후자금을 자식들이 손대지 못하게 하려고 소문을 듣고 어르신들이 찾아오기도 한다”며 “비밀계좌를 가지고 있는 고객 모두가 비자금을 감추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연말보너스나 성과급이 나오는 12월이나 이듬해 1월 사이 비밀계좌 문의가 늘어나는 것도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탈세나 돈세탁 등을 노린 진짜 ‘검은 비자금’을 맡기려는 생각은 접어두는 것이 좋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현재 국내에서 제공하고 있는 비밀계좌 서비스는 스위스의 그것과는 다르다. 스위스 비밀계좌의 경우 개설할 때부터 억대의 돈이 필요하고 돈을 맡긴 사람의 신원과 금액까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진다”며 “이와 비교해 국내 시중은행의 비밀계좌의 경우 휴면계좌를 비밀계좌로 바꿀 수도 있고, 1만 원만 있어도 개설이 가능하지만 세금 문제 등으로 금융당국에는 계좌가 보고된다. 같은 비밀계좌라고 해서 오해를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탈세나 돈세탁을 위한 계좌로 사용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
아날로그식 비자금 만들기 콘센트·연고 속에 꼭꼭…‘눈물겹다’ 당당하게 비밀계좌나 차명계좌를 이용해 비자금을 숨기는 ‘스마트’한 남편도 있지만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으로 자신의 비자금을 지키는 남편들도 많다. 가장 고전적인 방법은 회사나 집에 자신만의 비밀금고를 만드는 것. 회사 서랍이나 아내 손이 잘 타지 않는 자동차 공구함 등은 전통적인 남편들의 비밀금고다. 잔머리를 굴리면서 돈 나올 구멍을 찾는 여우형 남편도 있다. 가장 흔한 방법은 “올해 회사 실적이 안 좋아 상여금과 보너스가 없다”고 둘러대는 것. 하지만 부인들의 커뮤니티가 활발한 회사라면 하루도 안가 들통 나기 십상이다. 주변의 경조사가 있을 때 축의금이나 부의금을 부풀리는 수법도 있다. “어느 정도 해야 내 면이 선다” “그래도 누구 결혼식인데 어느 정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하는 남편의 체면을 모른 척할 수 있는 부인은 많지 않다. 아내에게 고가의 가전제품을 사주면서 평소 자기가 가지고 싶었던 물품을 끼워 넣어 한 번에 계산하는 방법도 있다. 커피를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200만원 상당의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면서 평소 사고 싶었던 30만 원짜리 헤드폰을 함께 계산하는 것이다. 이때는 선물 받은 아내가 기분이 좋은 틈을 타 구입물품 목록이 있는 영수증을 재빨리 은닉하는 것이 중요하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는 방식도 부인으로부터 비자금을 지키는 방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친구가 차용증을 쓰고도 잃어버렸다고 버티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 비자금을 지키려다 돈과 우정을 한꺼번에 잃을 수 있는 위험이 따르니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비자금이 부인에게 발각되면 부부간의 신뢰에 금이 갈 수도 있다. 남편은 부인이 섭섭할 정도로 오랜 시간 비자금을 은닉하지 말고, 부인은 남편의 입장에서 비자금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이해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의 지적이다. 서울가정문제상담소 김미영 소장은 “중년으로 접어드는 남성의 경우 교육권이나 경제권이 부인에게 넘어가면서 존재의 위기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이 때문에 부인 몰래 비자금을 만들기도 한다”며 “부부간 투명한 가정경제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남편은 부인이 비자금의 존재를 알게 됐을 때 애교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금액 정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또 부인은 남편들 대부분이 비자금을 만들더라도 자신을 위해 쓰기보다는 가족을 위해 쓰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알고, 남편입장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 갈등을 피하는 방법”이라고 당부했다. [배] |
아내들의 비자금 만들기 “비자금 아닌 비상금” 숨기는 대신 굴린다 결혼 7년차인 정 아무개 씨(34)는 출산 후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고 있다. 정 씨는 회사생활을 하는 남편을 대신해 육아를 도맡고 있지만 남편에게 서운한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정 씨는 어느 순간부터 부부싸움을 할 때 농담반 진담반으로 남편이 자신 명의로 된 카드를 내놓으라고 할 때마다 자존감이 낮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는 자신의 자존감을 위해서라도 비자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전업주부 박 아무개 씨(36)는 먼저 결혼한 언니들이 남편 모르게 ‘딴 주머니’를 하나씩 차고 있는 것을 알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대부분 조금씩 모은 쌈짓돈으로 부동산 투자를 하거나, 가족에게 위급한 상황이 생겼을 때 사용하기 위한 비상금이 대부분이었다. 간혹, 남편의 경제적 지원이 끊길 수도 있는 이혼을 대비해 비자금을 만드는 부인도 있었다. 하지만 친정 식구들을 몰래 돕기 위해 거액의 비자금을 만들어 주기적으로 송금하다가 남편에게 들통이 나 크게 부부싸움을 하는 경우도 있다. 현실적인 이유로 비자금을 만드는 남편들과 달리 부인들은 가족경제에 보탬이 되거나 언젠가 돈이 필요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위해 비자금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그야말로 비자금보다는 ‘비상금’에 가까운 개념인 것이다. 그러나 인생 2막을 준비하거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치밀하게 비자금을 만드는 여성도 적지 않다. 부인들은 주로 집안에 비밀금고를 만드는 남편들과 달리 제2금융권에 저축하거나 친목계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비자금을 만들고 불리기 위해 자기계발에 충실한 것도 여성들의 특징이다. 부동산이나 주식관련 공부를 하면서 목돈이 모이면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분야에 투자하는 방식이다. 남편들에 비해 치밀하고 조심성이 많다. 서울가정문제상담소 김미영 소장은 “남자들의 경우 낚시나 등산 같은 취미생활을 위해 비자금을 모으기도 하지만 여자의 비자금의 경우 가족을 위해 쓰게 되는 경우가 많다”며 “오히려 비자금을 잘 관리한 부인의 경우 또 다른 고민거리가 생기기도 한다. 조금씩 모아둔 비자금으로 투자에 성공해 목돈이 생기더라도 행여 남편이 자신의 재테크 실력에 기가 죽을까, 남편이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하는 것이다. 부인의 경우 비자금을 들키더라도 남편에게 솔직하게 얘기하고 좋은 의도로 모은 것이라며 설득하는 것이 좋다. 남편도 가족 뒷바라지를 하면서 살아온 아내가 심리적으로 뿌듯함과 행복을 가지는 방법일 수도 있다고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