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에서 ‘역사적인’ 첫 무대를 가진 <전국노래자랑> 행 사에서 진행자 송해씨가 재담을 펼치고 있다. | ||
지난 15일 방영된 ‘평양노래자랑’은 중장년층은 물론 젊은 층에서도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성악 발성’식 창법과 다소 ‘촌스러운’ 출연자들의 외모가 재미있게 다가왔기 때문. 이래저래 ‘노래로 하나된다’는 방송취지가 제대로 맞아떨어져 화제를 모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남북이 하나되는 평양공연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해부터 추진된 이번 평양노래자랑은 지난 3월 의향서를 보내고 6월26일부터 7월3일까지 남북교류협력단이 평양을 방문할 때까지도 합의점을 찾지 못해 공연이 무산될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서로 방송을 하는 목적이 달랐기에 벌어진 일로 봅니다. 우리는 남북이 하나 되는 모습을 보여 동질성 회복을 목표로 삼은 반면, 북측은 자신들의 하나된 모습을 보여주고 통일에 대한 의지를 얼마나 표출하는가에 신경을 썼죠.” 담당 PD의 전언이다.
특히 북측에서 고향이 이북인 진행자 송해씨(76·본명 송복희)를 문제 삼기도 했다고. 이에 KBS측은 “송씨가 진행하지 않는다면 방송을 않겠다”고 강력히 주장해 송씨의 방북을 허가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난관은 계속됐다. 북측은 자체 선발한 여자 사회자 전성희씨의 단독 진행을 고집하는가 하면, 공동사회 결정 후에도 송씨의 멘트 등을 문제 삼아 다섯 차례나 대본 수정을 요구했다. 녹화 1시간여를 앞두고는 송씨의 멘트가 길다며 4분의 1이나 싹둑 잘라 양측에서 말싸움이 오가기도 했다.
그러나 송씨는 한국 최장수 사회자가 아닌가. 방송에 들어가자 송씨는 대본에 구애받지 않고 즉석에서 순발력 넘치는 재담으로 3천여 평양 관객을 압도했다. 그의 활약으로 모란봉으로 무대를 옮긴 노래자랑은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 남측 게스트로 참석한 송대관씨(사진 왼쪽서 두번째)등도 화합의 열창을 선보였다. | ||
평양 노래자랑의 주인공은 무대 위에서 뛰어난 노래 솜씨를 과시한 출연자들이라기보다는 모란봉공원을 가득 메운 평양시민들이었다. 이들 평양시민들은 노래자랑이 펼쳐지는 동안 흥에 겨워 어깨춤을 추는 등 신명나는 분위기를 연출했고, 출연자들이 열창할 때마다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송씨가 “절세미인과 사회를 봐서 행복합니다. ‘남남북녀’라는데, 남에서 미남이 왔습니다”라며 너스레를 떨자 모란봉 공원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박장대소하기도 했다.
참가자 20여명은 모두 직장 단위 노래자랑 수상자들. 그들은 ‘반갑습니다’ ‘평양냉면이 제일이야’ 등 북한 가요와 ‘눈물 젖은 두만강’ 등 6·25 전쟁 이전에 작곡된 옛 노래를 불렀다.
직장인으로 구성된 16인조 아마추어 밴드가 드럼 가야금 만돌린 장구 아코디언 등 동·서양 악기로 반주해 눈길을 끌었다. 남측 대표 가수로 무대에 선 송대관, 주현미는 각각 ‘해뜰날’과 ‘우리는 하나’ 등과 함께 남북의 가요를 불러 흥겨움을 더해줬다.
진행자 송해씨는 방송 전후 몇 차례 인터뷰에서 눈물을 흘렸다. 고향이 황해도 재령인 그는 지난 20년 동안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면서 남북통일 노래자랑 사회를 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한다.
그간 이산가족 상봉의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한번도 신청한 적이 없다는 그. 기억에 남는 일화를 들려달라고 하자 공동진행자인 전성희씨 이야기를 꺼냈다.
녹화를 마친 뒤 공동 진행자 전성희씨가 행사장을 떠날 때 송씨가 “잠깐만” 하고 뛰어갔단다. 전씨의 고향은 황해도 송화. 재령과 지척이다. 마음 같아서는 고향집 주소를 적어주고 한번 찾아가봐 달라고 부탁하고도 싶었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주위의 시선이 둘에게로 집중된 데다 전씨가 나중에 고초를 겪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고 있는데 전성희가 “아버지, 건강하시라요”라며 두 손을 꼭 잡고 말하더란다.
송씨는 그때의 감동이 되살아났는지 잠시 목소리가 가라앉더니 이내 명랑하게 “앞으로 원산도 가고, 신의주도 가고, 해주도 가서 또 야단법석을 떠는 것이 내 꿈”이라고 했다.
권민희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