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에 나온 영화 <글렌 밀러 스토리>에선 기상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비행을 강행해 사고를 당한 것으로 처리했다. 위 작은 사진은 <글렌 밀러 스토리> 포스터.
1909년에 태어난 그는 30대 때 2차 대전을 겪게 되는데, 입대할 수 있는 나이가 지났음에도 군에 지원했고, 1942년부터 공군 악단을 이끌게 된다. 글렌 밀러 소령이 이끄는 군악대는 런던을 중심으로 연합군이 있는 지역을 돌며 위문 공연을 펼쳤고, 수많은 장병들의 향수를 달랬다. 전장에 울리는 글렌 밀러의 사운드는 자유의 상징이었으며, 군인들의 사기 진작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44년 12월, 영국의 베드포드에서 위문 공연을 마친 그의 다음 무대는 프랑스 파리였다. 그의 부대는 이미 바다를 건넌 상황. 그는 12월 15일에 엔진이 하나 달린 단발기 기종인 UC-64 노스먼에 몸을 실었다. 동승자는 노먼 배셀 중령. 그리고 파일럿인 존 모건이었다. UC-64 노스먼은 소형 기종으로, 2차 대전 당시 주로 응급 환자 수송을 위해 사용되었던 비행기였다. 영국의 베드포드 교외에 있는 클래펌의 공군 기지 트윈우드 팜을 떠난 비행기는 영국 해협을 건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비행기는 이후 그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글렌 밀러와 일행은 MIA, 즉 ‘전투 중 실종’(Missing in Action)으로 처리되었다.
위의 두 이론이 조금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된다면 세 번째 폭격설은 그럴 듯하다. 글렌이 탄 비행기는 당시 안개로 시야 확보가 힘들어 저공비행을 하고 있었다는 것. 그 위로 연합군의 폭격기가 지나가고 있었는데, 적으로 오인하고 폭탄을 떨어트렸다는 것이다. 1980년대에 제기된 이론으로, 2차 대전 당시 이런 오인 폭격으로 연합군의 비행기 138대가 추락했다는 통계가 나오자 그 비행기들 중 하나가 혹시 글렌 밀러의 비행기가 아닌지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한편 1955년에 나온 제임스 스튜어트 주연의 영화 <글렌 밀러 스토리>에선 기상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비행을 강행해 사고를 당한 것으로 처리했고, 일각에선 프랑스 쪽 해안에 추락했다는 설도 제기되었다.
이런 수많은 음모론들과 의혹들은 유족들을 괴롭혔고, 결국 글렌 밀러의 아들인 스티브 데이비스 밀러는 2009년에 제대로 된 조사를 글렌 밀러 재단 쪽에 의뢰했다. 그 결과 2014년에 가장 그럴 듯한 이론이 사람들 앞에 드러났다. 비행기의 기계적 결함에 의한 추락이라는 것이 결론이었다. 글렌 밀러가 탔던 UC-64 노스먼은 당시 카뷰레터(기화기) 부분에 결함이 종종 발견되곤 했다. 카뷰레터는 가솔린과 공기를 적당한 비율로 섞어 엔진으로 보내주는 장치인데, 기온이 낮아지면 착빙 현상이 일어나곤 했던 것. 겨울의 추운 바다 위를 날던 비행기의 연료 탱크와 엔진 사이를 연결하는 라인이 얼기 시작하면서 엔진이 멈추었고, 비행기는 곧 바다 위로 떨어졌을 거라는 것이다. UC-64 노스먼은 무게를 줄이기 위해 가벼운 금속을 사용했고, 빠른 속도로 바다에 떨어지면서 그 충격으로 기체가 산산조각 났을 것이며, 그 충격으로 글렌 밀러를 포함한 세 명의 탑승자들은 즉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35세의 짧은 삶을 전쟁 중의 바다 위에서 마친 글렌 밀러. 그의 죽음의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70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