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A 선수와 오래전 선배의 소개로 알게 된 동생입니다.”
한 씨가 인터넷에 올린 글을 이렇게 시작한다. 그는 작심한 듯 “A 선수가 연락하면 저는 무조건 올라갔다”며 “함께 유흥업소를 다녔고 그럴 때마다 술값을 제가 계산했다”고 토로했다. 더 내밀한 사생활도 언급했다.
한 씨는 A 선수의 아내 B 씨의 범죄사실과 약식명령서 사진을 첨부하며 “형수(B 씨)가 집에 와서 가방, 시계를 훔쳤다. 그런데도 A 선수는 저를 이상한 사람 취급했다. 확실한 사과를 받고 싶다”고 보탰다. 사과를 하지 않으면 3차 폭로 글을 올리겠다고 했다. 한 씨가 첨부한 약식명령서에 따르면, 2010년 1월 B 씨가 한 씨의 집에 들어가 한 씨 애인의 명품 가방, 시계 등 260만 원 상당을 훔친 혐의로 30만 원의 벌금형을 받았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지난 6월 29일 한 씨는 <일요신문>과의 전화 통화에서 “A 선수 따까리짓(종노릇)만 2년을 넘게 했다. 절친했다”며 “자기 와이프가 도둑질한 건데 교도소 3년 살고 나와 보니 A 선수가 이제 ‘연락을 끊자’고 했다. 너무했다”고 호소했다. 한 씨는 A 선수가 부모에게 보내는 돈을 대신 이체시켜준 적도 있다고 했다. A 씨 부부의 부모님과 친분도 있을 정도였는데, 절도 문제로 틀어지고 난 뒤 A 씨의 ‘나 몰라라’하는 태도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고 주장했다.
한 씨는 6월 30일 밤 경찰에 전격 체포됐다. 경찰은 공갈 혐의의 체포영장을 들고 있었다고 한다. <일요신문>은 이튿날인 7월 1일 대구북부경찰서에서 수사 관계자는 물론 유치장에 갇힌 한 씨를 만났다. 경찰 관계자는 “빼도 박도 못한다. 공갈이 맞다. 증거가 명확해 법원에서 바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고 설명했다. 경찰에 따르면, 한 씨가 글을 올리자 A 선수는 뛰어들 듯 황급히 경찰서로 와 “정말 억울하다. 어쩌면 좋겠느냐”며 “1년 내내 시합 다니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겠느냐. 죽고 싶다. 없는 사실을 지어내는데 미쳐 버리겠다”고 강력한 처벌을 요청했다. 한때 절친했던 한 씨와 A 선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경찰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재구성해본다.
그들이 처음 만난 건 지난 2009년, 한 씨는 선배로부터 A 선수를 소개받았다. 평소 A 선수 소속 구단의 열렬한 팬이었던 한 씨는 A 선수를 따랐고 A 선수도 한 씨가 마음에 들어 가끔 술자리를 했다고 한다. 자연스레 한 씨의 애인과 A 선수의 아내 B 씨도 서로 ‘언니 동생’이라 부를 정도로 가까워졌다. 하지만 1년 뒤인 2010년 겨울, A 선수와 한 씨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B 씨가 한 씨 애인 물건을 절취한 것.
당시 임신 중이던 B 씨의 아파트 수도가 동파됐다. B 씨는 한 씨의 애인으로부터 비밀번호를 얻어 한 씨의 집에서 샤워를 하고 한 씨 애인의 명품가방, 선글라스 등을 들고 나왔다. 한 씨는 “여기서부터 A 선수와 관계가 틀어졌다. B 씨가 다녀간 뒤 가방이 온데 간 데 없었다”고 말했다. 반면 B 씨는 경찰 조사에서 “옷을 담으려고 가방이 필요했고 ‘빌려달라’고 이야기를 해 동의를 구했다”며 “절도도 하지 않았는데 한 씨와 그 애인이 자기를 몰아세웠다. 억울했다”고 했다. 경찰 역시 “가방을 훔쳤으면 다음날 바로 고소해야 되는데 한 달 후에 했다. 이 점이 이상하다”고 밝혔다.
당시 한 씨는 다른 범죄로 인해 구속된 상태였다. 애인의 면회를 통해 절도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문제는 출소한 한 씨가 B 씨에게 “500만 원을 부치지 않으면 절도사실을 유포하겠다”면서 시작됐다. 경찰은 이 시점부터 한 씨의 공갈이 시작됐다고 보고 있다. B 씨는 남편인 A 선수에게 사실을 알리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다가 500만 원을 지급했다고 한다. 경찰은 “고소 전이라도 이 돈은 합의금의 성격이다”며 “그런데도 한 씨는 돈을 받은 뒤 ‘내가 A 선수 때문에 얼마를 쓴 줄 압니까’라며 하루 수십 차례 전화해 B 씨를 괴롭게 했다”고 밝혔다.
이 방법이 통하지 않자 한 씨는 결국 경찰에 B 씨를 고소했다. B 씨는 혐의 사실은 완강히 부인했지만 “변명하다보면 괜히 누가 나를 믿어주겠나 해서 이 사람들 사귄 죄로 절도죄 인정을 했다”고 한다. 한 씨의 협박 전화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경찰이 입수한 녹취록엔 B 씨가 “차라리 남편을 고소해라 나한테 이러지 말고…”라고 하자, 한 씨는 “이거는 고소 건도 안 되고 A 선수가 잘못을 해야 고소를 하죠”라는 내용도 있다고 한다.
참다못한 B 씨는 결국 A 선수에게 “큰일 났다. 협박당해서 500만 원 줬는데 자꾸 전화가 온다”며 절도 사실을 처음 알렸다. 당시 만나자는 한 씨의 제안에 A 선수는 “돈도 이미 가져갔는데 내가 왜 당신을 만나”라며 단칼에 거절했다. 이에 대해 한 씨는 <일요신문>과 만나 “A 선수가 사정사정해서 500만 원에 합의해줬다. 그 뒤에 협박한 사실은 없다”고 반박했다.
2012년 3월, 한 씨의 갑작스런 교도소행으로 사건은 끝나는 듯했다. 한 씨가 보이스 피싱 사기방조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교도소에 수감되는 일이 발생한 것. 그러나 이는 ‘3년 공백기’에 불과했다. 지난 3월 출소한 한 씨는 폭행죄를 범해 다시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A 선수에게 다시 연락해 “형님이 저한테 똑바로 사과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안 그러면 절도사실 유포하겠습니다”라고 했지만 A 선수는 이를 무시했다. 결국 한 씨는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A 선수의 사생활을 포함한 글을 폭로한다. 경찰은 “처음엔 명예훼손인 줄 알았는데 조사를 할수록 공갈이 명백했다”며 “폭로한 사생활 일부도 조사 결과 사실 무근이다”고 밝혔다.
반면 한 씨는 “A 선수와 단 두 번 접촉했다. 한 번은 호텔 프런트에 전화했고 한 번은 아는 동생들 시켜서 판결문(약식명령서)을 보냈다”며 “만나지도 못했는데 내가 바보도 아니고 이게 어떻게 공갈이 되나”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경찰은 “그 판결을 받은 걸 부하들 시켜 야구장 훈련하는 데까지 보낸 이유가 뭐였을까, 돈이 필요해서다”며 “잘못했으니 사과 받으려고 그 어려운 판결문을 떼가지고 보냈을까”라며 혐의 입증을 자신했다.
한편 A 선수는 경찰 조사에서 “판결문을 받았을 때는 이 정도로 별일 있겠나 싶어 참았다. 하지만 인터넷에 뜨니까 ‘정말 큰일을 저지를 사람이다’ 싶어 경찰서에 왔다”고 밝혔다. 아내 B 씨도 “연예인들이 왜 자살하는지 이해가 간다. 지금 임신 중인데 너무 괴롭다”고 호소했다. <일요신문>은 A 선수의 입장을 확인하기 위해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경찰은 한 씨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하고 이른 시일 안에 검찰에 사건을 송치할 예정이다.
대구=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