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두환씨는 몰리던 5공 후반기 끊임없이 친위쿠데타를 기도했다. 지난 80년 전역식에서 장병들을 사열하고 있는 전두환씨. 81보도사진연감 | ||
그런데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5공 정권에서 실제 기도됐던 친위쿠데타 및 친위적 성격의 군부 쿠데타 기도는 최소한 네 차례나 더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까지 확인된 것만 총 다섯 차례인 셈이다. 85년 4월부터 대선 직후인 87년 12월까지 그 격동의 3년 동안 쿠데타 기도는 집중됐다.
결과적으로 이 같은 끔찍한 기도는 번번이 좌절됐다.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미국측의 집요한 감시와 견제도 있었고, 온건파 측근들의 반대 의견도 한몫을 했다. 하지만 <일요신문>은 당시 친위쿠데타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여러 관계자들의 증언을 듣는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접했다. 당시 절대권력자였던 전 대통령에 대한 군부 내의 ‘항명’ 분위기가 심상찮았다는 것.
하나회 출신의 한 예비역 장성은 “당시 군 내부에서 전두환 노태우까지 싹 쓸어야 한다”는 강경론이 터져나왔다고 밝혔다. “전 대통령이 국민 여론에 밀려서 쿠데타를 접을 사람인가. 천만에. 철석같이 믿었던 후배 장교들의 반발 분위기를 보고받고는 뜻을 접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섣불리 군을 동원했다가 자칫 예측불허의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었다는 증언인 셈이다.
박철언씨는 회고록에서 “86년 11월의 친위쿠데타 계획이 전격 취소된 이유는 전 대통령만이 알 것”이라며 논란거리를 남겨뒀다. 그러면서 “당시 대통령의 지시가 워낙 강경해서 나도 준비 작업은 하고 있었지만 실현 불가능할 것으로 봤다”고 적고 있다. 내부에서도 반대 또는 회의적인 분위기가 제법 있었다는 정황을 대변하는 셈이다. 11월4일 미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이 압승을 거뒀고, 바로 이튿날 DJ가 전격적으로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한 것도 한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현재 뇌경색으로 투병중인 양순직 당시 신민당 부총재는 와병중에도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86년부터 풍문으로 나돌던 친위쿠데타설은 연말로 갈수록 구체적인 계획과 일정으로 내 정보망에 들어왔다. 육사 17기가 중심이라고 했다. 큰일 났다 싶어 DJ를 찾아가 ‘무조건 불출마선언을 하라. 군부에게 쿠데타 명분을 줘선 안된다’고 종용, 기어이 DJ의 불출마 선언을 이끌어냈다”고 밝혔다.
박씨에 앞서서 이미 3년 전 자신의 회고록에서 86년 11월의 친위쿠데타 음모를 먼저 밝힌 바 있던 양 전 부총재는 지금도 당시 친위쿠데타의 무산은 DJ의 불출마 선언에 따른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네 차례에 걸친 군부 쿠데타 기도와 이러한 기도가 무산된 전말은 어떠했을까. 당시 관련자들의 인터뷰와 관련 자료 등을 통해 집중 추적했다. 대부분의 하나회 출신 군 인사들은 친위쿠데타설을 부인하거나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85년 4월 5공 정권은 85년 새해부터 엄청난 민주화 요구에 직면했다. 2·12 총선을 통해 불어닥친 ‘신민당 열풍’은 가히 선거를 통한 쿠데타라고 할 만했다. 84년까지 강압 정치를 견지하며 안정(?)된 정국을 유지했던 정권 내부에서 처음 위기감을 느끼며 ‘친위쿠데타’라는 얘기를 거론한 시기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85년 4월의 친위쿠데타설은 한용원 당시 보안사 감찰실장을 통해 처음 알려졌다. 96년 ‘12·12 및 5·18 진상 규명 조사’ 당시 검찰 진술을 통해서였다. 그는 당시 조사에서 “안필준 보안사령관이 총선 직후인 2월13일 불러서 갔더니 3월경 전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는데 그 기간 중 친위쿠데타 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하였다”고 진술했다.
현재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로 있는 한 전 실장은 기자와의 전화인터뷰를 통해 “당시 안 사령관으로부터 그런 엄청난 지시를 받고 참 답답했다. 한번 피를 보고 세운 정권인데, 또 피를 보겠다는 것인지. 무엇보다 명분이 약했다. 그래서 ‘쿠데타 불가’ 보고서를 올렸다. 며칠 후에 안 사령관이 날 불러서 ‘정호용 참모총장, 장세동 경호실장과 셋이서 상의를 해봤는데, 한 대령 생각이 옳은 것 같다’고 전했다”고 밝혔다.
그는 “그후의 여러 정황을 종합해볼 때 친위쿠데타 계획은 전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서 장 실장이 세운 것이라고 본다”라며 그 증거로 장 실장이 그 후 안기부장으로 옮겨가서도 계속 친위쿠데타 계획을 주도했던 점, 그리고 당시 안 사령관의 지시 내용 가운데 ‘전 대통령이 미국에 가 있을 때 친위쿠데타를 일으키면 그후 대통령이 귀국해서 (쿠데타 상황을) 마무리짓는 방향으로 해라’였던 점 등 두 가지를 들었다.
그는 “당시 친위쿠데타가 내가 올린 한 장의 보고서 때문에 무산됐다고 보진 않는다”라며 “무엇보다 명분이 약했다. 국가적으로 큰 위기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정 총장이 적극 반대했던 것으로 안다.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면 그 역사적 책임은 군 책임자인 정 총장이 온통 다 뒤집어 쓰게 되어 있었다”고 전했다.
87년 6월 다섯 차례의 쿠데타 기도 중 가장 급박하게 돌아갔던 것은 바로 87년 6월 친위쿠데타 계획이었다. 당시 정국은 ‘4·13 호헌 조치’와 ‘6월 민주화 항쟁’으로 엄청나게 혼란스러웠다. 전 대통령은 “6월19일 오후 5시를 기해 군은 출동하라”며 이미 군과 정권의 고위 인사들에게 ‘거사’ 명령을 하달했다. 18일 밤 고명승 보안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국방부 장관과 각군 참모총장에게 출동준비 상황을 점검할 것을 통보하라”는 지시까지 했다. 그러나 불과 출동 25분 전에 이 명령은 전격 취소됐다.
당시 거의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졌던 친위쿠데타 계획이 또다시 취소된 것에 대해 그 배경을 둘러싸고 갖가지 의견이 분분하다. 5공측에서는 “실제 쿠데타 계획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시국이 너무 혼란스럽다 보니 전 대통령 특유의 긴장감을 고취시키는 고도의 심리 전략이었다”는 설명이다.
▲ 85년 4월26일 방미중인 전두환 당시 대통령. 86보도사진연감(위), 86년 11월 정부는 북의 ‘금강산댐’ 작전을 발표했다. 87보도사진연감. | ||
그런데 당시 군 장성급 인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전혀 다른 새로운 가능성이 제기됐다. 군부 내에서 ‘항명’ 사태가 일어났다는 것. 실제 정권을 떠받드는 군부 내 두 축인 보안사와 특전사에서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는 것. 보안사 참모들 가운데 일부는 고 사령관에게 “아무리 각하 명령이라도 군 출동은 안된다”고 면전에서 대놓고 반대하는가 하면, 민병돈 특전사령관 또한 “더 이상 유혈사태는 안된다”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나회 출신으로 5~6공에 걸쳐 군 요직에 있었던 한 장성급 인사 A씨는 “실제 하나회의 절대 영향력에서 다소 느슨해지는 육사 21기에서 26기까지의 영관급 장교 기수들은 정치 싸움에 군 동원설이 툭하면 거론되는 것에 대해 상당한 불만의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A씨는 당시 이와 같은 일련의 영관급 장교들의 리더격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는 “내가 좌장으로 모임을 이끌었다기보다는 당시 시국이 워낙 어수선한 때였기에 모여서 같은 관심사로 서로 얘기를 나눈 정도였다”며 “모임에서 말이 오가다 보면 다소 막가는 말도 나올 수 있지만, 전 대통령과 노 대표를 대놓고 성토하는 말도 오갔던 것이 사실”이라고 전했다. 그만큼 당시 군부 내 분위기가 심상찮았다는 것.
그는 “실제 쿠데타에서 중요한 위치는 장성들이 아니라 현장을 움직이는 영관급이다. 전 대통령이 누구보다 잘 알 것 아닌가. 영관급에서 자신에 대한 비토 분위기가 일고 있다는 내용을 보고 받은 전 대통령은 큰 위기를 느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실제 그 같은 정황으로 당시 안현태 실장이 나에게 ‘신중히 처신하라’는 식의 경고를 했는데, 그것은 대통령도 그런 움직임을 알고 있었다는 소리”라며 “나도 지지 않고 ‘똑바로 좀 국정을 이끌어 달라’고 맞받아 쳤다”고 전했다.
87년 11월 87년 대통령 선거를 한 달 정도 앞둔 시점에 군부 쿠데타가 계획되었다가 성사 직전 단계에서 취소됐다는 충격적인 내용은 당초 지난 99년 6월 김용갑 의원이 펴낸 자전에세이집을 통해 불거져 나왔다.
당시 김 의원이 밝힌 쿠데타 계획과 무산 사실은 상당히 추상적으로 서술됐다. 김 의원 스스로가 “무덤까지 가지고 갈 비밀”이라며 대강의 내용만 밝혔기 때문. 그래서 그 실체 존재 여부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도 나왔다. 하지만 당시 군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보면 그 같은 움직임은 사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 충격적인 증언도 있었다. 불과 5개월 전 전 대통령의 친위쿠데타 계획을 반대하고 나섰던 소장파 장교들이 바로 그해 11월 쿠데타 계획을 주도했다는 주장이 그것. 당시 이들은 “대선이고 민주화도 나라가 있어야 되는 것이다. 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억울한데 지역감정을 앞세워 무엇을 어쩌겠다는 거냐”라며 당시 정치권에 대해 모두 적대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그런데 11월 쿠데타설은 캐면 캘수록 두 가지 줄기로 갈라진다. 친위쿠데타냐, 아니면 역쿠데타냐 하는 것. 김 의원이 밝힌 쿠데타 주도 인물은 당시 현직 군인이 아닌 군 출신 인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여러 가지 정황을 들어 하나회 출신으로 79년 ‘12·12쿠데타’를 주도했던 H씨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했다. 한 군 출신 인사는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던 김 의원이 그와 같은 엄청난 사실을 대통령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 혼자서 처리했다면 H씨나 그 주변 인사들이 맞을 것”이라며 “그렇다면 그 쿠데타는 역쿠데타라기보다는 친위쿠데타적 성격이 맞을 것”이라고 전했다.
▲ 민주화 열기로 뜨거웠던 87년 6월의 명동성당. 88보도사진연감(위), 87년 12월20일 만난 노태우 대통령당선자와 전두환씨. 88보도사진연감(아래). | ||
그런데 이 쿠데타 계획 역시 성사 직전 단계에서 정보가 유출, 측근들의 집요한 설득으로 모두 무산됐다는 것이다.
87년 12월 5공 말기 군부의 쿠데타 움직임 때마다 예민한 행보를 보였던 미국측은 자체 정보망을 통해 87년 12월 대선 직후에도 쿠데타 계획이 있었다는 사실을 포착했다. 이 같은 내용은 미 국무부 비밀문서에 수록되어 있었고, <신동아>가 이 문서를 입수해서 96년 12월 보도하면서 국내에서도 처음 밝혀졌다.
미 국무부 비밀문서에 따르면 ‘한국군의 실무급 소식통은 노태우 후보의 대선 승리 뒤에 전국적인 소요 사태가 일어날 것에 대비, 한국정부가 계엄령 선포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소식통은 (한국 대선일인) 12월16일 18시에 열린 국가안보위원회 주요의제가 계엄령 선포 문제였다고 밝혔다. 계획은 12월17일 저녁 혹은 18일 새벽 4시에 계엄령이 선포된다는 내용이었다’로 적시되어 있다.
이에 대해 당시 5공 정권의 핵심 참모였던 K씨(작고)는 96년 언론의 확인 인터뷰에서 “실제 그런 논의가 청와대에서 있었다”고 실체를 인정했다. 실제 당시 정권 내부는 물론 군부에서도 노 대통령의 집권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는 것. 그런 점에서 이 같은 친위쿠데타설은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명분으로 전 대통령이 집권을 연장하거나 비상계엄을 통해서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려는 움직임이 그것이다.
하지만 당시 계엄령 선포 계획은 이를 미리 포착하고 예의주시해온 미국측의 반대로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12월14일 개스턴 시거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가 미국 CBS방송 인터뷰에서 “선거 후 한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난다면 미국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 어느 때보다 강경한 목소리로 “정치 과정에 군사개입을 하면 역사와 한국 국민들은 물론 미국 정부도 단죄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측근의 반대로 당시 쿠데타 기도가 무산됐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이미 대선 승리로 인해 권력 축이 전 대통령에서 노 대표로 급격히 쏠렸다는 것. K씨 역시 당시 인터뷰에서 “(쿠데타는) 안된다고 했다. 측근 중에서도 반대한 사람들이 많았다, 역사의 흐름을 막을 순 없다고”라며 이 같은 분위기를 뒷받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