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대형마트 지하 1층에 마련된 여성전용주차장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여성전용주차장은 ‘여성 운전자들의 안전하고 편리한 도시를 만들자’는 취지로 도입됐다. 서울시가 2008년 공영주차장 10개소 등에 여성전용 공간을 확대하면서 여성전용주차장을 본격 도입했다. 2009년 서울시는 조례를 제정해 30면 이상의 신규주차장에 여성전용주차장을 설치하도록 했다. 분홍색의 주차구획선과 치마를 입은 여성 그림이 여성전용주차장임을 표시한다. 서울시 주차계획과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여성 보호를 위한 취지였다”며 “2009년 당시 주차장에서 사고들이 많이 있어 서울시 조례로 ‘여성전용주차장’을 만들도록 했다”고 밝혔다. 2009년 이후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이 서울시를 벤치마킹하며 여성전용주차장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지금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서 여성전용주차장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본래 취지와는 달리 최근 여성전용주차장이 범죄자들이 노리기 쉬운 장소로 변하고 있다. 10일 오후 9시경,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사는 A 씨(여·37)는 인근 마트에 갔다가 위험천만한 일을 당했다. 장을 보고 마트 지하에 있는 여성전용주차장에 주차된 자신의 차로 향하는 도중 낯선 남자가 뒤에서 A 씨 등에 ‘차갑고 딱딱한’ 도구를 갖다 대며 가방과 지갑을 내 놓으라고 위협한 것. A 씨는 깜짝 놀라 장바구니를 던지고 소리를 치며 달아났다. 마침 주변에 있던 주차관리 요원이 소리를 듣고 뛰어 왔다. 낯선 남자는 그대로 도주했다. A 씨는 “너무 놀라 신고도 못하고 주저앉아 울기만 했다”며 “끔찍했다. 다시는 이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다. 앞으로 혼자 마트도 못 다니겠다”고 했다. A 씨는 그 남자를 경찰에 바로 신고했다. 주차관리 요원마저 없었다면 A 씨는 강도 살인 범죄의 피해자가 됐을지도 모른다.
범죄자들이 여성전용지하주차장을 ‘범죄 표적’으로 삼는 이유는 뭘까. 오히려 이들은 ‘여성전용’이란 점을 노린다. 여성들만 있다고 판단해 여성전용지하주차장이 다른 장소보다 더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는 ‘매력적인 장소’로 여기기 때문이다. 여성전용지하주차장에 찾아오는 특정 여성의 차량 종류와 옷차림을 관찰해 경제력 수준을 판단하기 쉽다.
‘트렁크 살인’ 사건으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김일곤은 장을 보고 나와 지하주차장을 찾은 여성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연합뉴스
대형 마트의 여성전용지하주차장 관리인들 역시 이 점을 우려하고 있었다. 전라북도 전주시의 한 대형마트 주차장 관리인은 “해당 마트 여성전용지하주차장엔 전부 CCTV가 설치돼 있다”며 “하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즉각 대처하기엔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주차 안내 요원 등 안전 인력을 늘리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의 또 다른 대형마트의 주차 관리인은 “외주업체를 통해 지하주차장 인력을 운용하고 있는데 인건비 등 현실적인 문제가 있어 안전요원을 곳곳에 배치해달라고 요구하기는 어렵다”며 “일하는 사람 중 아르바이트 학생들도 많다. 우발적인 강력 사건이 발생하면 즉각 신고할 수 있도록 교육중”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우발적인 범죄에는 대처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서울시 주차계획과 관계자는 “사실 여성전용주차장은 법적 근거가 없다”며 “장애인주차구역은 장애인 법에 근거를 두고 만들었기 때문에 벌금 등 제재 조항이 있지만 여성전용주차장에 그런 사항은 없다”고 밝혔다. 실효성 없는 조례 때문에 아이를 동반하거나 몸이 불편한 남자들도 여성지하전용주차장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 서울시뿐만 아니라 용인·부산 등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들은 여성전용주차장, 임산부전용주차장에 관한 사항을 ‘조례’로 규정하고 있다.
여성전용지하주차장뿐 아니라 아파트의 지하주차장도 범죄에 취약하다. 김일곤 사건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 지하주차장에서 여성을 노린 강도 사건이 또 다시 발생했다. 김 아무개 씨(30)는 9일 11시 50분경 구리시 소재의 한 아파트 지하 2층 주차장에서 B 씨(여ㆍ31)가 주차된 자신의 차량 운전석에 승차하는 순간 뒷자리에 올라탔다. 김 씨는 길이 30㎝의 식칼로 B 씨를 위협했다. 곧바로 남양주시의 한 은행 현금인출기로 B 씨와 함께 이동한 김 씨는 5차례에 걸쳐 120만 원을 빼앗아 도주했다. 경찰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그 아파트 주차장이 외진 곳이었고 예전부터 지하주차장 관련범죄는 많이 있었다”며 “보통 지하주차장이 깊은 지하층일수록 범죄의 표적이 된다. 범인들은 아무래도 외진 곳이 범행에 용이하다고 판단한다”고 전했다.
지하주차장은 범죄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다. 보통 지하주차장 곳곳에는 시야를 가릴 수 있는 굵은 기둥이 설치돼 있어 CCTV 사각지대가 많다. 백화점과 마트의 주차관리인은 주차장 출구나 입구에만 있을 뿐이다. 오히려 낮 시간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이 더 위험하다. 실제로 김일곤이 살해한 주 씨가 처음 납치된 시각은 오후 2시. 주차관리인이 없는 아파트도 부지기수다.
오래된 아파트의 지하주차장의 조명이 대부분 격등제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격등제는 에너지 절약을 위해 한 개씩 걸러서 형광등을 켜는 방식이다. 지하주차장 조명 설치 전문 업체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특히 아파트 관리비가 많이 나오면 주민들이 부담을 느낀다”며 “그러면 지하주차장의 켜져 있던 형광등도 다시 끈다. 이런 경우가 많다. 마트도 주차장 전기비용이 많이 나오면 조명을 낮춰 어둡게 한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지하주차장 설치에 관한 법의 실상은 어떨까. 주차장법 시행규칙 역시 허술한 규정으로 채워져 있다. 주차장법 시행규칙 제6조 11호는 “주차대수 30대를 초과하는 규모의 지하식 주차장에는 CCTV를 설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11호는 관리사무소에서 주차장 내부 전체를 볼 수 있을 것, 주차장의 바닥면으로부터 170㎝ 높이의 사물이 식별 가능할 것, 선명한 화질을 유지할 것 등을 안전기준으로 명시하고 있다. 국토교통부 도시광역교통과 관계자는 “주차대수가 30대 이상인 경우는 의무적 설치다. 다만 현재 몇 대 이상 설치해야 된다는 규정은 없다”고 전했다. 법적 강제성은 있지만 CCTV대수, 보안요원의 숫자 등에 대한 구체적인 안전기준이 ‘누락’된 것.
법의 허점 때문에 대형 마트 지하주차장의 안전 확보 방안은 미봉책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이마트는 주차장 조명을 밝게 하고 주차장 기둥마다 ‘위급·긴급상황 발생시 연락할 보안 연락처’ 등의 안내문을 달았다. 롯데마트도 주차장 조명을 밝게 조정하고 주차장의 안전에 대한 안내 방송을 늘렸다. 이마트 관계자는 “상대적으로 지하 더 깊은 층에 있다거나 지상의 높은 층을 보안사원이 순환하며 순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롯데마트 관계자는 “매장 내 계도활동, 포스터 등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들은 ‘인력의 추가배치’나 ‘CCTV 추가 설치’ 등에 대해선 “비용 때문에 부담스럽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경찰청은 12일부터 대형마트·백화점·아파트 주차장 등 여성 대상 범죄에 취약한 장소를 전수 점검 하고 있다. 트렁크 시신 사건 등 강력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 경찰청이 마련한 ‘생활치안 강화대책’의 일환이다. 일선의 경찰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마트와 백화점 지하주차장에 대한 방범 진단을 전국적으로 실시하고 있다”며 “본청에서 추진하는 것이기 때문에 백화점, 대형마트 지하주차장 등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돌고 있다”고 밝혔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