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불암과 김혜자가 실제 부부인 줄 아는 사람이 많다는 에피소드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매주 한 차례씩 10년 넘게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부부로 출연하니 대중이 그렇게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최수종-하희라, 연정훈-한가인, 차인표-신애라, 지성-이보영 등 드라마에서 연인으로 호흡을 맞춘 후 실제 연인으로 발전해 결혼에 골인한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굳이 멀리 가지 않더라고 최근 드라마 <화려한 유혹>에 함께 출연했던 주상욱-차예련은 공개 연인을 선언했고, 지난해 드라마 <블러드>의 남녀 주인공이었던 안재현-구혜선은 오는 5월 결혼식을 치른다.
SBS ‘런닝맨’에서 일명 ‘월요커플’로 호흡을 맞추고 있는 개리-송지효.
이는 드라마뿐만 아니라 예능을 바라보는 시선도 비슷하다.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경우 현실과 설정을 오가기 때문이다. SBS <런닝맨>에서 일명 ‘월요커플’로 호흡을 맞추고 있는 개리-송지효의 실제 교제 여부는 몇 년째 팬들의 관심사다.
지난해 8월 개리가 SBS <힐링캠프-500인>에 출연해 송지효와 가진 전화통화에서 송지효는 “개리 씨가 기습 뽀뽀를 했을 때 마음이 어땠냐”는 시청자 MC의 날카로운 질문에 “(뽀뽀를) 했을 때는 아무 감정이 없었고, 깜짝 놀랐다. 근데 (뽀뽀를) 하고 난 후에 설레는 게 조금 있었다”고 솔직 답변해 화제를 모았다.
개리는 “너무 편한 사이라 아무리 해도 안 된다. 5년이면 진짜 ‘썸’ 탈 만한데 일만 하는 관계”라며 “5년간 방송 외적으로 단 한 번도 연락한 적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는 눈초리는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연예인들이 주어진 역할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캐릭터에 동화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캐릭터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원래 자신의 모습을 버리는 과정을 반복하기도 한다.
최근 개봉된 영화 <날, 보러 와요>의 주인공 강수아를 연기한 배우 강예원은 이 같은 이유로 영화 촬영 내내 심적 고통에 시달렸다. 극중 영문도 모른 채 정신병원에 감금돼 철저히 고립된 여성의 심리를 표현하기 위해 강예원은 지인들을 비롯해 동료 스태프와 연락을 끊었다. 촬영장에 있을 때도 다른 배우들도 어울리지 않았다. 정신병원 원장 역할을 맡은 배우 최진호와는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강수아에 한참 몰입했을 때 친한 친구가 나와 연락하려는데 안 돼서 매니저를 통해 연락을 했다”며 “친구에게 화를 냈고 나중에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사과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영화 <나의 독재자>에서 설경구는 김일성 역을 맡은 후 역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대역 배우의 애환을 연기했다. 하지만 그 역시 출세작인 <박하사탕>에 출연한 후 똑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당시 언론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박하사탕> 때 배역에서 못 빠져 나왔다. 경험도 없고, 현장의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영화 속 의상을 입고 일상생활을 해서 그런지 6개월간 빠져 나오지 못했다”며 “인터뷰할 때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뒤늦게 고백하기도 했다.
‘악마를 보았다’의 최민식.
지독한 악역 연기는 실제로 배우의 심신을 피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연기를 잘할수록, 캐릭터에 몰입할수록 캐릭터와 동화돼 가기 때문이다. ‘연기 9단’이라 불리는 최민식은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서 연쇄 살인마를 연기하며 스스로 캐릭터에 사로잡혀가는 아찔한 경험을 했다.
당시 개봉 전 인터뷰를 가진 최민식은 “영화 촬영하기 전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웬 아저씨가 친근감을 표시하며 “어디 최씨야?”라고 묻길래 “전주 최가예요”라고 대답을 했는데 그 순간 ‘이 새끼가 왜 반말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 순간 나 자신에게 섬뜩함을 느껴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고 말했다.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뿐만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대중 역시 실제 모습과 드라마 속 모습을 혼동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요즘 ‘군인’ 하면 대중은 송중기와 진구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마찬가지로 ‘변호사’ 하면 박신양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KBS 2TV 드라마 <동네변호사 조들호>에서 변호사 역을 실감나게 소화하기 있기 때문이다.
군복무 중 <태양의 후예> 대본을 받은 송중기는 지난해 5월 전역한 직후 대본 리딩을 갖고 촬영에 돌입했다. 이미 2년 가까이 실제 군 생활을 해온 터라 ‘다나까’ 말투와 군인다운 몸짓을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사전제작 드라마이기 때문에 이미 촬영을 마치고 몸에 밴 ‘군인스러움’을 벗을 때쯤 드라마가 시작됐다. 그러다 보니 송중기는 요즘 가는 곳마다 “다나까 말투로 말해 달라”는 주문을 받곤 한다.
한 연예계 관계자는 “대중은 스타의 실제 모습과 작품 속 모습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오해 때문에 두 이미지 사이에 괴리감이 느껴질 때 실망하곤 한다”며 “때문에 선한 역할을 자주 맡는 스타들은 ‘착한아이 콤플렉스’를 겪을 수밖에 없고, 악역 전문 배우는 CF 출연 기회가 줄어들고 괜한 눈총을 받는 설움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