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유통된 해상벙커C유와 정품 기름 등이 저장된 저장탱크. 신 씨가 추격전을 앞두고 직접 촬영했다.
“거리를 두고 쫓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방향을 바꾸더라고요.”
당시를 회상한 남자의 말이다. 남자는 탱크로리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봐야만 했다. 마지막 확인 대상이었던 화물차 차고지가 코앞이었다. 경남 창녕에서 부산신항 인근까지 이어진 추격전은 거기서 끝났다. 남자는 기록한 차량 번호와 블랙박스 영상을 경찰에 넘겼고, 경찰은 이를 수사 증거자료로 활용했다. 그리고 지난 2017년 2월, 257억 원 상당의 고유황 해상벙커C유를 불법유통한 일당이 부산지방경찰청 해양범죄수사대에 검거됐다.
해상벙커C유는 대형 선박에서 사용 후 남은 해상용 중유다. 일반 벙커C유에 비해 황 함유량이 13배 높아 연소할 경우 미세먼지 등 대기오염과 호흡기 질환, 암을 유발한다. 이 때문에 육상에서는 판매‧유통이 엄격하게 금지돼 있다.
앞서의 검거된 일당은 울산의 유명 중소정유소 대표와 임직원들이다. 이들은 지난 2014년 1월부터 2016년 9월까지 아스콘 공장 40여 곳, 전국 중앙 집중식 주공 아파트 5000여 가구에 이 기름을 유통했다. 그동안 해상벙커C유 불법유통 사건은 종종 발생했지만 공장이 아닌 아파트에 대규모로 공급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은 해상벙커C유 수집 담당, 관리영업, 가짜 경유 제조판매, 비자금 관리 등으로 업무를 분담하는 등 조직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 아파트, 그리고 수상한 흔적
경남의 한 주공 아파트. 알 수 없는 기름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건물 곳곳은 물론, 빨래에도 까만 그을음이 생겼고 집 안에서도 매연 때문에 호흡이 곤란하다는 민원이 끊이질 않았다. 아파트 대표회의에서 이 문제가 여러 번 안건에 올랐지만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미스터리로 남을 것만 같았던 이 ‘수상한 흔적’의 원인은 지난 2015년 8월, 앞서의 추격전을 벌인 한 남자의 내부고발로 밝혀졌다. 문제가 된 울산 중소정유회사에서 일하던 신인술 씨다.
지난 2015년 1월, 이 회사에 탱크로리 기사로 입사한 신 씨는 2달 뒤 자신이 운반하는 기름이 해상벙커C유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탱크로리 운전 경력만 10년이다. 운반하는 동안 고약한 냄새가 올라와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고 깜짝 놀랐다”며 “정품 기름과 해상벙커C유는 색깔은 비슷하지만 밀도차이가 크다. 전문가가 아닌 누구라도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할 정도다”라고 말했다.
결정적 증거도 있었다. 회사에서 단체 카카오톡 채팅방을 개설해 탱크로리 기사들에게 ‘가짜 전표’를 만들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회사는 정품 기름을 들여오는 대기업 정유소의 전표를 위조해 해상벙커C유를 정품으로 둔갑시키도록 지시했다. 입출고 내역 등 운반과 관련된 허위 전표를 만들어 단체 카카오톡 채팅방에 올리면, 회사에서 최종 업무 지시가 내려오는 형태였다.
회사는 신 씨 등 직원들을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을 통해 ‘가짜 전표’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신 씨가 내부고발을 하기로 결심한 것은 거래처 가운데 아파트 단지가 섞여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다. 그는 “기름을 운반하러 갔더니 아파트였다. 말이 좋아 기름이지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에서 사용하면 발암물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라며 “특히 내가 기름을 운반한 주공 아파트는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죄책감에, 별 생각이 다 들었다”고 말했다.
2015년 8월, 신 씨는 회사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7개월 간 모았던 증거자료를 토대로 부산지방국세청에 전달했다. 면세유를 불법유통했으니, 회사에 탈세 혐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 달 뒤, 불법행위가 인정된다고 판단한 부산국세청은 회사가 위치한 동울산세무서에 사건을 이첩했다. 동울산세무서는 또 다시 한 달가량 조사를 벌인 뒤 담당자들이 신 씨와 동행해 울산지방검찰청으로 향했다. “어려운 일을 혼자 했다”며 신 씨를 따뜻하게 맞이한 검사에게 4번의 조사를 받으면서 사건은 모두 해결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 알 수 없는 이유로 수사 중단
두 달이 지나도 국세청, 검찰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2016년 1월, 기다리다 못한 신 씨가 직접 검찰청에 문의 전화를 걸었다. 황당한 답변이 들려왔다. 신 씨는 “검찰청에서 그런 사건은 조사한 적이 없다고 했다. 검사도 바뀌어 있었고 고발된 사실도 없다고 했다”며 “동행한 동울산세무서 관계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당시 검찰에 고발한 게 아니라 수사요청만 했다면서도 조사는 세무서에서도 별도로 하고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또 다른 데서 불거진다. 내부고발자 신 씨의 신분이 회사에 노출된 것. 2016년 5월 말부터 회사 관계자들이 신 씨에게 전화를 걸어오기 시작하더니, 집까지 찾아오기 시작했다. 특히 회사 사장은 신 씨에게 전화 통화로 살해 협박을 했다.
신 씨가 녹음한 통화 내용을 들어보면, 신 씨가 “고발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자 사장은 신 씨가 동울산세무서에 제출했던 증거를 하나씩 말하며 “왜 고발했느냐?”고 따져 물었다. 사장은 이어 신 씨의 가족들의 이름을 대며 “이 일만 10년을 했는데 믿는 구석 없이 그동안 어떻게 일을 했겠냐. 당신 실수했다”고 말했다.
이후 신 씨는 2016년 10월까지 도피생활을 했다. 강원도와 경남 일대를 오가면서 배추밭 일이나 대리운전을 했다. 그 사이 신 씨는 동울산세무서로부터 조사가 끝났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런데 ‘법과 원칙에 따라 조사를 마쳤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전화를 걸어 결과를 물으니 ‘증거부족’이었다. 신 씨는 “해상벙커C유를 공급하는 브로커 업체부터 운반하는 차량, 저장소 위치, 허위 전표와 카카오톡을 통한 회사의 지시 기록까지, 이 이상 어떤 증거가 더 필요하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신 씨가 제출한 증거 중 하나인 허위 전표. 회사는 해상벙커C유를 ‘H’로 표시했다.
이에 대해 동울산세무서 관계자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개인적으로 답변을 드릴 수 없다”면서도 “조사 과정에 대해 신분 노출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건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다”고 말했다. 동울산세무서 조사과 관계자는 “절차에 따라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당사자가 아니면 조사 내용에 대해 알려줄 수 없다”고 말했다. 반면 신 씨는 제보 당사자임에도 2016년부터 최근까지 세무서 측으로부터 어떠한 답변도 듣지 못한 상태다.
이후 신 씨는 국회와 청와대 국민신문고, 국민권익위에 민원을 넣는 등 도움을 요청했지만, 역시 별다른 도움은 받지 못했다. 돌아오는 답변은 모두 “다른 곳에 문의하라”는 내용이었다. 청와대는 국민권익위에 문의하라고 안내했고, 국민권익위는 조사권, 수사권이 없다며 수사기관에 도움을 요청하라는 답변만 내놨다. 신 씨는 “검찰 수사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중단된 상황에서 수사기관에 다시 고발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고민을 많이 했다”며 “도대체 공익제보를 한 내가 왜 이렇게 지옥 같은 생활을 해야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신 씨가 도움을 요청한 곳은 부산지방국세청 감사관실과 부산지방경찰청 해양범죄수사대다. 세무서 등에서 업무처리가 석연치 않으니 확인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부산국세청 감사관실은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조사 부서를 바꿔 조사에 착수했다.
부산지방경찰청의 경우, 신 씨가 고발장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검찰 수사가 돌연 중단됐다”는 주장을 고려해 고발을 취하하고 인지 사건으로 전환해 수사에 착수했다. 해양범죄수사대는 신 씨가 제출한 증거자료와 앞서의 ‘추격전’ 등 도움을 받는 한편, 추가 증거를 확보해 범행에 가담한 회사 관계자들을 검거했다. 이 과정에서 해상벙커C유 공급을 묵인하고 리베이트를 받은 아파트 관리사무소 유류 담당자들과 공장 직원 등 38명이 추가로 입건됐다.
당시 경찰에 검거된 회사 관계자들은 재판에 넘겨졌고, 최근 실형이 선고됐다. 사장의 경우, 경찰 수사가 시작된 시점에 도주했다가 전북경찰청에 자수한 탓에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이다.
# 씁쓸한 사건 뒷이야기
사건의 뒷맛은 여전히 씁쓸하다. 회사 거래처에 2012년부터 해상벙커C유를 거래한 정황이 남아있음에도 경찰 수사는 2014년도 거래부터 적용됐기 때문이다. 검찰 수사지휘가 그 시점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내려졌다는 이유였다. 신 씨는 “2013년 한 공장이 회사에서 공급한 해상벙커C유를 사용하다 보일러가 망가져 항의하는 바람에 거래도 끊기고 9000여 만 원을 배상한 적도 있다. 과거 거래 자료까지 모두 확인하면 부당이득금은 적발된 금액의 몇 배는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부산국세청 등에 따르면 회사 관계자들은 신 씨가 검찰과 세무서 조사가 중단된 이후 1년여 동안 대부분의 거래처에서 자금을 모두 회수해 은닉했다. 국세청은 회사에 차압을 거는 등 조치를 취했지만, 부당이득금 환수는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내부고발자 신인술 씨. 2년여 간 공익제보자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최근에서야 국민권익위로부터 인정받았다. 신 씨의 손목에는 권익위가 경찰에 요청한 긴급신변보호조치의 후속 조치로, 버튼만 누르면 경찰과 연결되는 긴급호출기가 착용돼 있다.
신 씨의 경우, 2년여간 공익제보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경찰 수사 결과 발표 과정에서도 신 씨의 제보나 수사 협조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국민권익위는 지난 4월에야 정식으로 신 씨를 공익제보자로 인정했고, 공익신고자보호법 제13조 등에 따라 경찰로부터 긴급신변보호조치를 받고 있다. 신 씨는 최근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너무 힘든 일들을 많이 겪었다.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알리는 데 이렇게 큰 대가가 따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공익제보자들이 제대로 보호받을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
“내부고발자 보호” 문재인 정부 역점 둔다 그동안 내부고발, 공익제보자들에 대한 보호 조치는 그동안 꾸준히 논의돼 왔다. 앞서의 신 씨와 같이 신변에 위협을 느끼는 경우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히며 이 과정에서 일명 ‘책상 빼기’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부당한 해고 조치가 내려져 생계 유지에 어려움을 겪는 제보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는 공익제보를 망설이는 이유가 되기도 하면서 제보자들의 보호 조치가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공익신고자 보호를 강화하기로 했다. 문 대통령의 10대 공약 가운데 하나는 반부패 및 재벌개혁인데,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안은 국가청렴위원회 설치, 부정청탁 규제 강화, 공익신고자 보호 강화, 뇌물과 알선수재 같은 중대 부패 범죄의 양형 강화 추진 등이다. 이 방안들은 최근 구성된 새 정부의 반부패비서관실에서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앞서 선거 캠프에 공익제보지원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을 추가로 위촉하기도 했다. 특히 공익제보위원회의 위원은 대부분 공익제보자들로 구성돼 있다. 최근 현대차 대규모 리콜의 발단이 된 세타2엔진 등 결함을 제보한 김광호 현대차 부장부터,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과 관련, K스포츠재단에 대해 증언한 박헌영 부장, 앞서의 신인술 씨, 조주형 씨(예비역 공군대령, 국방비리 F-X사업 외압제보), 이종헌 씨(동부팜 한농 산재은폐 제보) 등이 포함돼 있다. 지난 2009년 가을 해군 정복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서서 군납비리를 고발했던 김영수 전 소령은 공익제보위원회 위원 겸 실무팀장을 맡고 있다. 김영수 실무팀장은 “정의는 정의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갖고 정의를 실천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정의를 위한 용기 있는 행동에 대해 국가는 그들을 보호하고 지원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라고 말했다. 한편, 공익제보자들과 전문 변호인단으로 구성된 공익제보지원위원회는 ‘내부 공익제보자 보호·지원강화를 위한 법과 제도를 마련하고, 독립적인 반부패청렴기관(청렴위원회) 신설과 공익제보자 지원을 위한 공익재단 설립을 추진할 예정이다. [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