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었던 교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털어놓은 딸 앞에서 부모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경기도 여주의 A 고교 전교생 455명 가운데 여학생은 210명, 그중에서도 3분의 1에 해당하는 72명이 심각한 성추행 피해를 호소했다. 학생들이 지목한 범인은 이 학교의 김 아무개 교사(52)와 한 아무개 교사(42)였다.
김 교사는 체육교사이자 교내 인권담당 생활안전부장이었으며, 한 교사는 지난 2015년부터 3학년 담임을 맡고 있었다. 학생들이 가장 믿고 따를 수밖에 없는 지위는 학생들을 유린하는 데 쓰였다. 여학생의 신체부위를 만지거나 “안마를 해 달라”며 자신의 엉덩이를 만지도록 강요하는 등 김 교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학생은 31명, 한 교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학생은 55명에 달했다. 두 교사 모두에게 피해를 입은 학생들도 14명으로 알려졌다.
피해 학생들은 이전부터 학교 측에 피해를 호소했지만, 이를 전해들은 다른 교사는 “(선생님들이) 너희를 예뻐해서 그런 것” “나중에 또 그러면 그때 가서 신고해라”라며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학생들이 스스로 터뜨리기 전까지 상처가 곪을 대로 곪을 수밖에 없었다.
전북 부안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해 지역 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학부모들이 경찰과 교육지원청에 지난 6월 1일 직접 수사를 요청하고,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이 SNS에서 피해 사례를 취합해 공개하면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부안여고에서 50대 체육교사가 10여 년에 걸쳐 40명 이상의 학생들을 강제추행했다는 내용이었다.
부안여중·여고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피해 사례를 취합해 사건을 공론화했다. 사진=다음 아고라 캡처
이 체육교사는 학생들을 뒤에서 껴안아 신체부위를 밀착시키거나 손을 잡는 등 성추행을 일삼아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학생에게 “사귀자”라며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밸런타인데이나 생일 선물을 요구하면서 들어주지 않을 경우 수행평가 점수로 협박을 일삼았다는 증언도 나왔다.
이 학교에서 문제가 된 것은 체육교사뿐만이 아니었다. 적어도 2~3명의 교사가 학생 강제추행·성희롱 혐의를 받고 있고, 이를 묵인하거나 학생들을 상대로 정서적 학대를 벌인 교사들도 10여 명에 달한다는 것이 피해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의 주장이다. 이미 교사들 사이에서도 학생들의 피해를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으면서도 이를 막기는커녕 동조했다는 말이 된다. 학생들이 10년 넘도록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서 기인한다.
특히 부안의 사례는 사립학교이기 때문에 피해 학생들의 불안감이 더욱 높을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이 따른다. 사립학교 교원들에 대한 교육청의 징계 권고는 강제성이 없어 재단의 재량으로 사건이 무마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SNS를 뜨겁게 달궜던 ‘서울 S 여중·S 여고 교사 성추행 사건’의 주인공(?)이었던 가해 교직원들은 대중들의 관심이 수그러들자 무더기로 징계를 감면받았다.
지난해 12월 SNS를 뜨겁게 달궜던 ‘S 여중·여고 교사 성추행·희롱 공론화’ 계정.
심지어 중징계가 예고됐던 S 여중 교장은 학생들이 SNS로 피해 사례를 올린 것에 대해 “학교의 명예를 훼손한다면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엄포를 놓은 것으로도 알려졌다. 그럼에도 가장 가벼운 징계인 경고에 그친 것이다. 교육청의 징계 요구가 강제성을 띠지 못하는 사립학교법 때문이다. 교육청이 학생들의 피해수준에 맞는 징계를 요구하더라도 재단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강제할 수 없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딸을 둔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학교도 못 믿고 교육청도 못 믿는다. 사건이 발생하면 즉시 경찰부터 불러라”는 얘기가 돌고 있다. 학교나 교육청의 자체 조사 또는 감사에만 의존했던 기존과는 달리, 먼저 구체적인 피해 사실들을 확보해서 철저하게 법적으로 접근해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겠다”는 이야기다.
충남의 한 사립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자녀를 둔 학부모는 “사립학교는 교육청 눈치를 전혀 보질 않으니 백날 (교육청에) 신고를 해 봐야 오히려 내 자식이 불이익을 당한다. 그러다 보니 피해를 본 아이들에게 ‘3년만 참으라’며 인내를 강요해 더 큰 상처를 주지 않았나”라며 “그럴 바에야 교육청이나 학교 측에만 맡기지 말고 경찰이나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먼저 선수를 쳐야 된다는 게 요즘 학부모들 사이에서 나오는 이야기”라고 귀띔했다.
학부모들이 “학교도 교육청도 믿지 못하겠다”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데는 최근 일련의 사태에서 양 기관들이 보여준 태도가 한몫하고 있다. 지난 3일에는 경남 창원의 한 여고에서 40대 남자 교사가 야간자율학습이 시작된 2학년 교실에 ‘몰카’를 설치했다가 학생들에게 들킨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학생과 학부모들이 항의하면서 경남도교육청이 사태 파악에 나섰는데, 이 과정에서 학교 측이 내부적으로 사건을 은폐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학교 측은 문제의 교사가 “수업 분석을 위해 카메라를 구입했고, 카메라 테스트 차원에서 설치했던 것”이라는 해명을 받아들여 이를 교사의 ‘순수한 교육적 의도’라고 판단했다. 학교 측에서 자체적으로 교육적 의도로 판단한 만큼 상급기관인 도교육청에 보고도 이뤄지지 않았다. 경남도교육청은 약 1개월 반이 지난 시점에서야 피해 학생들이 신문고에 올린 민원을 보고 뒤늦게 감사에 착수했다.
4일 알려진 ‘부산 교사 성추행 사건’ 역시 학교 측이 학생들의 피해 사실을 확인하고도 경찰이나 교육청에 보고하지 않아 논란을 더욱 키웠다. 피해 학생들만 21명, 성추행·희롱에 가담한 교사들은 4명이나 되는데도 학교 측은 쉬쉬하기에 바빴다. 결국 경찰이 직접 가해 교사들에 대한 수사에 나섰다
한 지역 교육청 중등교육과 관계자는 “분기별로 교육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철저한 성교육을 진행하고 성 관련 사건 발생 시 반드시 관할 교육청에 보고할 것을 강조한다”면서도 “그러나 학교 측에서 내부적으로 사건을 은폐하거나 자체 종결한다면 피해 학생이나 학부모가 교육청에 직접 알리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31일 교육부는 “성 비위 교원에 대해서는 ‘무관용 원칙(원 스트라이크 아웃제)’에 따라 일벌백계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교육부의 강경한 발언과는 달리 학생들을 대상으로 발생하는 교사의 성범죄는 매년 국정감사의 단골 소재가 될 만큼 고질병으로 남아있다.
실제로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밝혀진 ‘최근 3년간 초중고 교원 성 비위 징계 현황’에 따르면 전국 258명의 교직원이 성범죄 등에 따라 징계를 받았다. 이 가운데 43%에 해당하는 111명의 교직원들은 견책, 감봉 등의 가벼운 징계를 받고 여전히 교직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앞서의 교육청 관계자는 “지난해와 올해 교육부의 ‘성 비위 징계 강화’에 따라 교직원들의 성범죄 연루에 대해 강력한 대응에 나서고 있지만 비리 교원들의 가벼운 징계 후 교직 원상 복귀는 매년 대두되는 문제”라고 지적하며 “이런 현실 때문에 피해 학생과 학부모들이 피해 사실을 공론화도 하지 못한 채 속만 썩이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공·사립 구분을 떠나 강경한 대책이 세워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지적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