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토교통부 사실조회로 엄궁동 2인조가 벌인 현직 경찰관 강도 사건이 조작됐다는 사실이 일부 확인됐다.
수사기록을 보면, 현직 경찰관 강도 사건은 엄궁동 2인조가 1991년 11월 경찰에 구속되기 2년 전인 1989년 12월 발생했다(관련기사 [엄궁동 2인조 살인사건⑩] ‘현직 경찰 강도사건’ 재연해보니…‘거짓 진술 가능성’). 부산 사하경찰서 경찰관들은 엄궁동 2인조 구속 이틀 뒤, 당시 부산 중부 경찰서 소속 한 아무개 순경에게 두 남자를 데려갔다. 이 자리에서 한 순경은 “이놈들이 범인이 맞다”고 주장했다.
한 순경이 당했다는 강도 사건은 엄궁동 2인조가 유죄가 확정된 3가지 사건 중 핵심 사건이다. 이 사건은 엄궁동 2인조가 최초 경찰 조사를 받게 된 ‘공무원 자격사칭 사건’과 당시 미제 사건으로 남았던 ‘엄궁동 부녀자 강간·살인 사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사건 기록을 종합하면, 당시 엄궁동 2인조 사건을 수사한 부산 사하 경찰서 경찰관들은 두 남자의 범행을 아래와 같은 취지로 정리했다. “두 남자는 그동안 공무원자격사칭을 하며 카데이트 등을 하는 남성과 여성을 상대로 강도 범행을 저질러 왔고, 이 과정에서 살인범행을 저질렀다.” 엄궁동 2인조가 ‘오랜 기간’ 동일한 범행 수법으로 강도를 벌여왔는데, 그 근거가 되는 사건이 두 남자가 구속되기 2년 전 발생한 현직 경찰관 강도 사건이라는 얘기다.
이 사건은 물적 증거가 단 하나도 없다. 강도 피해를 주장한 앞서의 한 순경의 경찰 진술과 법정 증언, 엄궁동 2인조의 ‘자백’만으로 유죄가 확정됐다.
문제는 한 순경의 진술에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는 점이다. 그는 강도 사건 발생 2년이 지난 뒤에도 “엄궁동 2인조가 범인이 맞다”고 지목했으며, 당시 사건 정황을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하지만 그는 강도 범행 발생 직후부터 엄궁동 2인조가 구속되기 전까지 피해자이면서도 신고를 하거나 별도의 수사를 벌이지 않았다. 또한 당시 엄궁동 2인조 사건을 맡은 부산 사하경찰서 조사 과정에서도 강도를 당한 날짜도 기억하지 못했고, 범행 당시 함께 데이트를 하다가 피해를 당했다는 여성과도 연락이 닿지 않는 다는 등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거나 추상적으로 진술했다.
현재 엄궁동 2인조 사건 재심을 청구, 법원의 재심 개시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박준영 변호사는 앞서의 한 순경의 진술이 대부분 사실과 다르며 ‘실제로 발생하지 않은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차종과 소유주, 모두 달랐다
최근 박 변호사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나왔다. 박 변호사가 지난 11월 7일 부산지방법원에 재심을 위해 ‘새로운 증거’로 제출한 국토교통부 공식 문서다. 이 문서와 엄궁동 2인조 사건 판결문, 사건 기록 등을 비교하면, 한 순경은 경찰 조사, 법정 등에서 ‘거짓말’을 했고 당시 엄궁동 2인조 사건 수사를 했던 부산 사하경찰서 경찰관들은 수사보고서를 ‘조작’했다.
수사 기록을 보면, 한 순경은 엄궁동 2인조 사건을 수사 과정에서 자신이 강도 피해를 당하는 과정에서 타고 있었던 차량과 관련해 차종과 차량번호를 진술했다. 당시 수사 경찰은 이 진술을 근거로 기록을 남겨 검찰에 넘겼다.
엄궁동 2인조 사건 기록에는 현직 경찰관 강도 사건 발생 당시 차량은 ‘르망’이며 차량 번호가 명시돼있다.
한 순경이 타고 있었던 차량은 지금은 단종 된 ‘대우 르망’이다. 수사 기록엔 차량번호 ‘부산O가 OOOO’가 명시돼 있다. 하지만 박 변호사가 차량번호를 토대로 국토교통부에 사실조회를 신청한 결과, 이 차량은 ‘르망’이 아닌 ‘현대 스텔라’였다. 차종이 전혀 다르다.
한 순경은 또 경찰 조사 과정에서 차량 주인에 대해 “사건 발생 당시 함께 데이트를 하고 있었던 여성 김OO 씨의 소유”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앞서의 국토부 사실조회 문건을 보면, 1983년부터 1994년 사이 차량을 소유했던 차주 3명 가운데 여성의 이름과 일치하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이번 국토부 문건은 앞서 일요신문이 보도한 ‘트렁크 탈출 재연 실험’과 함께 한 순경과 당시 수사 경찰의 조작 사실을 뒷받침한다.
국토부 사실조회 결과, 차종은 르망이 아닌 현대 스텔라였으며, 차량 소유주도 한 순경의 진술과 달랐다.
엄궁동 2인조 사건 재심청구서는 지난 5월 8일 부산지방법원에 접수됐다. 6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박 변호사는 23차례 재심사유보충서를 법원에 제출하며 새로운 증거를 제시해오고 있지만, 재심 개시 결정은 아직까지 내려지지 않고 있다.
박 변호사는 최근 앞서의 국토부 사실조회 문서를 제출하면서 법원에 재심 개시를 위한 심문 기일을 지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심문 기일이 지정되면 검찰은 재심청구에 대한 의견을 밝히고, 재심을 위해 새롭게 제출된 증거에 대한 인부의견을 밝힌다. 법원의 재심 개시 결정은 그 이후에 내려진다.
박 변호사는 “검찰은 최근 과거 시국사건에 연루됐던 18명에 대해 검사 직권으로 재심을 청구하기로 했다”며 “피해자가 아닌 검찰이 스스로 과거 수사와 기소가 잘못됐다고 인정하면서 무죄를 구형하기 위해 재심을 청구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재심청구 뿐만 아니라 피해자 측의 재심청구에 대한 의견도 과거 수사와 기소에 잘못이 있다고 인정되면 전향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사건을 조작하고 두 남자를 잔인하게 고문한 사건이다. 21년 이상 억울한 옥살이를 했고, 당사자들의 삶이 파괴됐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피해도 크다”며 “전향적인 의견으로 이들을 위로해야 한다. 하루빨리 재심을 열어 사건의 실체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