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
1월 9일 열린 문재인 정부 첫 남북 고위급회담에선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남북군사당국회담 개최, 한반도 문제 당사자 해결 등이 합의됐다. 핵문제라는 난관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동안 얼어붙었던 남북 대화의 물꼬를 텄다는 데서 이번 회담의 의의는 적지 않다는 평이다.
이를 지켜본 한 친박 의원은 “박 전 대통령이 탄핵만 당하지 않았어도 지난해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을 것”이라고 했다.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맞다. 일부 핵심 친박 인사들이 준비를 했었다. 한 전직 의원이 여러 차례 해외를 나가 북측과 만났던 것으로 안다”고 답했다.
사실 박근혜 정부는 2015년에도 정상회담을 추진한 적이 있었다. 당시 박 전 대통령 밀명을 받은 한 친박 전직 의원이 싱가포르에서 김양건 전 통일전선부장 측과 접촉해 일정을 조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김양건이 2015년 12월 의문의 교통사고로 갑자기 숨졌고, 그 이후 북이 2016년 1월 4차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이러한 논의는 중단됐다.
그 이후 남북 관계는 수평선을 달렸다. 2014년 1월 신년사에서 ‘통일은 대박’이라며 구체적인 통일기반을 마련하겠다고 했던 박 전 대통령은 2016년 신년사에선 “대화의 문을 열어놓겠다”라며 소극적 표현만 썼다. 박 전 대통령은 2016년 2월 개성공단을 폐쇄했을 정도로 강경 스탠스를 보였다.
그런데 2016년 11월경 친박 내부에서 흥미로운 움직임이 포착됐다. 앞서 2015년 정상회담을 추진했던 친박 전직 의원이 또 다시 해외에서 북측과 은밀히 접촉했다는 게 골자다. 그 전직 의원은 김양건의 후임인 김영철 통일전선부장 최측근과 만났다고 한다.
북한 내 대남총책이자 강경파로 알려진 김영철 부장은 김정은 정권 실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이번 1월 9일 북측 대표단을 이끌고 온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은 김영철의 심복이기도 하다. 그만큼 김영철이 북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이는 박근혜 정부가 상당한 의지를 갖고 정상회담을 추진했었다는 것으로도 이해된다.
그 전직 의원 측근은 “2015년에 정상회담이 성사될 뻔했는데 김양건이 죽으면서 핫라인이 없어졌다”고 귀띔하면서 “2016년엔 김양건 후임인 김영철 쪽과 줄을 대는 데 공을 들였고, 싱가포르에서 김영철이 보낸 사람과 실제 만났다. 2017년 초에 박 전 대통령과 김정은이 회동하는 문제를 놓고 구체적 얘기가 오갔다”라고 전했다. 이 전직 의원은 3차례가량 싱가포르와 중국 등을 방문해 김영철 측과 접촉을 했다고 한다.
정보당국의 한 고위 인사도 “공식 루트로 이뤄지진 않은 것으로 안다. 박 전 대통령 측에서 갑자기 추진했고, 일부 친박 인사가 주도했다. 비선에서 움직였다는 얘기다. 처음엔 북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막판에 결렬이 됐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북에서 과한 요구를 한다는 얘기가 돌았다”라고 귀띔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한 언론사가 남북 간 접촉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 취재에도 나서기도 했다. 이 언론사의 유력 관계자는 “2016년 연말쯤 박근혜 특사가 김영철 쪽과 만나 정상회담에 대한 얘기를 나눈다는 내용을 북한 내 취재원으로부터 제보 받았다. 박 전 대통령 탄핵 얘기가 한창 나오던 때였다. 취재 결과, 회담을 위한 논의가 결국 무산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전했다.
회담이 성사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앞서의 친박 전직 의원 측근은 “북이 갑자기 입장을 바꿨다. 정확한 속사정은 모른다. 다만, 북이 우리 쪽 VIP(박 전 대통령)가 탄핵 당할 위기에 있는 상황을 우려했다고 한다. 실제 정상회담이 개최될 수 있을지에 대해 불안해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정상회담을 위한 남북 접촉이 수포로 돌아간 후 김정은 위원장은 2017년 신년사를 통해 박 전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2016년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를 언급하며 “보수당국에 대한 쌓이고 쌓인 원한과 분노의 폭발”이라면서 “박근혜와 같은 반통일사대매국세력의 준동을 분쇄하기 위한 전민족적 투쟁을 힘 있게 벌려야 한다”고 했다.
박 전 대통령 측이 정상회담을 추진했었다는 것에 대해 논란이 예상되는 이유는 그 시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불거진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북한을 끌어들이려 했다는 의혹이 뒤를 이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정상회담을 기획했던 것도 박 전 대통령의 ‘복심’으로 통하는 한 친박 의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친박 의원은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이러한 내용을 들은 또 다른 친박 의원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출구전략 차원에서 정상회담 아이디어가 나왔던 것은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가동됐었는지는 몰랐다”고 했다. 그는 “정상회담이 열리면 적어도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뒤로 늦춰졌을 것이다. 그러면 탄핵 재판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부분이다. 친박 진영에선 이런 얘기들이 종종 나오곤 했었다”라고 덧붙였다. 박 전 대통령 측의 정상회담 추진 의도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의 한 친문 의원은 “탄핵을 당할 위기에 빠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추진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 만약 정상회담이 열렸다면 어찌됐겠느냐. 국제적인 망신이 될 뻔했다”면서 “국회 차원에서 당시의 일에 대해 진상 조사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라고 꼬집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