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원 전경.
[일요신문] 유명 프로기사이자 방송 해설자, 한국바둑리그 감독, 한국기원 홍보이사 등 바둑계 다양한 분야에서 맹렬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K 9단이 동료 외국인 여자기사를 성폭행한 의혹에 휩싸여 충격을 주고 있다.
16일 (재)한국기원 내 프로기사 게시판에 ‘#Me too ㅠㅠ’이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글이 올라왔다.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외국인 여자 프로기사인 그는 이 글에서 “지난 9년 동안 어떻게든 잊으려고 했던 시간인데 역시 잊히지가 않는다. 바둑TV에서 그 사람 목소리가 나오면 채널을 돌린다. 학생들이 바둑TV를 꼭 보려고 하면 소리라도 없애달라고 말했었다”며 괴로운 시간들을 회상했다.
그는 “9년 전 그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가 변을 당했다. 그 일이 있기 2주 전 외국인 친구 12명이 초대를 받아 같이 어울린 적이 있었기 때문에 설마… 하는 마음으로 초대에 응했었다. 하지만 같이 오기로 한 친구가 사정상 오지 못하게 됐고 결국 그날 밤 술에 취한 상태에서 그 일이 벌어졌다”고 말하면서 “그때의 일을 구체적으로 적은 이 내용은 당시 친오빠에게 보냈던 메일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그 후에도 그는 술에 취한 채 집 앞에 찾아와 전화를 했고, 나는 너무 무서워 살고 있는 오피스텔 방문을 몇 번이나 잠갔는지 확인하며 두려운 시간을 보냈다”고 털어놨다.
그는 또 “9년 전의 잊고 싶은 기억을 다시 꺼내 쓴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짐작할 것이다. 죽을 때까지 숨겨두고 꺼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평소 한국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얘기를 자주 한다고 친구들이 말했었다. 그 일이 나의 성격, 사람을 대하는 자세 등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내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이제야 내가 그동안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가 된다고 했다. 마음속에 숨겨둔 상처가 사람들에 대한 불만으로 나타나고 있는 거였다. 9년간 혼자만의 고통을 감내하는 동안 ○○○(K 9단)은 바둑계 모든 일을 맡으며 종횡무진했다. 방송, 한국바둑리그 감독에 한국기원 법인카드까지 쓰는 힘 있는 위치의 그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힘이 없는 존재인지 실감했다. 나는 9년 동안 그를 피해 다녔는데 그 사람은 나에게 요즘도 웃으며 인사한다. 그 사람의 행동이나 말을 보면 그날의 일 때문에 내가 얼마나 무섭고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는 것 같다. 이 글을 보고 내 마음이 어땠는지 느꼈으면 한다. 그리고 오늘 나의 아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알려주고 싶었고, 어느 누구도 나와 같은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라고 글을 맺었다.
글이 게시판에 올라오자 다수의 동료 여자기사들은 댓글을 통해 “읽는 내내 소름이 돋고 너무 끔찍했다. 용기를 내줘서 고맙다” “이 사실을 아는 모든 사람이 가해자를 바둑계에서 다시 마주치는 2차 피해가 없길 간절히 바란다” “이번 사건은 반드시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한다”며 함께 분노했다.
또 다른 기사들은 “해당 프로기사에 대한 정당한 징계도 이뤄져야겠지만 이런 기사를 한국기원 홍보이사로 임명한 한국기원 집행부에도 책임이 있다”, “진정성 없는 사과문과 보여주기식 성희롱예방교육 등 고일 대로 고여 썩은 내가 진동하는 곳이 한국기원”이라며 현 집행부를 성토했다.
익명을 원한 한 여자기사는 “최근 여자 프로기사들과 연구생들의 바둑계 미투가 폭로되고 있음에도 한국기원 집행부는 모르는 척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어 더 분통이 터진다. 지금 피해자들이 원하는 것은 도를 넘은 잇따른 성범죄에 대한 적극적인 처벌과 재발 방지를 위한 바둑계 전체의 노력이다. 그러기 위해선 한국기원 차원의 적극적인 사태파악과 피해사례 수집 등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기원은 오히려 외부로 알려질까 두려워 쉬쉬하는 등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고 있다. 사무총장 본인이 최근 자신의 성차별 발언으로 공개사과 했음에도 아직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것 같다”고 질타했다.
한편 (재)한국기원(총재 홍석현)은 지난주 ‘바둑계 미투 확산…여자 프로기사들 우리도 당했다’는 일요신문의 기사에, 진상파악과 후속조치는커녕 보도한 기자에게 오히려 홍보실 보도자료를 배포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으로 드러나 빈축을 사고 있다.
기자는 K 9단의 해명을 듣고자 연락을 시도했으나, 닿지 않았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