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호 전 국정원장이 작성한 진정서
이 전 원장은 진정서를 통해 건강악화를 호소했다. 이 전 원장은 “지난 6개월간 체중이 8kg 빠졌다. 이곳 의무실을 방문해 어지러움증을 호소했지만 당뇨, 고혈압 증세에는 그런 증상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해서 생활하라는 조언만 들었다. 의무실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게 됐다”고 적었다.
이 전 원장은 또 “문제의 청와대 자금 지원은 부임 전 이미 2년 동안 지속되어 온 정례적 지원으로 담당직원인 기조실장에게 맡겨서 지원토록 했고,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다음은 이 전 원장이 작성한 자필 진정서 전문이다.
진정서
피고인(전 국정원장) 이병호입니다. 보석 심리에 참고 하시도록 진정서로 제출합니다. 저는 곧 한국나이로 80세가 됩니다. 80세 노인의 구치소 생활은 고통 그 자체입니다. 이곳에서는 식사 배식 등을 위해 하루에 수십 번씩 앉았다, 일어났다 해야 합니다. 80세의 경직된 몸으로, 무릎도 아픈 상태에서 이런 생활 자체가 고통입니다.
저는 하루에 12알의 약을 복용해야 하는 지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역류성 식도염, 전립선 비대증) 건강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이고, 건강을 돌보아야 하는데 이곳에서는 건강을 지켜내기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지난 6개월간 체중이 8kg 빠졌고, 몸이 쇠약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곳 의무실을 방문해서 어지러움증을 호소한 바 있었습니다. 당뇨, 고혈압 증세에는 그런 증상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해서 생활하라는 조언만 들었습니다. 이 경험으로 이곳 의무실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큰 고통의 요인은 억울함입니다. 이 때문에 매일 신경안정제를 복용해야 겨우 잠들 수 있습니다. 점점 더 우울함과 무기력증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폐인이 될까봐 걱정하고 있습니다.
내가 왜 구치소에서 신음하며 폐인 될 위기를 느껴야 하는가? 돈을 착복했는가? 개인의 이익을 위해 돈을 횡령했거나 권력을 남용했는가? 끊임없이 자문하고 있습니다. 억울함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저는 75세의 늦은 나이에 2015년 2월 어느 날 갑자기 6시간 만에 국정원장으로 발탁되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는 특별한 정치적 인연이 없습니다.
대선 캠프에 참여한 바도 없습니다. 제가 발탁된 배경은 국정원 해외분야에서 오래 근무한 정보전문성 때문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원장 재직기간 중 하루도 쉴 날이 없었던 격무에 시달렸고, 문제의 청와대 자금 지원은 부임 전 이미 2년 동안 지속되어 온 정례적 지원으로 담당직원인 기조실장에게 맡겨서 지원토록 했고, 관심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지원이 제가 감옥에 갇히는 횡령범죄가 되었습니다.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을 일이 갑자기 닥친 것입니다. 재판 과정을 통해 제가 범죄자라는 복잡한 법리가 동원되었습니다. 지금도 납득되지 않습니다. 박근혜 정부 하에서 국정원장을 했기 때문에 유죄로 해야겠다는 결론도 내놓고 과도한 법리를 동원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법이 억울한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기 위해 작용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청와대 자금지원이(대통령 지시) 국정원장 개인의 횡령범죄라니 건전한 양식으로는 납득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국정원 자금의 청와대 활용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닙니다. 지난 반세기 넘게 역대 정부 모두 형태는 다르지만, 정실 예산을 활용해왔습니다. 이는 관계자들은 모두 주지하고 있는 공지의 사실입니다. 그간 이 문제에 대한 법적 문제 제기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역대 정보기관장 중에는 법무장관 출신 등 다수의 법조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박근혜 전 대통령도 그런 줄 알고 자신의 진술서에서 위법인식이 없이 자금지원을 요청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국정원장들도 마찬가지로 위법인식 없이 대통령의 지시를 따랐던 것입니다.
국정원 자금의 청와대 지원은 국가예산의 방만한 운영이라는 비판적 시각이 대두될 수 있는 사안일 것입니다. 정치적 스캔들로 인식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스캔들과 형사범죄는 다른 차원의 사안일 것입니다. 이 사안이 기본적으로 오랫동안 우리의 국정도영 메카니즘에 내재되어 왔던 제도적, 관행적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잘못된 관행의 문제해결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대통령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적폐청산의 명분으로 국정원장 3명에게 모든 책임을 물어 감옥에 보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기본적으로 부당하다고 느끼고 억울해 하는 것입니다.
최대권 서울대 명예교수(헌법학)는 문화일보(18.10.16일자)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형사처벌에서는 ‘엄격해석’과 ‘합리적 의심’도 불가능한 증거가 요구된다. ‘유추해석’이나 반대의견이 가능한 증거도 안 된다.”
저는 법률전문가는 아닙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상식과 양식을 지녔다고 생각합니다. 상기한 대원칙이 원심과 항소심 재판과정에서 외면되고 무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인신구속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의 삶을 파괴하는 지극히 가혹하고 엄중한 법적행위일 것입니다. 그래서 상기원칙이 한 점 의혹 없이 철저히 이행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구치소에서 저는 이 원칙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원심과 항소심은 모두 유죄의 결론을 내려놓고 이에 맞지 않는 증언과 증거는 애써 외면했다고 생각합니다. 실체적 진실의 추구와 이에 따른 법리의 철저한 검토가 외면되고, 결과적으로 무고한 사람을 인신 구속시켜 인생을 파괴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최고 법원인 대법원이 이러한 법적 무리를 바로 잡아주시기를 기대하고 바랄 뿐입니다. 이 사건은 보통의 형사사건이 아닙니다. 대통령과 국정원장이 연유되어 있고, 정보예산의 청와대 지원이라는 민감한 기밀이 관계되어 있는 우리나라 역사상 초유의 사건일 것입니다. 이 중대한 사건의 심리과정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80세 고령이고, 몸이 쇠약해지고 있으며 우울증 초기 증세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제 처지를 연민의 마음으로 헤아려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보석 상태에서 건강을 돌보면서 대법원의 심리를 받는 배려를 호소합니다. 어려운 점이 있으시더라도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사안이니 따뜻한 인간적 연민이 실현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호소합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