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배구대표팀 김호철 전임감독. 사진=연합뉴스
[일요신문] 김호철(64) 배구대표팀 감독의 ‘이중 플레이’로 배구계가 발칵 뒤집혔다. 2018년 3월 대표팀 전임 감독으로 선임돼 2022년 광저우아시안게임까지 임기가 정해져 있는 그가 돌연 프로배구팀 OK저축은행 사령탑을 맡기로 한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배구협회는 김 감독과 전임감독 계약을 맺을 때 대표팀 전임 감독 재임 기간에는 프로팀 감독을 맡지 않겠다는 ‘이적 금지 조항’을 포함시켰고, 김 감독은 사인을 했다. 그러나 김 감독 스스로 이를 어기고 프로팀 감독에 욕심을 낸 것은 물론 김 감독이 먼저 OK저축은행 고위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감독직을 맡고 싶다”고 제안한 내용이 밝혀지면서 거센 파문이 일었다.
김 감독은 이후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모든 걸 ‘없던 일’로 하고 대표팀에만 전념하겠다고 말했지만 김 감독의 거짓말에 여론이 들끓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배구인들은 이런 김 감독의 행동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익명을 요구한 3명의 전·현직 배구 감독과의 인터뷰를 통해 김 감독 사태를 짚어 봤다.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이전에도 LIG손해보험과 감독직 협상을 마무리 지었는데 현대캐피탈의 만류로 협상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들었다. 당시 LIG 관계자들이 크게 분노했었다.”
프로 배구팀 감독을 맡았던 A 씨는 김호철 감독의 ‘이중 플레이’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꼬집었다.
2010년 4월, 배구계에서는 당시 현대캐피탈을 이끌던 김호철 감독이 LIG손해보험 사령탑에 내정됐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4시즌 연속 포스트시즌에 실패했던 LIG손보는 성적 부진으로 중도 하차한 박기원 감독을 대신해 수석코치였던 김상우가 감독대행을 맡고 있는 중이었다. LIG손보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는 김호철 감독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김 감독은 삼성화재와의 챔피언결정전 패배 후 “개인적으로 변화를 꾀해야 할 것 같다. 지난 시즌을 뒤돌아보며 정리하겠다”는 말로 거취에 변화가 있음을 암시하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러나 김 감독은 현대캐피탈 정태영 구단주의 만류로 LIG손보가 아닌 기존 팀에 잔류했다. 당시 김 감독은 자신의 이런 행동과 관련해 “LIG손해보험에 가기로 했었는데 못 가게 돼 죄송하고 미안하다”면서 “내 영입문제로 인해 LIG손해보험 관계자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사과했다.
김 감독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LIG손보는 당장 새로운 감독을 구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구단은 김 감독 영입을 위해 팀에서 내보냈던 김상우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고, 김상우는 이후 LIG손보 정식 감독으로 선임됐다.
A 씨는 “그때도 배구계에서는 김호철 감독의 결정을 두고 말들이 많았다”면서 “계약서에 사인만 안했을 뿐 모든 합의를 다 마친 상태에서 LIG손보와의 약속을 어긴 행동은 오랫동안 비난의 대상이 됐다”고 설명했다.
김호철 감독을 잘 알고 있는 배구인 B 씨는 김 감독이 대표팀을 맡다 프로팀 감독을 맡으려 한 행동은 이해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의 거짓말이라는 것.
“난 김호철 감독이 너무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한다. 1억 원을 받는 대표팀 감독 연봉 대신 3, 4억 원을 제시하는 프로팀 연봉은 분명 큰 유혹이 됐을 것이다. 김 감독이 OK저축은행을 선택했다면 위약금을 물고 그냥 가면 된다. 어차피 욕먹을 각오를 하고 감행하는 거니까. 그런데 비난 여론이 들끓자 OK저축은행 감독직을 고사하고 대표팀 잔류를 선택했다. 더욱이 김 감독이 처음에는 OK저축은행 측으로부터 먼저 영입 제안을 받았다고 말했다가 나중에서야 김 감독이 먼저 OK저축은행 고위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팀을 맡고 싶다고 말한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나. 이 부분이 치명타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을 벌인 것이다. 위기를 모면하고자 감독이 거짓말을 했고, 이게 알려지면서 스스로 화를 자초했다. 신뢰가 생명인 지도자가 거짓말을 한 셈인데, 앞으로 어느 누가 김 감독의 말을 믿을 수 있겠나. 선수들도 더 이상 김 감독을 믿고 따르지 못하게 됐다. 김 감독은 잔류하겠다고 말했지만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 그래야 일이 해결된다.”
현 배구 감독인 C 씨는 김호철 감독이 최초의 전임 감독이라는 상징성을 쉽게 간과했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특히 배구협회와 김 감독이 계약을 맺을 때 2022년까지 기간을 정한 부분은 김 감독의 요구를 협회가 수용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대표팀 감독은 성적에 책임을 져야 한다. 만약 김 감독이 2020도쿄올림픽 예선전에서 본선 진출을 이루지 못한다면 책임지고 물러나야 하지만 김 감독은 협회와 계약할 때 무조건 2022년까지 계약 기간을 정해 달라고 우겼다. 그렇게 우긴 끝에 협회가 김 감독의 요구를 받아 들였고 계약서에 2022년까지로 명시한 건데 그런 사람이 그 계약 내용을 무시하고 OK저축은행에 먼저 손을 내밀었다는 게 말이 되나. 금세 들통 날 거짓말을 왜 했는지 모르겠다.”
2016년 박기원 감독이 대표팀을 이끌다 돌연 대한항공 사령탑에 오르면서 대표팀 감독이 공석을 빚은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배구인 B 씨는 “박 감독은 전임 감독제가 시행되기 전에 대표팀 감독을 맡은 터라 이번 일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당시에도 박 감독의 행보에 비난 여론이 형성됐지만 전임 감독이 아닌 상황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전직 감독이었던 A 씨는 김호철 감독의 행동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덧붙였다.
“아마 김 감독 입장에서는 OK저축은행 감독직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대표팀에서 4년의 임기를 채우고 나왔을 경우 프로팀을 맡게 되리라는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김세진 감독이 떠난 OK저축은행 자리가 욕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하지만 원래 OK저축은행은 김세진 감독이 떠난 이후 석진욱 수석코치에게 지휘봉을 넘기는 수순이었다. 김 감독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바람에 석 코치만 애매한 입장이 됐고 OK저축은행도 석 코치보다 감 감독에게 비중을 두면서 협상을 벌인 게 문제다. 즉 김 감독이 대표팀은 물론 OK저축은행도 흔들어 놓은 셈이다.”
A 씨는 OK저축은행의 일 처리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세진 감독 밑에서 오랫동안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석진욱 수석코치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안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석 코치는 구단에서 김 감독과 접촉한 사실을 알고 지인을 찾아가 서운한 마음을 토로했다는 후문이다. 석 코치를 만났던 지인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석 코치가 굉장히 힘들어했다”면서 “김 감독과 OK저축은행의 잘못된 만남으로 여러 사람이 바보가 됐다”고 격앙된 감정을 드러냈다.
김호철 감독이 대표팀에 전념하기로 하자 OK저축은행은 현재 석 코치에게 감독직을 맡기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석 코치는 구단의 사과와 설득에도 감독직 수락을 고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OK저축은행은 현재 석 코치 외에는 다른 대안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끝까지 석 코치를 설득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김호철 감독이 OK저축은행 감독으로 옮겨간다는 소문은 어떻게 세상에 알려졌을까. 배구협회의 한 관계자는 “김 감독이 OK저축은행과 모든 협의를 마친 후 최천식 경기력향상위원장에게 ‘내가 지금 대표팀 감독을 그만두면 어떻게 되느냐’라고 물어본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내용이 협회 관계자들의 귀에 들어가면서 기사로 나온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한편, 배구협회는 조만간 스포츠공정위원회를 열어 김호철 감독에 대한 징계 수위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