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회 청룡기 고교야구선수권대회’ 준우승을 차지한 강릉고 야구부. 그리고 최재호 감독. 사진=이동섭 기자
[일요신문] 패배는 아름답지 않다. 하지만 그 과정은 아름다울 수 있다. ‘제74회 청룡기 전국 고교야구선수권대회’ 준우승을 차지한 강릉고의 이야기다.
7월 16일 오후 6시 서울 목동야구장에선 청룡기 결승이 열렸다. 황금사자기 우승팀 유신고와 이번 대회 돌풍의 핵으로 떠오른 강릉고의 대결이었다. 승부는 일찌감치 갈렸다. 1회 4점을 낸 유신고는 경기 내내 강릉고를 몰아 붙였다. 유신고는 7대 0으로 강릉고를 제압했다. 청룡기 우승 트로피는 유신고의 품으로 돌아갔다.
강릉고 입장에선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배였다. 많은 동문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강릉고는 완벽히 패했다. 하지만 경기가 끝난 뒤 강릉고 응원석의 분위기는 ‘완패한 팀’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최재호! 최재호! 최재호!”
강릉고 응원단은 청룡기 준우승을 이끈 야구부 사령탑의 이름을 연호했다. ‘언더독’ 강릉고 돌풍의 과정, 그 자체를 치하하는 듯한 함성이었다. 최재호 감독은 멋쩍은 듯 모자를 벗고 응원단에 인사를 건넸다.
패장 최재호 감독을 향한 강릉고 응원단의 뜨거운 함성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야구 변방’ 강릉고의 신데렐라 스토리를 ‘일요신문’이 살펴봤다.
# 우승 청부사, 그리고 외인구단
7월 8일 목동야구장에서 만난 강릉고 최재호 감독. 사진=이동섭 기자
“서울에 있을 때나 ‘우승 청부사’지… 강원도에 가면 최재호 감독도 별수 없을 거다.”
2016년. 고교야구 ‘우승 청부사’ 최재호 감독은 야구 불모지에 새 둥지를 텄다. 바로 강릉고였다. 주변인들은 “야구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강릉에 왜 가려고 하느냐”며 최 감독을 만류했다.
최 감독은 고교야구에 잔뼈가 굵은 명장이다. 그가 전국대회에서 헹가래를 받은 것만 다섯 차례다. 한 번도 쉽지 않은 전국대회 우승을 다섯 차례나 일궈낸 것이다. 최 감독의 커리어는 많은 아마야구팀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했다. 최 감독을 향해 러브콜을 보낸 대학 야구팀도 있었다.
그런데도 최 감독이 강릉고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지방 고교 야구부의 저변 확대를 위해서였다.
“서울과 수도권 고교야구팀들만 강세를 보이면, 고교야구 저변 자체가 줄어드는 현상이 일어날 겁니다. ‘야구 불모지’라 불리는 강릉에서 지방 고교야구팀도 멋진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자신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의 감독 경험을 강릉고에 모두 쏟아부어 일을 한번 내보고 싶습니다. 그 마음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어요.” 최 감독의 말이다.
2016년 강릉고에 취임한 우승 청부사는 팀 체질 개선에 돌입했다. 가장 큰 장애물은 ‘인적 자원’의 부족이었다. 최 감독은 발품을 팔아가며, 선수 스카우트에 몰입했다. 서울 및 수도권에서 명문고 진학에 실패한 선수들이 타깃이었다. 최 감독은 ‘좋은 선수’보다 ‘잠재력 있는 선수’를 찾았다.
당시 최 감독 레이더망에 포착된 대표적인 유망주가 바로 2019시즌 강릉고 에이스로 활약 중인 2학년 좌완투수 김진욱이다. 수원북중 출신 김진욱은 유신고에 진학하지 못했고, 최 감독이 이끄는 강릉고에 입학했다.
이밖에도 올 시즌 강릉고의 주축 선수들은 대부분 최 감독이 직접 스카우트한 타지 출신 선수들이다. 잠재력 있는 선수들이 강릉고에 모였고, 야구 불모지 개척을 목표로 의기투합했다. ‘외인구단’이 결성된 것이다.
“제 궁극적인 목표는 강릉 출신 선수들로 강팀을 만드는 겁니다. 하지만 그 목표는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에 앞서 야구 꿈나무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될 만한 ‘강원도 야구’를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성적이 나지 않는다면, 지역 학생선수를 육성할 토대를 마련할 수 없습니다. 강원도 출신 유명 야구선수가 나오려면, 강원도 아이들이 야구를 접할 기회를 늘려줘야 합니다. 그게 강릉고 야구부의 사명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외인구단을 꾸린 최 감독의 시선은 ‘강원도 야구의 성장’을 향하고 있었다. 최 감독은 외인구단이 성과를 내면, 지역 내 유망주들이 자연스레 육성되리라 전망했다. 그렇기에 그의 첫 번째 숙제는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 승부수
고교야구계 ‘외인구단’ 강릉고 야구부. 사진=이동섭 기자
“이번엔 일 한번 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7월 8일 목동야구장. 강릉고는 서울디자인고와의 청룡기 첫 시합을 앞두고 있었다. 최재호 감독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이번 대회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변수가 있다면, 첫 상대였다. 청룡기 1회전에서 서울디자인고는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를 8대 6으로 꺾었다. 최 감독에게 서울디자인고는 생소한 상대였다. 상대 팀에 대한 정보 역시 충분하지 않았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됐다.
서울디자인고는 1회전 승리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그라운드에서 보여줬다. 서울디자인고 타선은 강릉고 선발투수 신학진을 공략했다. 2회 초 양 팀이 1대 1로 팽팽히 맞선 상황 강릉고는 추가 실점 위기에 처했다. 1사 2루 위기였다.
여기서 최재호 감독의 승부사 기질이 발동했다. 최 감독은 마운드에 올라 투수 교체 사인을 보냈다. 그리고 마운드에 올라온 건 강릉고의 에이스 김진욱이었다.
“서울디자인고 전력을 봤을 때 5~6점 이상을 내면, 승부를 가져올 수 있을 거라 봤습니다. 2회 위기를 맞이했을 때 ‘추가 실점을 내주더라도, 대량 실점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고민 없이 에이스 김진욱을 투입했습니다.” 최 감독이 설명한 투수 교체 이유였다.
김진욱은 2안타를 맞으며 승계주자가 홈에 들어오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강릉고는 1대 2로 리드를 내줬다. 그러나 그 이후로 강릉고는 서울디자인고에 단 한 점도 내주지 않았다.
그 사이 강릉고 타선이 폭발했다. 강릉고 타선은 5회부터 8회까지 무려 7점을 쓸어 담았다. 경기는 8대 2 강릉고의 승리로 끝났다. ‘우승 청부사’의 승부수와 선수단이 발휘한 집중력의 조화가 만들어 낸 승리였다.
강릉발 돌풍의 소용돌이는 이때부터 몰아치기 시작했다.
# 이변
광주일고를 7대 0으로 완파하며, ‘대이변의 주인공’으로 거듭난 강릉고 야구부. 사진=IB스포츠 중계화면 갈무리
“광주일고와의 맞대결이 이번 청룡기 강릉고의 승부처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선수들이 광주일고를 상대로 좋은 경기를 펼친다면, 충분히 더 높은 곳을 향해 도전할 만합니다.”
7월 8일 첫 경기를 앞두고, 강릉고 최재호 감독은 대진표를 쓱 훑어봤다. 그리고 최재호 감독은 ‘광주일고’란 네 글자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번 대회의 성패를 좌우할 승부처를 광주일고전으로 본 것이다.
최 감독의 예상은 적중했다. 강릉고와 광주일고는 16강에서 외나무다리 승부를 펼치게 됐다. 광주일고는 강릉고를 상대로 ‘에이스‘ 정해영 카드를 꺼냈다. 광주일고 선발투수 정해영은 ‘2020 KBO리그 1차 신인지명회의’에서 KIA 타이거즈 지명을 받은 지역 내 최고 유망주였다.
하지만 최 감독과 강릉고는 주눅 들지 않았다. 최 감독은 강팀을 상대할 때마다 선수들에게 특별한 주문을 한다. “결과는 감독이 책임질테니, 여러분은 배우는 자세로 부딪혀 보라”는 주문이다. 광주일고와의 16강전을 앞두고, 최 감독은 선수단에 이같이 주문했다. ‘부딪혀 보자’는 선수들의 의지가 한데 모였고, 그 결과는 대이변으로 이어졌다.
7월 11일 펼쳐진 강릉고와 광주일고의 청룡기 16강전. 강릉고 타선은 1회부터 광주·전남 지역 최대어 정해영을 완벽하게 공략했다. 강릉고의 ‘돌격대장’ 홍종표가 경기 시작과 함께 좌중간을 가르는 3루타로 포문을 열었다.
2번 타자 정준재는 중전 안타로 홍종표를 홈으로 불러 들였다. 이어 4번 타자 김주범이 안타를 터뜨리며 추가점을 냈다. 강릉고는 1회부터 2대 0 리드를 잡았다. 확실한 기선 제압이었다.
마운드에선 신학진이 펄펄 날았다. 신학진은 5회까지 공 56개를 던지며, 3피안타 3탈삼진 무실점 투구를 펼쳤다. 강릉고 타선은 4회 2점을 추가하며 정해영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6회 3점을 추가한 강릉고는 7대 0으로 멀찌감치 달아났다.
6회부터 마운드는 ‘에이스’ 김진욱이 책임졌다. 김진욱은 2이닝 동안 삼진 4개를 뺏어내며, 광주일고 타선을 꽁꽁 틀어 막았다. 김진욱이 7회 말 세 번째 아웃카운트를 삼진으로 마무리한 순간, 경기를 끝내는 종소리가 들렸다. 7대 0. 강릉고가 ‘전통의 강호’ 광주일고를 7회 콜드게임으로 제압한 것이었다.
청룡기 16강전에서 강릉고는 ‘야구 명문’ 광주일고를 침몰시키고 8강행 티켓을 거머 쥐었다. 다크호스 강릉고를 ‘돌풍의 핵’으로 거듭나게 만든 변곡점이었다.
# 결단
강릉고 에이스 김진욱. 김진욱은 개성고와의 준결승전에서 투구수 60개를 넘겨, 결승전에 등판할 수 없었다. 사진=이동섭 기자
“승·패에 내일은 없습니다. 오늘 이기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광주일고를 제압한 강릉고는 거칠 것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7월 13일 열린 8강전에서 강릉고는 제물포고를 14대 7(7회 콜드게임)로 완파했다. 준결승 진출이었다. 강릉고는 준결승에서 개성고를 만났다. 개성고는 야탑고와 순천효천고를 제압하는 등 탄탄한 전력을 과시한 팀이었다.
준결승이 막을 올렸다. 개성고는 3회 말 첫 득점을 올리며, 강릉고를 압박했다. 곧이어 강릉고의 대반격이 시작됐다. 강릉고는 4회와 5회 5안타를 몰아치며 5점을 쓸어 담았다. 5대 1 역전이었다.
4회 말 원아웃 상황에서 선발투수 신학진을 대신해 마운드에 오른 김진욱은 군더더기 없는 투구로 개성고 타선을 막아냈다. 김진욱은 7회 1실점을 제외하면 완벽한 투구를 펼쳤다.
강릉고는 개성고에 5대 2로 앞선 가운데, 운명의 9회 말을 맞이했다. 9회 말에도 어김없이 마운드에 오른 김진욱은 개성고 선두 타자 신동수와 승부했다. 볼카운트 3-1. 이때 최재호 감독이 마운드에 올랐다. 김진욱의 투구수가 60개를 채운 까닭이었다.
올해부터 고교야구에서 61구 이상을 던진 투수는 다음 이틀 동안 경기에 나설 수 없다. 김진욱이 61구째를 던지는 순간 결승전 등판이 불가능해지는 것이었다.
최재호 감독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확실하게 준결승을 잡을 것인지, 결승전을 바라봐야 할지 선택을 해야 했다. 마운드를 방문한 최 감독은 무심한 표정으로 김진욱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모두가 투수 교체를 예상한 상황. 최 감독은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김진욱이 경기를 끝까지 책임지게 된 것이다. 최 감독의 선택은 ‘오늘의 승리’였다.
승부수는 통했다. 김진욱은 9회에도 개성고 타선을 무실점으로 봉쇄했다. 강릉고의 5대 2 승리였다. 이날 승리로 강릉고는 2007년 청룡기 이후 12년 만에 전국대회 결승 무대를 밟게 됐다. ‘강릉고 돌풍’의 클라이맥스였다.
하지만 준결승의 승부수는 결승전의 약점으로 작용했다. 7월 16일 서울 목동야구장에서 펼쳐진 강릉고와 유신고의 청룡기 결승전. 강릉고 입장에선 ‘에이스’ 부재가 뼈아팠다.
강릉고는 1회 말 유신고 타선에 4점을 내주며 무너졌다. 1회부터 승부의 추가 유신고 쪽으로 완전히 기운 것이다. 강릉고는 유신고에 0대 7 완패를 당했다. 우승의 문턱에서 돌풍이 잦아든 것이다. 결승전을 마친 뒤 최재호 감독의 표정엔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이번 대회 우리 선수들이 만들어 낸 과정이 참 좋았습니다. 그러나 결승전 내용은 좋지 못했어요. 1회부터 승부가 완전히 기울었습니다. 어찌 됐든 선수들에게 ‘잘했다’란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선수들 모두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놀지도 못했고요. 정말 고맙습니다. 비록 오늘 결승전에서 패했지만 얻은 것은 있습니다. 1-2학년 투수들이 큰 무대에서 의미 있는 경험을 했습니다. 오늘은 일단 그것에 만족하려 합니다.”
강릉고 돌풍은 2019년 청룡기를 뜨겁게 달궜고, ‘대회 준우승’이란 가시적 성과를 냈다. 하지만 강릉고 야구부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 강릉고는 또 다른 돌풍을 준비한다. 목표엔 변함이 없다.
강원도 고교야구팀이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전국대회 우승’이란 전인미답의 고지. 그 고지가 강릉고의 목표다.
# 에필로그
제74회 청룡기 결승전을 마친 뒤 강릉고 선수단을 바라보는 최재호 감독. 사진=이동섭 기자
“우리의 목표는 강원도 최강팀이 아닙니다. ‘전국 최강팀’으로 거듭나는 게 목표입니다. 그리고 제 야구인생 마지막 꿈은 강릉고 야구부가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겁니다. 아직 가야할 길이 남은 만큼 또 도전해보겠습니다.”
준우승 이후 강릉고 최재호 감독이 밝힌 각오다. 제74회 청룡기 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 강릉고는 신데렐라 스토리를 써내려 갔다. 하지만 강릉고 돌풍은 우승의 문턱에서 패배의 쓴맛을 봐야 했다.
결승전 패배로, 강릉고의 신데렐라 스토리가 막을 내린 것은 아니다. 강릉고 선수들은 청룡기 결승의 경험을 자양분 삼아 한 단계 성장할 전망이다. 준우승의 아픔을 맛본 만큼 ‘전국대회 우승’을 향한 동기부여 역시 확실해졌다. 최재호 감독은 “이번 대회 준우승은 강릉고가 ‘전국구 강팀’으로 성장하는 데 큰 동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야구 불모지’ 강원도에서 이제 막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강릉고는 고교야구 전통의 강호를 위협하는 부담스런 존재로 성장하고 있다. 2019년 청룡기를 강타한 강릉고 돌풍은 앞으로도 유효할 전망이다. 강릉고의 행보에 시선이 쏠리는 이유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