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가 급락이 세계 경제을 흔들 또 다른 뇌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지난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연합인포맥스. 사진=연합뉴스
#미국·러시아·사우디의 치킨 게임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끄는 석유수출국개발기구(OPEC)은 최근 국제 원유시장에서 영향력이 크게 약해졌다. 미국과 러시아 등 비(非) OPEC 국가들의 생산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산유량이 사우디를 넘어설 정도다. 비 OPEC 국가들은 감산협상에도 소극적이다. 사우디로서는 약이 오를 만하다. 이번 원유 전쟁도 지난 3월 사우디의 감산 제안을 러시아가 거부하면서 불이 붙었다. 사우디는 결렬 직후 오히려 증산 계획을 발표, 선전포고에 나섰다.
값이 떨어지면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게 미국의 셰일가스다. 셰일가스 손익분기점은 배럴당 약 40달러로 사우디나 러시아보다 높다. 사실상 국가가 통제하는 사우디나 러시아와 달리 미국 셰일가스는 민간기업이 대부분이다. 유가가 떨어지면 여러모로 가장 불리하다. 특히 셰일가스 업체들이 발행한 채권의 부실화 가능성은 미국 금융시스템의 위협요인이다.
#물러설 수 없는 트럼프, 푸틴, 빈 살만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 후보는 총득표수에서는 졌지만, 선거인단 수에서 이겼다. 미국 석유업체들이 집결된 텍사스주의 선거인단은 38명으로 캘리포니아(55명) 다음으로 많다. 전통적으로 공화당의 텃밭이다. 초저유가가 지속되면 줄도산이 불가피하다. 장기집권 합법화를 위해 개헌을 추진하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2일로 예정됐던 헌법개정안 국민투표를 연기했다. 강력한 리더십을 유지하려면 원유 전쟁에서 물러설 수 없다. 하지만 날로 악화되는 경제 상황을 감안하면 현재의 초저유가를 마냥 방치하기도 어렵다.
최근 미국 정부는 러시아 정부의 내부 정보를 활용해 국제 금융시장에서 원유 투자에 나선 인물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정부의 행보를 미리 알았다면 국제 금융시장에서 큰 이익을 취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용의자는 러시아 대통령궁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1953년 이븐 사우드 초대국왕 사망 이후 처음으로 부자간 왕위 계승에 도전하고 있다. 그동안 사우디는 사우드 국왕의 아들 형제간 왕위 계승이 이뤄졌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이미 여러 차례 왕족 숙청에 나섰다. 그만큼 내부에 입지를 위협하는 반대세력이 많다는 증거다. 왕위 계승자로서 위치를 공고히 하려면 업적이 필요하다.
#원유 대신 달러로…미국의 반격 ‘무제한 발권’
국제시장에서 원유는 달러로만 거래된다. 금본위제를 포기한 미국이 원유를 달러의 새로운 앵커(Anchor)로 삼았다는 분석이다. 2009년 이후 양적완화로 엄청난 달러가 풀린 데 이어 코로나19로 또다시 무제한 달러 발권이 이뤄지고 있다. 기축통화인 달러 발권은 미국만의 절대권력이다.
통화량 증가는 곧 화폐가치 하락이고, 이는 실물자산의 표시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최근 달러 발권 증가에도 불구하고 달러 가치는 오르고 있다. 반면 산유국 통화 가치는 하락했다. 이들이 달러 충분히 확보를 하지 못하면 물가 불안과 재정 불안을 동시에 맞이할 수 있다.
#산유국 경제 위태…선진국 금융에도 위협
국제통화기금(IMF)은 재정 균형을 위한 배럴당 원유단가를 사우디 80달러, 러시아 48달러로 추정한다. 외환보유액은 각각 5000억 달러, 5500억 달러에 달한다. 아무리 외환보유액이 많아도 일단 자본이 이탈하기 시작하면 버티기 어렵다. 게다가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침체에도 대응해야 한다.
사우디는 최근 정부 지출을 5% 줄이고, 부채한도를 GDP(국내총생산)의 30%에서 50%로 높였다. 경제 현대화를 위한 무함마드 왕세자의 대형개발 프로젝트도 연기되거나 중단됐다. 카타르나 아랍에미리트 등도 달러 차입을 위해 국제 금융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러시아도 1700억 달러의 비상금이 8년간 저유가로 인한 재정 부족을 메울 수 있다고 장담했지만, 최근 그 기간을 4년으로 줄였다. 비상금 절반이 올해 지출된다. 실제 버틸 수 있는 기간은 더 짧다는 뜻이다.
이른바 부자 산유국들의 사정이 이 정도니, 다른 아프리카와 중남미 산유국들은 상황이 더 열악하다. 원유 수출을 제대로 하지 못해 달러 부족으로 외채 지급불능이 되면 이들에게 돈을 빌려준 선진국 금융기관에 타격이다. 초 저유가는 글로벌 경제 전체를 위협할 수도 있다.
#저장고 꽉 차면 수급 균형 찾을 듯
지난 4월 21일의 마이너스 유가는 5월에는 더 이상 시장에서 원유를 가져가겠다는 이가 없어서 나타난 현상이다. 현재 재고만으로도 수요를 감당하기 충분하다는 뜻이다. 선물시장에서야 마이너스 가격도 존재할 수 있지만, 현물시장에서 돈을 주고 원유를 넘기는 행위는 불가능하다. 하반기로 가까이 갈수록 선물가격은 높아진다. 산유국들이 무제한 공급에 나서도 더 이상 저장할 곳이 없으면 과잉생산은 멈출 수밖에 없다. 5월 중 저장시설이 모두 꽉 차면 산유국들의 생산량은 실수요에 수렴할 것으로 보인다.
전문기관들은 코로나19로 올해 글로벌 원유 수요가 최소 20% 이상 줄어들 것으로 예상한다. 3월부터 시작된 주요국의 봉쇄 조치로 감소분 상당 부분은 이미 발생했다. 아무리 수요가 줄어도 기본적인 소비는 존재한다. 원유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에너지원이다. 세계 최대 원유소비국인 미국과 중국의 경제활동 재개가 이뤄진다면 수요는 회복될 수 있다.
#오래됐지만 위협적 변수, 지정학적 불안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호르무즈 해협에서 미국 선박을 위협하는 이란 함정에 대해 공격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원유 매장량 세계 4위인 이란은 미국으로부터 경제제재를 받아 원칙적으로는 원유수출이 금지됐다. 중국이 암암리에 이란산 원유를 구입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은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와 긴장 관계다. 올 1월에는 이란 혁명수비대의 핵심적 인물인 솔레이마니 장군이 미국의 드론 공격으로 사망했다. 이란은 미국과 적대적이지만, 러시아와는 가깝다. 미국은 사우디에 이란 견제를 위한 무기 수출 등을 미끼로 원유 정책에 개입할 여지를 노릴 수도 있다. 중동의 지정학적 위협이 높아진다면 수급불안 심리가 자극돼 원유가격 상승요인이 된다.
전쟁이 아니라면 지정학적 위험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유가가 반등할수록 미국의 셰일가스 재가동이란 압력 변수가 작동하게 된다. 아무리 반등해도 코로나19로 인한 수요 감소를 극복할 정도의 극적 반전이 없다면 배럴당 30달러대를 넘어서기 어렵다. 원유 수요의 44%를 차지하는 육상연료는 경제봉쇄가 풀리면 비교적 빠르게 회복될 수도 있다. 12%에 달하는 항공 및 해운 수요는 쉽게 회복되기 어렵다. 국제 원유선물시장에 몰린 엄청난 자금들도 유가가 반등하면 탈출 시도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