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수’ 신 아무개 씨는 말문이 막혔다. 1989년 8월 2일, 윤 씨는 면회 온 형수 앞에서 “내가 범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가 이춘재 8차 사건 범인으로 지목돼 구치소에 수감된 지 일주일이 지난 때였다. 윤 씨는 말도 잘 못 알아듣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래도 그 말만은 분명히 했다. 신 씨는 “네가 한 게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말을 하라”고 설득했지만 그는 확고했다.
“1년 만 살고 나가면 된다”는 말을 반복했다. 신 씨는 “누가 사람을 죽이고 1년만 사느냐, 말도 안 된다”고 다그쳤다. 그는 다 방법이 있다고 했다.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1년만 있다가 나오면 된다고 알려줬고, 그 사이에 먹는 것 입는 것도 다 도와 준다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한 게 누구냐고 물었다. “형사들이 그랬다”는 답이 돌아왔다.
윤 씨의 자백이 담긴 진술서. 재심 첫 증인신문에선 이 자백 내용을 뒤집을 증언들이 나왔다. 사진=이종현 기자
#“거칠고 욕 많이 했다” 과거 진술 뒤집은 증인들
6월 15일, 수원지방법원 형사12부(재판장 박정제)는 이춘재 8차 사건 재심 첫 증인신문을 진행했다. 이날 법정에는 과거 윤 씨와 함께 농기구 수리센터에서 일했던 홍 아무개 씨와 그의 아내 신 씨, 홍 씨의 동생 등 3명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동생 홍 씨는 오랜 시간이 지나 당시 상황을 기억하지 못해 홍 씨 부부의 증언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홍 씨 가족은 1988년께 타지에서 화성으로 이사하면서 오토바이 공업사를 인수해 농기구 수리센터를 열었다. 가게를 넘겨받으면서 당시 가족과 떨어져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윤 씨의 사정을 듣게 됐고, 마침 수리 기술자가 필요했던 홍 씨는 가게 인수와 함께 윤 씨도 고용하기로 했다. 윤 씨는 홍 씨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자연스레 신 씨는 형수가 됐다. 이들은 1989년 7월 25일, 윤 씨가 범인으로 지목돼 경찰서에 연행될 때까지 그곳에서 함께 가족처럼 살았다.
그런데 과거 화성경찰서 수사기록을 보면, 홍 씨와 그의 아내 신 씨는 윤 씨가 범인으로 지목된 이후 불리한 진술을 쏟아냈다. 가족이자 보호자로서, 늘 함께했던 두 사람이 설명한 윤 씨의 성격과 품행은 과거 수사 경찰이 범인으로 지목하는 데 힘을 실어 주는 하나의 근거가 됐다. 처음 만날 때부터 거친 사람이었고, 특히 사건 발생 이후부터 달라진 성격과 행동이 범인임을 말해준다는 논리였다.
1989년 7월 29일 작성된 진술조서에서 신 씨는 윤 씨의 성격과 품행에 대해 “성격이 급한 편이고 욕을 잘 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또 “8차 사건 발생하고 경찰들이 오가기 시작하면서 윤 씨의 성격이 날카로워 졌다”고 했고, 앞서의 면회 직후엔 윤 씨가 자신에게 범행 동기와 과정을 털어놨다며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사진=수사기록
홍 씨와 신 씨는 이번 재심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과거 진술들을 모두 뒤집었다. 홍 씨는 “학교를 다니지 않아 표현이 서툴렀을 뿐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피해를 주는 일은 없었다. 욕도 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아내 신 씨는 윤 씨를 전적으로 신뢰했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6세, 3세 아이들을 윤 씨에게 2~3시간씩 맡겨두고 오산에서 열리는 시장에 매주 다녀왔다. 거칠고 품행이 좋지 않았다면 어린 아이들을 맡기고 집을 비울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과거 수사과정에서 작성된 이들의 진술조서에는 모두 ‘직접 읽어보고 확인했다’는 내용에 동의하는 서명과 지장이 찍혀 있다. 그러나 법정에서 이를 확인한 홍 씨와 신 씨는 서명이 자신의 필체는 맞지만 실제로 읽어보고 서명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홍 씨는 앞서의 진술을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특히 과거 수사기록을 보면, 윤 씨에 대한 경찰 조사 과정에서는 홍 씨는 참관도 한 것으로 기재돼 있다.
홍 씨는 오후 1시부터 9시까지 함께 있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그는 이른 새벽 “윤 씨가 자백했으니 경찰서로 오라”는 전화를 받고 갔던 것만 기억하고 있다. 윤 씨 변호인인 김칠준 변호사는 “살인사건으로 경찰 조사를 받는 일 자체가 이례적인 데다, 8시간가량 머물렀다면 오랜 시간이 지났더라도 단편적인 기억이 있을 것”이라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지에 대해 물었지만 홍 씨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다만 홍 씨는 그날 새벽, 경찰서에서 본 윤 씨의 모습은 뚜렷하게 기억했다. 그는 “형 왔다”고 했으나 윤 씨는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고, 눈에도 초점이 없었다고 했다. 이 모습을 확인한 경찰이 녹음기를 틀어줬다고 했다. 녹음기에선 윤 씨가 “제가 했습니다”라며 범행을 시인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고 했다. 신 씨는 경찰 조사 당시 옆에서 우는 아이들을 달래면서 수사관이 하는 말이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예, 예”했던 기억만 난다고 했다.
#“윤 씨 범행 불가능하다”
윤 씨의 과거 ‘자백’에 배치되는 증언들도 나왔다. 윤 씨는 1989년 7월 25일 경찰조사 과정에서 8차 사건 범행 전날인 1988년 9월 15일 밤 11시 무렵 당시 거주하고 있던 농기구 수리센터에서 나와 주변을 배회하다가 1시간 30분 정도 걸어가 피해자의 집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러나 홍 씨와 신 씨는 당시 집 구조와 윤 씨의 신체 특징을 종합하면, 늦은 밤 가족들 몰래 홀로 외출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못 박았다. 당시 농기구 수리센터 구조를 보면, 방은 합판과 같은 얇은 판으로 나눠졌다. 한편에는 홍 씨 가족이, 다른 쪽에는 윤 씨와 홍 씨의 동생이 함께 잠을 잤다고 했다. 방에서 대문까지 나가는 길은 소리 없이 나갈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고 했다. 경운기가 마당 가득 세워져 있었고 공구와 기름들이 뒤섞여있었다. 신 씨는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소리가 다 들렸다. 밤에 나갔다면 가족들이 모를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농기구수리센터 구조. 사진=수사기록
집을 나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대문은 나무 기둥에 커다란 양철판을 이어 붙인 형태였다. 무게를 이기지 못해 양철판이 땅바닥에 닿았는데, 문을 열려면 일단 바닥에서 들어 올린 뒤 밀거나 당겨야 했다고 했다. 홍 씨는 “윤 씨는 100m만 걸어도 힘들다며 땅바닥에 주저앉아버릴 정도였다. 다리에 힘을 줄 수 없어 혼자 문을 열지 못했다”며 문을 열고 닫는 일은 자신이 했다고 말했다.
8차 사건 현장에서 ‘기름때’가 나오지 않은 건 당시에도 의문을 가졌다는 증언도 나왔다. 홍 씨 부부에 따르면 윤 씨는 불편한 다리 탓에 배를 대고 엎드리거나 바닥에 주저앉아 기계를 수리했다고 했다. 옷은 물론 얼굴과 손, 발에는 새카만 기름이 묻을 수밖에 없었는데, 윤 씨는 잘 씻지 않았다고 했다. 홍 씨는 “당시 별도로 세면장이 없었던 데다 씻는 모습이 밖에서 오가는 사람들에게도 보였다”며 “윤 씨가 불편한 다리를 보여주기 싫어서 씻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윤 씨와 홍 씨 부부는 서로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홍 씨 부부는 윤 씨가 범인으로 지목된 직후에도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에 대해 윤 씨 변호인단은 과거 경찰들이 보인 모습들에서 답을 찾고 있다. 홍 씨는 당시 경찰들이 자신의 트럭을 밤마다 빌려갔다고 했다. 오토바이밖에 없었던 경찰들이 트럭으로 마을 순찰을 돌고 아침에 돌려줬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기름값이나 수리비는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고도 했다. 박준영 변호사가 “적어도 기름 값이나 수리비를 요구하는 건 정당한 일인데 왜 말하지 못했나”라고 묻자 홍 씨는 “그때는 말만 조금 잘못해도 잡혀갈 때였다. 경찰과는 일단 잘 지내고 봐야 했다”고 말했다.
8차 사건은 윤 씨는 물론 주변인들의 삶에도 커다란 변화를 줬다. 지난 6월 13일 일요신문과 만난 홍 씨 부부는 윤 씨가 범인으로 지목된 이후 농기구 수리센터를 폐업했다고 했다. 주변의 시선을 이기지 못해 쫓겨나듯 화성을 떠났고, 지금까지도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홍 씨 부부는 지난해 윤 씨를 30년 만에 처음 만났다. 부둥켜안은 그들 사이에서 원망과 앙금은 없었다. 윤 씨는 자신 때문에 형님 부부가 고생했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홍 씨 부부는 아무것도 못해줘서 늘 미안했다고 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