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서방파 보스 김태촌 밑에서 주먹계의 실력자로 이름을 날렸던 백민 씨. 그는 4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범죄예방전도사라는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고 있다. |
흥미로운 사실은 이 단체 설립을 준비해온 인물이 전 범서방파 보스 김태촌 씨를 30년 동안 ‘형님’으로 모시며 과거 서울주먹계의 실력자로 이름을 날렸던 백민 씨(58)라는 점이다. 언론에 노출될 경우 괜한 오해를 사게 될 것이 염려스럽다며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하는 그를 7월 27일 만나봤다.
“검·경은 범죄자를 잡아들이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 예방 역할을 할 순 없어요. 또 이 바닥 생리를 모르기 때문에 범죄자들을 교화시키기도 어렵구요. 마구 잡아넣기만 하면 뭐합니까. 나오자마자 사고치고 똑같이 사는데….”
백 씨는 한국범죄예방지원센터를 설립하기로 결심한 이유에 대해 “범죄자의 심리나 동향은 범죄자 출신이 알고, 조폭을 잡는 데는 조폭 출신이 나서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과거 근 40여 년을 주먹세계에 몸담았던 본인이 ‘범죄인 선도꾼 및 범죄예방전도사’로 나선 것도 그 바닥을 잘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듣고 보니 과거 누군가에게 들은 적이 있는 얘기다. 바로 지난해 세상을 떠난 주먹계의 대부 ‘천안곰’ 조일환 씨가 기자에게 했던 말이다. 알고 보니 백 씨는 ‘족보’로는 김태촌 씨의 직계지만 조 씨를 정신적 지주로 여기며 따랐던 인물이었다. 조 씨가 뒤늦게 신앙에 귀의해 청소년 선도 및 재소자 교화 등에 힘쓰는 것을 지켜보며 상당히 많은 감화를 받았다는 것이 백 씨의 얘기다. 특히 백 씨는 주먹세계를 떠난 이후 흉폭한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우리 사회를 지켜보며 적잖은 위기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위기감은 “과오를 털어버리고 사회를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책임감을 끌어냈다.
178㎝에 100㎏이 넘는 거구인 백 씨는 조일환 씨와 외모나 성격 등 여러 면에서 닮았다. 상대를 일순간에 제압하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호탕한 웃음소리, 우락부락한 마스크와 떡 벌어진 어깨, 짧은 목과 솥뚜껑만 한 손, 그리고 아우들을 아우르는 카리스마, 딸뻘 되는 여기자에게 깍듯한 존칭을 쓰는 것까지….
백 씨의 변신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그가 김태촌 씨의 ‘오른팔’로 서울주먹계를 평정했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는 전력 때문이다. 80년대 강남, 종로, 명동 등 서울 노른자위 지역을 줄줄이 섭렵했던 백 씨는 1998년 사회를 발칵 뒤집어놨던 이른바 ‘조계종 사건’(조계종 총무원장 선거를 둘러싼 종단 내부갈등에 폭력배가 개입한 사건)의 주역이기도 했다. 그는 ‘현역’ 시절 ‘눈 깜짝할 사이’ 서울에서만 100명 이상의 조직원을 동원할 수 있는 인물로 통하기도 했다. 실제로 기자가 만난 수많은 ‘현역’들은 백 씨를 일컬어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가장 많은 아우들을 집합시킬 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고 입을 모았다.
▲ 백민 씨와 연화법사. |
“상대 제압하고 조직 키우는 낙으로 살았습니다. 하루라도 조용히 지나가면 허전했죠. 성격도 다혈질적이고 불같았습니다. 칼도 수없이 맞았고 ‘머리뚜껑’을 두 번이나 열었을 정도로 고비도 많았습니다. 그땐 그런 생활이 재미있었고 그게 폼 나게 사는 거라 생각했었죠. 하지만 결국 비만 오면 쑤시는 몸뚱아리와 허망함만 남았습니다.”
그런 그도 수년 전 조직생활을 청산하고 어느덧 사업가로 새 인생을 걷고 있다. 그리고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현재 50%에 달하는 재범율을 5%로 낮춰 사회를 정화시키는 데 여생을 바치겠다”는 나름의 목표를 세웠다. ‘떳떳할 수 없던’ 아버지 밑에서도 반듯하게 자란 두 자녀와 가장의 역할에 소홀했던 자신을 믿어준 아내에 대한 뒤늦은 보답이었다. 또 4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새로운 인생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진 것도 한 이유가 됐다.
그는 재범율을 낮추기 위해서는 범죄자들의 정신교화뿐 아니라 현실적인 대책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먹’(출신)도 변해야 돼요. 남의 것 뜯어먹고 나쁜 짓하다가 몇 번 (징역) 살다 나오면 대책이 없어요. 그래서 아우들에게도 건설업이든 장사든 수입이 있는 자기 일을 가지라고 강조합니다. 대신 세금 제대로 내는 합법적인 사업이어야 돼요. 생계가 보장돼야 나쁜 짓을 기웃거리지 않을뿐더러 돈의 유혹에 흔들려 불미스러운 일에 개입되는 것도 막을 수 있거든요.”
독실한 불교신자인 백 씨는 두 달 전 법당을 차리기도 했다. 뜻을 같이하는 연화법사의 도움을 받아 찾아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상담도 해주고 기도도 한다.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사와 굴곡 많은 삶의 경험담이 마음의 문을 여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단다. 적지만 법당 수익금은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 돕기, 재소자들의 갱생과 범죄예방센터 운영비 등으로 사용된다.
백 씨는 법당이 있는 건물에 상담실과 쉼터도 마련해 갈 곳 없는 출소자들과 노숙자들이 사회에 발붙일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공권력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조직원들이나 예비 범죄자들에 대한 범죄예방 활동에도 신경 쓰겠다는 각오를 밝히기도 했다. 백 씨가 특히 관심을 갖는 것은 학교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청소년들이다.
“하위권 학생들 중 ‘조폭’을 목표로 꼽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타일러도 말을 듣지 않아요. 그런 애들에게도 제가 적격입니다. 겉으로는 화려하게만 보이는 조직생활의 어둡고 비참한 실상을 알려줌으로써 그들이 나와 같은 길을 걷지 않도록 도울 것입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한 백 씨의 인생 2막이 어떻게 펼쳐질지 자못 궁금해진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