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일 이탈리아에서 룸메이트를 살해한 혐의로 복역하다 항소심으로 무죄 판결을 받은 아만다 녹스(24)가 고향인 시애틀에 도착했다. 로이터/뉴시스 |
최근 며칠 동안 미국과 유럽에서는 온통 아만다 녹스(24)라는 미모의 여대생이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녹스는 지난 2007년 이탈리아 페루자에서 언어연수를 하던 중 룸메이트였던 영국 출신의 교환학생 메레디스 커처(여·당시 21세)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26년형을 선고받은 미국의 여대생이다. 그녀가 최근 다시 화제가 된 이유는 얼마 전 이탈리아 페루자 법원이 그녀에게 1심의 판결을 완전히 뒤집고 무죄를 선고하면서였다. 이로써 지난 4년 동안 줄기차게 무죄를 주장했던 녹스와 미국 측은 ‘억울한 누명을 벗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며 환호하고 있는 반면, 영국과 이탈리아 등 유럽 측은 ‘악녀를 이대로 풀어줘선 안 된다’며 분개하고 있다. 녹스의 이야기는 이미 미국에서 TV 영화 <아만다 녹스: 이탈리아 살인 재판>로도 제작됐을 만큼 많은 관심을 받아왔으며, 이번 석방으로 인해 앞으로 자서전 출판, 단독 인터뷰, 할리우드 영화 제작도 더욱 활발하게 이뤄질 전망이다. 그렇다면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그리고 녹스가 범인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여대생을 살해한 걸까.
‘폭시 녹시(Foxy Knoxy).’
녹스에게 부정적인 일부 언론들이 ‘여우 같은 녹스’라는 뜻으로 붙인 별명이다. 이렇듯 유럽에서는 지금껏 그녀를 ‘여우’ ‘악녀’ ‘파티걸’ ‘섹스광’ 등으로 묘사하면서 유죄라고 믿어왔다.
이탈리아 검찰 측은 평소 마약, 술을 즐기는 섹스광이었던 녹스가 사건 당일 자신의 이탈리아 남자친구인 라파엘 솔레치토(27)와 코트디부아르 출신의 남성인 루디 게드(24)와 함께 커처에게 그룹 섹스를 강요했다가 말을 듣지 않자 다툼 끝에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커처는 사건 발생 다음 날 자신의 방에서 반나체로 목에 칼이 찔린 채 발견됐으며, 당시 사인은 과다 출혈과 질식사로 밝혀졌다. 또한 부검 결과 성폭행을 당한 흔적까지 발견돼 추측컨대 목을 칼로 찌른 채 강제로 성폭행을 시도했던 것으로 알려져 더욱 충격을 안겨줬다.
하지만 미국 측의 반응은 달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녹스를 ‘불쌍한 미녀 여대생’ ‘억울하게 누명을 쓴 순진한 여성’이라고 두둔했으며, 녹스 역시 재판 내내 자신의 무죄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리고 지난 3일, 결국 페루자 법원은 녹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살인 혐의를 받고 복역 중이던 녹스와 솔레치토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이로써 지난 2009년 각각 26년형과 25년형을 선고 받았던 녹스와 솔레치토는 4년 만에 다시 자유의 몸이 됐다. 반면 징역 30년형을 선고 받았다가 훗날 16년형으로 감형된 게드는 현재 항소하지 않은 채 아직 복역 중이다.
하지만 여전히 녹스의 행적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미심쩍은 구석이 많다며 의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이런 까닭에 일부 언론과 누리꾼들은 여전히 ‘유죄냐 무죄냐’를 놓고 한바탕 설전을 벌이면서 과연 이탈리아 검찰이 판결에 불복해 상고할지 여부를 지켜보고 있다.
우선 그녀가 유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고 있다. 가장 의심스러운 점은 횡설수설하는 그녀의 태도다. 처음 경찰 조사에서 그녀는 “나는 범행이 벌어질 당시 아파트 안에 있었다. 커처의 비명 소리를 들었지만 무서운 나머지 귀를 막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얼마 후 녹스는 보란 듯이 말을 바꾸었다. 사건 당일 자신은 아파트에 없었으며, 경찰이 자신을 협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짓 자백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사실 그날 밤 솔레치토의 집에서 밤새 마리화나를 피우면서 영화를 봤으며, 다음 날이 돼서야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기에도 이상한 점은 있었다. 그녀의 알리바이를 입증해줄 유일한 인물인 솔레치토가 모호한 태도로 의심을 샀던 것이다. 그는 사건 당일 밤 무엇을 했느냐는 경찰의 질문에 “집에서 컴퓨터로 영화와 만화를 다운받아 보고 있었다”며 “녹스와 밤새 내내 함께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 아만다 녹스의 남자친구 라파엘 솔레치토(왼쪽)와 루디 게드. |
녹스가 다른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려 했다는 점도 수상하긴 마찬가지다. 사건 발생 직후 녹스는 경찰에 인근 술집의 사장인 콩고 출신의 패트릭 루뭄바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루뭄바의 알리바이는 완벽했다. 신문을 보고 루뭄바의 체포 소식을 알게 된 단골손님인 스위스의 한 사업가가 “그날 밤 루뭄바와 나는 술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고 증언하면서 완벽한 알리바이를 제시한 것. 이에 루뭄바는 곧 풀려났으며, 녹스는 되레 명예훼손죄로 고소를 당하고 말았다.
이밖에도 녹스는 일부러 강도가 든 것처럼 꾸미기 위해 어설프게 사건 현장을 조작했다는 의심도 받고 있다. 깨진 창문의 유리 파편이 방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 위에 떨어진 점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누군가 먼저 방을 엉망으로 만든 다음 일부러 창문을 깨뜨렸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녹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녀가 결백하다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범인이라고 말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나 단서가 없다는 것이다.
먼저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흉기, 즉 식칼에 대해 검찰은 “칼날에 묻어있던 혈흔을 검사한 결과 커처의 것으로 확인됐으며, 또한 손잡이에서도 녹스의 DNA가 검출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의학자의 말은 달랐다. 항소심에서 법의학자는 “흉기에서 발견된 DNA의 양이 너무 적어서 누구 것인지 확실히 식별하기가 어렵다. 또한 식칼에서 DNA를 채취한 시점이 사건이 발생한지 무려 47일이나 지난 후였기 때문에 증거가 오염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이밖에도 식칼의 칼날 모양이 커처의 목에 난 세 군데의 자상 흔적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커처의 이불에 문지른 칼날 자국과 다르다는 점도 그녀의 무죄를 뒷받침하고 있다.
사건 발생 6주 후 현장에서 발견된 커처의 브래지어 후크 역시 증거로 삼기에는 불충분하다. 이곳에서 솔레치토의 DNA가 발견됐다는 검찰의 주장과 달리 충분한 양의 DNA가 검출되지 않았고, 또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오염됐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단정 짓기 어렵다는 것이다.
과연 녹스에게 커처를 살해할 결정적인 동기가 있었을까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검찰은 평소 녹스와 커처의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고 말하면서 그간 쌓였던 불만들이 한순간에 폭발해 급기야 살인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녹스를 두둔하는 사람들은 “설마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겠는가”라며 의심하고 있다.
현재 교도소에 복역 중인 게드가 같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다른 죄수에게 털어놓았다는 말도 녹스의 무죄를 입증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항소심에서 녹스 측 변호인이 증인으로 채택했던 마리오 알레시는 “교도소에서 게드로부터 ‘녹스와 솔레치토는 범인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진짜 범인은 나의 동료 중 한 명이다’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한편 게드는 법정에서 자신이 사건 당일 커처의 아파트를 찾아간 것은 사실이지만 범행을 저지르지는 않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있다가 비명 소리를 듣고 뛰쳐나왔으며, 방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커처를 보고는 놀라 도망쳐 나왔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설만 난무한 가운데 결국 자유의 몸이 된 녹스는 현재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의 품에 안긴 상태다.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면서 곧 돈방석에 앉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녹스가 과연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지 모두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