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잭 켐프의 젊은 시절. ‘공화당의 케네디’로 불리우며 깨끗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
민주당에선 게리 하트가 섹스 스캔들에, 조 바이든이 표절 시비에 휘말려 나가떨어진 뒤 마이클 듀카키스가 후보가 되었다. 공화당은 조지 부시와 밥 돌, 그리고 하원의원인 잭 켐프와 TV를 통해 유명해진 목사 팻 로버트슨 등이 경쟁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철퇴를 맞은 사람은 잭 켐프였다. 그는 NFL(미국프로풋볼리그)의 스타 쿼터백 출신으로 1957년부터 1969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는데 운동선수로 뛰는 기간에도 정치에 큰 관심을 보였고 1967년의 오프 시즌 때는 레이건의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 캠프에 합류하기도 했다.
이후 정계에 입문한 그는 공화당이지만 종종 민주당의 자유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기도 했다. 유색 인종이나 불법 이민자에 대한 인권을 강조하고 사회적 빈곤 문제 해결에 힘쓰는 그의 모습은 인상적이었으며, 존 F 케네디를 연상시키는 미남형 얼굴로 ‘공화당의 케네디’로 불리기도 했다. 공화당에서 가장 깨끗한 이미지를 지닌 정치인이었으며 이후 1996년 대선에 밥 돌이 공화당 후보로 나섰을 땐 부통령으로 러닝메이트를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1988년엔 암초에 걸렸다. 그가 게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1980년대의 보수적 상황에선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발단은 약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잭 켐프가 레이건의 주지사 선거 운동을 돕던 시기인 1967년 그는 타호 호수 부근에 자그마한 별장을 한 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게이 파티가 있었고 그 자리에 잭 켐프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물론 잭 켐프는 부인했다. 선수 시절 부동산 가치를 보고 사둔 곳일 뿐이며, 그곳에서 지인들이 파티를 벌이긴 했지만 자신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 요지였다.
이것은 해묵은 문제였고 사실 1967년 당시 게이로 의심받고 있던 사람은 레이건이었다. 심지어 그가 이 문제 때문에 대선에 늦게 도전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당시 레이건의 참모들은 누군가 희생양이 필요했고, 그때 이미 잭 켐프는 동성애자로 몰려 선거 캠프에서 물러나야 했던 전력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그가 대선에 도전할 시점이 되자, 20년 전의 그 문제가 다시 튀어나온 것이다. 그가 게이라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1958년에 결혼해 네 아이의 아버지였던 그는 성실한 가장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과거 레이건의 참모들은 사설탐정까지 고용했지만 심증만 있었을 뿐 물증은 잡지 못했다. 그럼에도 마녀사냥으로 켐프를 물러나게 했고, 이 사건은 끝내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 1988년 대선 당시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잭 켐프. |
로버트슨은 자신이 한국전쟁의 최전방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공산주의에 맞서 싸웠다고 이야기했다. 이에 같은 공화당의 하원의원이었던 폴 맥클로스키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한국전쟁에서 중상을 입은 참전 군인으로 수많은 훈장을 받았던 대표적인 군 출신 정치인이었다. 맥클로스키는 로버트슨이 전방엔 없었으며 상원의원이었던 아버지의 ‘빽’을 이용해 편하게 군 생활을 했다고 주장했다. 로버트슨은 허위 사실이라며 반박했지만 결정타를 맞은 그는 조금씩 기울었고 결국은 경선 레이스에서 조금씩 침몰했다.
결국은 조지 부시와 최종 대결을 펼치게 되는 밥 돌은 재산 문제로 힘든 상황을 맞이했다. 그가 아내 엘리자베스와 함께 재산을 불려갔던 과정이 의혹을 산 것. 특히 공화당 경선에 나오기 전의 3년 동안엔 140만 달러에서 230만 달러로 거의 두 배로 재산이 늘었다. 밥 돌은 정당한 부동산 투자에 의한 자산의 증가라고 말했지만, 그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 행사가 있었다는 얘기가 돌았다. 조지 부시는 밥 돌에게 최근 10년 치 납세 신고서를 공개하라고 주장했고, 이에 밥 돌은 아예 21년 동안의 수입 명세서를 공개했지만 결국은 부시에게 지고 말았다.
물론 조지 부시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그가 부통령 시절 미국은 이란-콘트라 사태에 휩싸였다. 간단히 말하면 미국과 이란이 인질과 무기를 교환한 것이다. 만약 이 사실을 알고도 추진했다면 그는 비난받을 것이고, 알지 못했다면 무능한 인간으로 낙인찍힐 상황이었다. 이에 조지 부시는 ‘언론에 대한 역공’을 방법으로 선택했다. 그는 방송 프로그램에 나가 이란-콘트라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널리즘의 선정주의를 지적하며 앵커에게 호통을 쳤다. 놀라운 건 이 방법이 먹혔다는 사실이며 그의 지지율은 상승했다.
여기서 1988년 미국 대선 최대의 미스터리 하나. 바로 민주당 후보 중 한 명이었던 제시 잭슨 목사에 대한 부분이었다. 사실 그는 여성 편력 문제가 심각했고 미국의 적인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아라파트와 포옹을 했으며, 마틴 루터 킹의 후계자라는 주장도 믿기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경선 과정에서 별 다른 스캔들에 휩싸이지 않았다. 어떤 이유일까? 저널에선 그의 사생활보다 그가 제시하는 이슈들이 훨씬 더 흥미로웠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흑인 사회의 거물인 제시 잭슨을 공격하다간 자칫하면 인종주의자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제시 잭슨은 그들에게 정치적 성역이었던 셈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