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씨와 김 씨가 정사갤에 올린 글들. 위가 백 씨, 아래가 김 씨의 게시글과 리플들.
사건 발생 6일 만인 지난 16일 백 씨는 살인을 저질렀던 장소에서 멀지 않은 부산 연제구의 한 고시텔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김 씨를 찌르고 도주하는 모습이 CCTV에 포착됐던 것. 그는 김 씨를 살해한 뒤 고시텔에 계속 숨어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백 씨와 김 씨가 처음 알고 지내게 된 것은 지난해 초 ‘디시인사이드’라는 인터넷 커뮤니티사이트의 ‘정치·사회 갤러리(정사갤)’라는 토론게시판을 통해서였다. 범인 백 씨의 주장에 따르면 두 사람은 정사갤에서 진보적 성향의 글을 함께 올리며 가깝게 지냈다고 했다. 그러다 4개월 전 피해자 김 씨가 돌연 보수적 성향의 글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둘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고 백 씨는 밝혔다. 둘 사이에 고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의 글과 반박 글이 오가다, 급기야 ‘김 씨의 사생활이 문란하다’ ‘고소하겠다’는 등 서로에 대한 원색적 비난과 인신공격까지 더해지면서 감정이 악화됐던 것. 결국 김 씨가 백 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사태까지 이르고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서 백 씨는 김 씨를 살해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백 씨는 경찰서에서 언론을 통해 “김 씨의 5·18 모욕과 전라도 비하에 상당히 거부감을 갖게 됐다. 5·18에 대한 역사 왜곡 때문에 살해를 하게 됐다”고 밝히면서 인터넷 게시판에서의 보수-진보 논쟁이 살인까지 불렀다는 쪽으로 비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건 소식이 전해진 후 일부 네티즌들 사이에서 이번 사건은 진보와 보수의 이념 갈등이 원인이 아니라 게시판 이용자 사이에 악플(악성댓글)과 스토킹으로 인한 개인적 원한에 의한 살인이었다는 의견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애초에 백 씨와 김 씨 모두 진보와는 거리가 먼 보수적 색채를 띠었다는 것. 백 씨는 정사갤 게시판에 자신이 사는 광주를 ‘종북좌좀의 도시’라고 부르는가 하면 “홍어들과 상종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 “조선족의 아버지 노무현” 등의 글을 올려왔고, 김 씨 역시 전라도를 욕하고 고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등 진보세력에 대한 비판을 올려 정사갤에서 주목을 받아왔다. 정사갤 게시판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다는 한 네티즌은 “디시인사이드 정사갤도 우경화된 지 이미 오래다. 그런데 백 씨와 김 씨가 처음엔 진보 성향이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정사갤에서 활동을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김 씨의 백 씨에 대한 진정서(왼쪽)와 백 씨의 친필 사과문. 노 전 대통령의 유서를 패러디한 형태로 진보진영 비하를 담고 있다.
이런 반응에 백 씨는 오히려 김 씨의 주소와 사진 등을 찾아내는 등 더욱 집요하게 사생활을 캐고 김 씨를 모욕하는 글을 올렸고, 결국 김 씨는 백 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법적인 문제로까지 불거지자 백 씨는 김 씨가 사는 부산까지 직접 찾아가 해운대 경찰서 앞 게시판에 친필로 적은 사과문까지 붙이며 용서를 빌었다(이 사과문 역시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유서를 패러디한 형태를 띠며 진보진영에 대한 비하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김 씨는 그것을 보고 오히려 “부산 해운대까지 와서 이러는 게 소름끼친다”며 고소를 강행하겠다는 의지를 밝혔고, 둘 사이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면서 살인에까지 이른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그렇다면 백 씨는 왜 자신을 진보성향이라고 밝히면서 정치적 이념 차이 문제로 살인을 하게 됐다고 밝혔을까. 경찰은 백 씨가 조사과정에서는 정치적 갈등 때문에 살해했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전했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경찰 진술에서 백 씨는 인터넷 게시판 상의 다툼으로 인한 살인이라고 했다”며 “방송 카메라 앞에서 백 씨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는 우리도 이해할 수가 없다”고 의아해했다.
또한 백 씨의 주소지에 대해서도 의혹이 제기됐다. 백 씨가 사는 곳은 광주라고 알려졌지만, 그가 과거 인터넷에 올린 글에는 ‘부산에서 두 시간 이내 거리에 산다’고 쓰여 있었다는 것. 백 씨가 김 씨를 살해하고 바로 광주로 달아나지 않고 부산 연제구의 고시텔에서 6일간 숨어있었다는 점도 납득하기 쉽지 않다. 이에 백 씨가 지역 갈등과 정치적 논쟁으로 사안을 확대하기 위해 광주라고 속인 것이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됐다. 경찰에서는 백 씨의 사는 곳에 대해 “개인 정보에 해당하고 아직 수사 중인 사안이라 확인해주기 곤란하다”며 말을 아꼈다.
한편 경찰은 백 씨가 사이코패스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고시텔에서 백 씨를 구속할 당시 그는 다른 범죄자들과 달리 범행에 사용한 흉기와 옷 등을 그대로 갖고 있었고, 범행 과정을 당당하게 설명하는 등 죄의식을 거의 느끼지 않는 모습을 보여 사이코패스를 연상케 했다”고 귀띔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