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인터뷰는 유우성 씨의 억울한 심경을 토로하는 자리가 아닌 간첩행위 의혹에 대한 청문회 형식으로 진행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일요신문>은 유 씨와의 수차례 접촉을 통해 그의 입장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동생 가려 씨와도 접촉해 남매의 입장을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이번 인터뷰는 그동안 자세하게 나온 유 씨의 억울한 심경을 토로하는 자리가 아닌 두 남매를 둘러싼 간첩행위 의혹에 대한 ‘청문회’ 형식으로 진행됐음을 밝혀둔다.
-1심에서 검찰은 당신의 여동생 유 씨(30)가 2012년 한국 입국 후 당신을 도와 대북간첩활동을 할 계획이었다고 주장했다. 그 증거로 검찰은 당시 유 씨가 북한 보위부 ‘상부선’과 연락했다는 연락처를 제시했다. ‘139-0433-◯◯◯◯’ 총 11자리 중국 휴대전화 번호인데 이 번호를 아는가.
“검찰의 수사지휘를 받은 국정원 측이 동생을 약 6개월간 감금 조사하는 과정에서 허위진술을 유도해 받아낸 번호다. 사실 이런 설명을 할 필요도 없이 그냥 그 번호를 눌러서 전화해보면 된다. 그 번호의 주인은 북한 보위부 인사가 아니라 중국 현지에 살고 있는 평범한 한족의 전화번호다. 통화해보니 최근까지 수년 넘게 그 번호를 써왔다. 그 대화를 녹취해서 재판부에 제출했다.”
-검찰은 그 번호로 전화 한번 걸어보지도 않고 북한 보위부의 것이라며 재판부에 증거로 제시한 건가.
“그렇다.”
-재판 과정에서 당신이 대북송금 업무에 종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2009년 외국환거래법과 전자금융거래법 위반혐의로 조사받았다는 게 사실인가.
“우선 그 업무를 전혀 한 적 없다. 다만 주변에 탈북자 친구들이 북한에 있는 자신의 가족에게 돈을 보내고 싶어 해서 그런 일을 하는 아는 친척 분에게 소개시켜준 일은 있다. 10년간 정확히 5명에게 도움을 줬다. 2009년 당시 국내 조사기관도 이 사실을 인정해 대북송금 업무 혐의에 대해서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당신의 가족이 ‘대북 브로커’라는 말도 나왔다. 어찌됐든 탈북자의 일상적 모습은 아니지 않는가.
“부모님은 ‘브로커’가 아니다. 중국에서 생활용품을 떼다가 북한에 소매로 파는 장사를 평생의 업으로 삼은 분들이다. 그러나 중국에 계신 친척 분들이 대북송금 일을 한 건 맞다. 사실 이게 어떤 일인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명칭처럼 그렇게 거창하지도 않다. 대북 송금 일이라는 게 북한의 대북 화교들과 북한 회사들도 많이 하는 흔한 일이다. 쉽게 말해 북한에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고 싶은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에게 돈을 받아 북한 현지 가족에 넘겨주는 일인데 저희 친척의 경우 여기서 10%의 수수료를 받은 걸로 알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북한과 중국을 왕복하실 수 있어서 소일거리 삼아 몇 번 친척의 부탁을 들어주셨던 게 전부다. 그마저도 2011년도 7월 건강 악화로 중국으로 이사하게 되면서 못하게 됐다.”
지난 15일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조작에 관한 설명회가 청계광장에서 열렸다. 이종현 기자
-대북 브로커가 돈을 많이 벌어들인다고 하던데 당신이 평범한 시민이라고 할 수 있겠나. 영국 어학연수 시절 프랑스 여행도 다녀왔다던데.
“2008년 영국에서 6개월간 세차장 일을 하며 알뜰히 생활했다. 내 평생 언제 돈이 있어서 유럽으로 가보겠는가. 귀국하기 전 그동안 모은 약소한 돈으로 기차를 타고 프랑스로 갔다. 기차를 타면 얼마 들지도 않는다. 굉장히 궁핍한 대학생 여행을 했다. 하루는 민박에서 자기도 하고 에펠탑 근처에서 노숙을 하기도 했다. 만약에 내가 부유했다면 프랑스만 갔겠는가? 바로 옆 스위스도 가고 싶고, 독일도 가고 싶고…. 이것저것 하고 싶을 때였는데 재정 여건으로 결국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어찌됐든 가족이 북한에서 중산층 이상이라고 들었다. 반면 당신은 연세대 편입 후 경제적인 형편이 어려웠다고 하는데 납득하기 어렵다.
“물가로 생각해야 한다. 아버지는 북한에서 돈을 벌었고 난 한국에서 산다. 한 때 내가 북한에서 의사로 일했을 때 한 달에 2만 원을 벌었다. 1년이면 20만 원이다. 의사는 북한에서 돈을 평균 이상으로 버는 직업이다. 아버지가 주로 하셨던 일은 도매업이었다. 아버지는 도매업으로 의사 월급에 못 미치는 수준의 돈을 번다. 반면 한국에서 한 달만 일해도 그보다도 더 많이 벌지 않는가. 가족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족이 북한에서 30평대 주택에 살았다고 들었다. 부동산이 있지 않은가.
“북한에서 35평대 주택에 산건 맞다. 중국으로 넘어올 때 350만 원에 팔았다. 북한에선 강남 아파트 격으로 볼 수 있는 40평대 고급 아파트가 250만~400만 원에 거래된다. 쉽게 말해 북한에 있던 가족들이 아파트를 팔아서 내게 돈을 부쳐줘도 한국에선 세 달도 못 버티는 값이다.”
-2004년 국내로 입국할 때 화교면서 굳이 탈북자로 들어온 이유가 무엇인가.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었다. 그리고 내 경우가 이례적인 케이스도 아니었다. 나처럼 정식 탈북자로 인정받거나 비보호 대상으로 살고 있는 대북화교가 이미 국내에 40여 명 있다. 이들 중에는 TV에 출연 중인 유명인도 있다. 나도 그 사람처럼 대북화교 신분으로 중국에서 몇 년 살다가 중국에서 탈북자로 인정받고 지금 한국에서 살고 있는데 왜 나만 법적으로 안 된다고 하는 건지…. 입맛에 맞으면 탈북자고 나처럼 입맛에 안 맞으면 탈북자가 아닌가. 더군다나 내가 들어온 2004년에는 국내 탈북자가 2000여 명도 안됐다. 탈북자의 정의도 명확하지 않았다. 북한이탈주민관련법에 따르면 나처럼 북한에서 태어나고 북한에 직업과 가족이 있으면 탈북자로 인정됐다.”
-그래도 북한 국적이 있어야 하지 않나.
“필요 없다. 대한민국 헌법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때문에 북한에 거주했던 사람을 탈북자로 간주해왔다.”
-화교의 신분을 속였다고 하여 도덕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한국에서 돈을 벌려고 온 건 아닌가.
“화교 신분이지만 북한에서 나고 자랐다. 한국말이 모국어이고 사상도 그렇다. 연세대학교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중국말을 배웠다. 한국과 중국이 축구경기를 하면 한국을 응원하는데 나는 그럼 어느 나라 사람인가…. 원래 전공대로 의대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내 실력에 맞춰 연세대학교 중문과에 왔고 현재 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돈을 벌려고 했으면 굳이 돈을 써가며 학교를 다닐 필요가 있겠나.”
-그렇다면 2007년경 중국 국적을 취득한 이유는 무엇인가.
“의도를 가지고 취득한 게 아니라 자연히 생긴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탈북하려면 중국을 거쳐야 한다. 나와 같은 화교들은 북한에서 쉽게 나올 수 있는데 대신 북한 측에 ‘다시는 북한에 안 올 것, 중국에서 영구 거주할 계획’이라는 신고를 해야 한다. 그렇게 중국으로 건너 와서 북한 여권을 반납한 후 중국 국적을 신청한다. 여기서 중국 국적은 바로 나오는 게 아니라 3년 정도 시간이 지나야 주민번호가 부여된다. 난 한국에서 살기 위해 2004년 중국을 거쳐 바로 탈북자로 한국에 들어왔다. 그 과정에서 북한 여권을 중국에 넘기면서 자연히 중국 국적 신청이 됐다. 자연히 시간이 지나 중국 국적이 생긴 것일 뿐이다.”
김포그니 기자 patronus@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