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참모진의 만류에도 사고 현장을 찾아 실종자 가족들과 즉석 간담회를 가졌다. 일부 실종자 가족들은 소리를 지르는 등 격앙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구윤성 기자 kysplanet@ilyo.co.kr
박대통령이 실종자 가족들과 즉석 간담회를 가진 것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이전에도 대형 참사가 발생했을 때 대통령들이 현장을 방문하고 실종자 가족들을 만나는 일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통령 일정이 그렇듯 이런 일정도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다. 대통령이 어느 장소에서 누구를 만날지, 해당 장소에 어떤 사람들을 들여보낼지 등을 사전에 정해놓지 않으면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돌발상황에 대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통령과 실종자 가족 간의 만남이라 해도 거친 언사가 오가는 일 없이 차분한 가운데 위로와 건의가 오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혀 달랐다는 게 청와대 관계자들이나 현장에서 지켜본 취재기자들의 일치된 주장이다. 청와대 민경욱 대변인은 실종자 가족과의 일문일답이 예정돼 있었는지에 대해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민 대변인은 “경호상 현장 상황이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보고를 받았고, 그래서 어려움이 많았다”며 “그래서 안 가시면 어떨지 했지만 대통령께서 ‘가기로 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더 이상 그 얘기를 하지 마십시오’라고 얘기했다”고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민 대변인은 “가더라도 그냥 가서 악수하고, 한 바퀴 돌고 나오는 것으로 돼 있었는데 ‘대통령께서 오셔서 말씀해 주십시오’라는 말에 돌아서서 올라가신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호실 등 참모진의 만류를 뿌리치고 박 대통령이 실종자 가족들과의 간담회를 강행했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간담회 현장에서 일부 실종자 가족들은 박 대통령을 향해 “여기가 어디라고 왔느냐. 가서 현장 지휘나 하라”고 소리를 지르거나 배석한 정부 관계자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등 격앙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아찔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박 대통령이 실종자 가족들과 직접 대화를 시도한 이유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들은 “도저히 참지 못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어이없는 참사가 벌어진 것도 문제이지만 사고 직후 구조자 숫자가 실제와 200명 이상 차이가 나는 등 정부 당국이 우왕좌왕하며 허둥대는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해 박 대통령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청와대의 다른 관계자는 “16일 오전 사고 소식이 처음 전해지고 점심식사를 하러 나갈 때까지만 해도 ‘큰일이 날 뻔했지만 다행히 잘 넘어가겠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 불과 1시간 만에 그게 잘못된 보고였음이 드러났다”며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관계자는 “안전사고도 그렇지만 사고 이후 대처는 전혀 다른 문제”라며 “사고를 낸 해운사뿐 아니라 초기에 잘못된 판단을 하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관계당국은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진도종합체육관에 모인 실종자 가족들. 일부는 바닷가에 나가 자식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등 실낱같은 희망을 끈을 놓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박 대통령이 ‘국민안전’을 얼마나 강조해 왔는지를 돌이켜 보면 이 관계자의 설명은 크게 과장된 것 같지 않다. 안전은 박 대통령이 대선공약 단계에서부터 주요 국정 목표로 설정했던 사안이다. 정부조직 개편 당시 “쓸 데 없이 헛돈을 쓴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기존의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개칭한 것은 그 시작에 불과했다.
원자력발전소 비리가 다시 터지자 박 대통령은 ‘발본색원’을 지시했고, 감사원은 대대적인 감사에 착수했다. 성폭력과 학교폭력, 가정폭력, 불량식품 유통을 ‘4대 사회악’으로 설정해 대대적인 척결 작업에 나선 것도 안전을 위한 조치였다. 지난해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개성공단 운영을 둘러싸고 남북이 갈등을 빚자 ‘공단 영구 폐쇄’ 위험에도 불구하고 체류 인원 전원 철수 결정을 내린 것도 안전과 무관치 않다.
한 새누리당 관계자는 “국민안전 정부라고 할 수 있는 박근혜 정부에서 대형 안전사고가 되풀이되는 것은 그야말로 통탄할 노릇”이라며 당혹감을 표했다. 공주사대부고 학생들의 사설 해병대 캠프 참사, 부산외대 학생들의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 참사 등이 잇따랐던 것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이 관계자는 “민간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하더라도 이런 식의 인재형 안전사고가 이어지는 것은 국가 전반적으로 기강이 해이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정부의 이미지를 악화시키고 결과적으로 국정운영에 큰 장애가 될 수 있다”며 “집권 초기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단행 등으로 인기를 끌었던 김영삼 정부가 ‘고난의 시기’로 들어간 것도 육·해·공과 지하에서까지 잇따라 터진 대형 참사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최근 잇단 안전사고 역시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박 대통령이 집권 2년차를 맞아 강한 규제 개혁 드라이브를 통해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예측불허의 인재가 계속 이어질 경우 국정운영의 초점이 흐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17일 오후로 예정됐던 ‘공공기관 정상화 워크숍’을 무기한 연기한 데 이어 18일로 예정됐던 ‘고용창출 우수 기업 대표 초청 오찬간담회’도 취소했다.
새누리당 원내 관계자는 “4월 임시국회에서 사실상 태업을 벌이고 있는 야당을 강하게 압박해 각종 법안들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인데, 이마저도 쉽지 않게 됐다”고 토로했다. 4월 임시국회가 별 성과 없이 끝날 경우 주요 법안 처리는 오는 11월쯤 돼야 가능하다. 6·4 지방선거로 인해 5~6월은 임시국회를 열기 어렵고, 7~8월에는 각 당이 새 지도부 선출에 몰두해야 할 상황이다. 9월부터 정기국회가 시작되지만 국정감사 등 정해진 일정들을 소화하는 데 한 달여의 시간이 소모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대응하기에 따라 이번 사태가 박 대통령에게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관측을 내놓는다. 한 정치평론가는 “박 대통령이 실종자 가족들을 만나 직접 대화를 나눈 것에 대해 국민들의 평가가 나쁘지 않다”며 “잘 하면 흐트러지는 민심을 다잡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