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녹슬지 않은 ‘철강왕의 꿈’ 정태수 전 회장이 한때 ‘분신’이라고까지 표현했던 한보철강. 마지막 재기를 노리는 그의 꿈이 과연 이뤄질지 주목되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이날 그는 “한보철강을 다시 살려내겠다”며 재기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지만, 뭇 시선은 여전히 한보 몰락의 ‘진실’이 무엇인지에 쏠려 있다.
지난 97년 나라를 들썩이게 했던 한보 부도 사태는 당시 검찰 수사와 두 차례에 걸친 청문회를 통해 정 전 회장 일가의 무분별한 사업 확장과 금융대출, 그리고 정치권으로 흘러들어간 거액의 비자금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정 총회장은 지난 99년 옥중에서 한보사태와 관련해 이른바 ‘YS 정권의 음모설’을 제기한 바 있다.
지난 21일 <일요신문>과의 단독인터뷰에서 정 전 회장은 “나 정태수 말고 한보철강을 살려낼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예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자신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정치권 비자금과 음모설에 대해서는 “난 지나간 일에 대해 남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우회적 수사로 답변을 대신했다.
지난 5월20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상가 3층의 전 한보그룹 회의실 기자회견장. 연단으로 향하던 정태수 전 회장의 걸음걸이는 다소 부자연스러워 보였으나, 불과 2년 전 뇌졸중과 암으로 쓰러졌던 기억을 되살리기 힘들 정도로 건강한 모습이었다. 다음날 오전 11시 기자가 사무실을 다시 찾았을 때 그는 걷기 운동을 하고 있었다.
정 전 회장은 기자를 보자마자 “어제도 오셨었죠. 반갑습니다”라며 녹슬지 않은(?) 기억력을 과시했다. 그는 “일부러 기자들은 따로 만나지 않아 왔는데, 이왕 오셨으니 간단히 차나 한잔하고 가시라”며 미리 선수를 치는 노련함도 보였다.
─어제 기자회견에서 밝힌 ‘한보철강 정상화 계획’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여론이 많은 것 같은데(정 전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사우디 은행으로부터 외자 4억5천만달러를 차입해 3개월 내에 부채 5천억원을 상환한 뒤, 우리 부자와 보광특수산업 소유의 토지에 아파트를 건설해 3년 내에 1조원을 현금으로 상환하겠다. 나머지 4조6천억원은 16년간 분할 상환하는 등 한보철강의 부채 총 6조1천억원을 모두 상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의심의 여지가 뭐가 있나. 어제 언론사에 배포한 자료를 통해 모든 근거 서류가 다 제시되어 있지 않나. 사우디 은행의 제안서, 회사의 재무정보, 또 나와 보광이 갖고 있는 토지 등기부등본 등. 이보다 더 확실한 근거 자료가 어디 있나.
어제의 기자회견은 자산관리공단과 채권인단에게 내 계획을 발표하고 호소하는 자리였다. 우리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곳이 있으면 거기에 주면 되는 것이고, 우리가 제일 좋은 조건이라면 우리에게 팔면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시장원리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다.
─문제는 여론인 것 같다. 그런데 어제 기자회견에 대한 여론이 썩 좋은것 같지는 않다.
▲난 그 반대로 본다. 아침에 모든 조간을 살펴봤다. 모두 어제 내가 밝힌 내용을 있는 사실 그대로 충실히 보도해 주었다. 난 사실 보도만 원할 뿐, 그 이상은 원치 않는다. 악의적으로 ‘정태수 네가 뭘 하겠느냐’ 하는 식의 보도는 하나도 없었다. 내 주장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줘서 고맙게, 또 고무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정 전 회장에 대해서는 정치권에 대한 로비를 펼친 기업인이라는 이미지가 여전히 깊게 남아 있는데.
▲과연 일반 국민들이 지금도 그렇게만 생각할까. 요즘 검찰에서 대기업을 향해 벌이고 있는 수사를 한번 보자. 차떼기다 뭐다 해서 삼성 LG 현대차 SK 등 대기업이 모두 수백억원씩 정치권에 뿌렸지 않나. 그 총액이 1천억원까지 올라가더라. 일류기업이라고 하는 대재벌들 역시 국내에서 기업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그런 정치권 로비가 불가항력적이었다는 것을 대변해주는 것 아니냐. 그런데 그들 기업의 총수 중 대체 누가 구속되고 기업이 몰락했나.
─한보가 정치권에 의해 희생양이 됐다는 생각을 여전히 갖고 있나.
▲그건 사실상 현 정치권에서 또 국민들이 인정해준 것 아니냐. 그래서 날 사면시켜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태수 한 사람을 사면시켜주기 위해서 많은 여론과 정서를 읽고 했을 것이다.
대통령이 누구냐. 대통령은 ‘신’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혼자서 결정한 것도 아니고, 노무현 당선자와 협의해서 날 사면시켜 준 것이다. 또 노 대통령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한번 실패한 기업인도 기회를 줘야 한다”라고. 난 그 말씀을 듣는 순간 큰 용기를 얻었다.
─정 전 회장이 다시 전면에 나서려는 움직임에 대해서 부담스러워 하거나 곱지 않게 보는 시선도 많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혹시 정치권이나 ‘상도동’에서 그런 분위기나 ‘압력’은 없었나.
▲그런 것 전혀 없다. 시대가 변했다. YS도 몰락했고, 이제 3김시대는 간 것 아닌가. 솔직히 이 정태수의 시대도 이제 갔다. 심지어 같이 골프 칠 사람 하나 없다. 모두 죽었거나 골골하다. 난 젊은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기반만 만들어주고 곧 물러날 것이다. 내 주변에도 젊은 일꾼이 많다. 여기 있는 이용남 사장(보광특수산업 대표)도 있고, 아들 정(보근) 회장도 있다.
─정 전 회장이 YS에게 92년 건넨 대선자금은 1백50억원이라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6백억원설, 8백억원설, 심지어는 1천억원설까지도 있는데.
▲안 그래도 내가 수감중일 당시 <동아일보> 김병관 회장 역시 수감 도중 치료를 위해서 내 병실 바로 옆에 있었다. 그때 김 회장이 날 위로한답시고 ‘정 회장이 8백억원이나 YS에게 대선자금을 줬는데 이렇게 구속시키는 것은 좀 너무하는 것 같다’고 하길래 내가 ‘여보, 제대로 알고 기자들한테 기사 쓰라고 하소. 8백억원이 아니고 1백50억원이오’ 하고 분명히 말해준 적이 있다.
92년 대선 당시 1백50억원이면 지금 시세로 치면 1천5백억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그런데 8백억원이라니. 한보 같은 회사가 무슨 수로 지금 화폐가치로 1조원에 가까운 돈을 대선자금으로 준다는 말인가. 정치권과 언론에서 뻥을 튀겨도 너무 튀긴 것이다.
─정 전 회장은 지난 99년 수감중일 당시 ‘YS 정권에 의한 한보 고의 부도’라는 이른바 ‘음모설’을 제기한 바 있는데.
▲그건 어제도 내가 얘기했다. 96년 총선에서 한 지역구의 야당 후보가 당진제철소를 가리켜 ‘저건 정태수 것이 아니라 사실상 YS 것’이라고 했다더라. 그 말에 YS가 발끈해서….
이젠 다 지나간 얘기다. 이제는 과거는 묻지 말고 앞으로의 일만 얘기하자. 나는 원래 지나간 일에 대해 남을 원망하고 그러는 사람이 아니다. 당시 일은 당시로 끝내야 한다. 원수를 갚기 위해 원수를 대물림하면 안되는 것 아닌가. 난 벌써 잊어버렸다. 아니 그것을 더 갖고 있으면 골수에 병이 든다. 내가 감옥 안에서 왜 암에 걸렸는지 아는가. 그것 때문에 병이 든 거다. 너무 분한 마음이 있어서. 이제 안 그럴려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