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외선생과 제자’ 기묘한 동거의 시작
이 씨가 권 군에게 정성을 쏟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 씨의 고등학교 단짝친구이자 사범대 동기인 김 아무개 씨(여)와 권 군이 ‘사귀던’ 사이였기 때문이다. 김 씨 또한 이 씨와 함께 J 고등학교로 교생실습을 나온 사범대 학생이었다. 경호원이 되고 싶다며 운동에만 몰두하던 권 군도 김 씨가 교생으로 온 이후 성적이 많이 올랐다. 김 씨도 권 군에게 제자 이상의 호감을 표하며 둘은 급격히 가까워 졌다. 권 군의 메신저 프로필에는 김 씨의 사진이 버젓이 올라오기도 했다. 김 씨와 권 군이 사귄다는 소문은 좁은 동네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임용고시를 앞두고 있던 김 씨는 자신의 의도와 달리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가자 당황했다. 교생실습을 통해 만나게 된 고등학생 제자와 교제했다는 사실이 권 군의 학교에 알려지는 날에는 자신의 임용도 장담할 수 없었다. 교생실습이 끝나고 고향인 인천으로 가게 된 김 씨는 강릉에 혼자 남은 권 군이 자신과의 사이를 발설할까 더욱 불안해졌다. 결국 김 씨는 권 군을 자퇴시키고 친구 이 씨에게 권 군을 맡길 계획을 세운다.
김 씨는 우선 자신의 삼촌을 가장해 권 군에게 자작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김 씨는 자작 메시지를 통해 ‘김 씨 삼촌인데 김 씨가 정신교란증이 왔다’며 ‘주사 안 맞는 날은 심하게 미쳐 보일 수 있다. 그런 날은 자살 못하게 데리고 있어야 한다’며 김 씨가 권 군과의 관계가 알려지면서 고통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문자를 받은 권 군은 자신이 한 여자의 인생을 망쳤다는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결국 권 군은 11월 자퇴를 하겠다고 선언한다.
권 군의 아버지는 <일요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처음에는 애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다는 식으로 말하며 자퇴를 하겠다고 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물론 아이 엄마, 이모, 학교 선생님이 나서서 자퇴를 말렸다”며 “나중에는 아이가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고 싶다며 검정고시를 보겠다며 자퇴를 하겠다고 했다. 아이 성적이 많이 올랐을 때였다. 그 때 이 씨가 자신이 공부를 돌봐 주겠다며 설득했다. 취업하러 간다는 것도 아니고 자식이 공부를 하겠다는데 끝까지 반대할 부모가 어디 있겠나. 어렵게 아들의 선택을 믿어줬다. 김 씨 때문일 것이라고는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부모님의 동의를 얻은 권 군은 강릉에서 김 씨가 있는 인천으로 오게 됐다. 하지만 김 씨는 이미 다른 남자가 생긴 후였다. 김 씨는 자신의 신변을 우려해 자신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친구 이 씨에게 권 군을 떠맡겼다. 이렇게 과외선생 이 씨와 권 군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됐다.
동영상에 등장하는 권 군. 피부에 화상을 입은 모습이다. 사진출처=SBS 방송화면 캡처
인천으로 온 권 군은 이 씨와 ‘학습동거’를 시작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김 씨를 보는 일이 거의 없자 권 군의 성적은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친구 김 씨를 위해 권 군의 공부를 도우며 불편한 원룸생활을 이어가던 이 씨도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다. 이 씨가 권 군과의 원룸생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권 군의 검정고시 합격밖에 없었다.
이 씨는 성적이 오르지 않는 권 군을 체벌하기 시작했다. 성적이 오르면 친구 김 씨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달콤한 말로 권 군을 설득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한 이 씨는 김 씨와 김 씨의 남자친구였던 안 씨에게도 체벌을 부탁했다. 8월 검정고시를 앞둔 5월부터는 체벌의 수위가 점점 높아졌다. 김 씨는 권 군을 너무 심하게 체벌한 것 같다며 우려하는 이 씨에게 “내가 벨트로 때릴 때는 피 더 나왔어”라며 “천장, 집, 욕실, 얼굴 죄다 피였어. 나 온다고 하면 벌벌 떤대”라며 오히려 이 씨의 폭행을 부추겼다.
# 권 군은 왜 도망가지 않았나
권 군은 키 172cm 가량에 몸무게가 100kg에 육박하는 건장한 체구였다. 더군다나 경호원이 꿈이었던 권 군은 태권도를 비롯한 운동을 꾸준히 해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될 가능성도 적었다. 그런 권 군이 어째서 이 씨와 김 씨의 폭력을 제압하지도 않고, 부모님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았을까.
범행에 사용된 골프채. 이 씨와 김 씨, 김 씨 남친 안 씨도 폭행에 가담했다.
실마리는 김 씨가 권 군에게 보낸 문자에 있었다. 권 군이 여전히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김 씨는 권 군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나 너무 서글퍼. 날 좋아하는 게 조금이라도 진심이라면 공부 열심히 해서 시험 붙어서 나랑 인천서 살자”라고 구슬렸다. 김 씨의 꾐에 넘어간 권 군은 원룸을 찾아오겠다는 부모님도 극구 만류했다.
권 군의 아버지는 “왜 부모가 아들을 찾아가려고 하지 않았겠나. 이 씨에게 주소를 물어보면 알려주지 않아 아들에게 물어보면 한참 있다 ‘공부에 방해되니 인천에 오지 말라’는 답만 돌아왔다”며 “이 씨를 믿고 아들에게 하숙비와 생활비만 매달 보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돈도 아들은 한 푼도 쓰지 못하고 김 씨가 모두 가져 간 것을 알게 됐다”고 토로했다.
# 의문스러운 이 씨의 범행동기
또 하나의 의문점은 권 군과 동거했던 이 씨의 범행동기였다. 이 씨는 권 군과 특별한 사이도 아니었고 권 군을 떠맡으면서 얻는 이익도 없었다. 이 씨는 어째서 권 군의 성적에 그토록 병적으로 집착하고 권 군을 무자비하게 폭행한 것일까.
이 씨는 권 군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두 개의 냄비에 있던 4리터가량의 끓는 물을 권 군의 얼굴과 몸 전체에 들이부었다고 털어놨다. 사진출처=SBS 방송화면 캡처
이 씨는 경찰수사 초기부터 줄곧 자신의 단독범행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 씨의 문자내역과 통화기록을 검토한 결과 김 씨와 김 씨의 남자친구인 안 씨가 사건에 깊숙하게 개입돼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김 씨와 안 씨도 ‘인천 과외 제자 살인사건’의 공범으로 지난해 7월 추가로 구속기소 됐다.
이후 이 씨가 권 군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의 중심에는 김 씨가 있었다는 정황이 곳곳에서 발견됐다. 이 씨는 김 씨에게 지나치게 의존적인 모습을 보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김 씨와 친구였던 이 씨는 김 씨의 옷과 말투를 따라 하기도 했다. 이 씨가 사범대로 간 것도 친구 김 씨와 함께 대학을 가기 위해서였다. 권 군을 떠맡은 것도 김 씨의 부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씨를 조종한 사람은 김 씨 외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었다. 2009년 김 씨의 소개로 만나 교제를 시작했다는 ‘원이’라는 인물이었다. 이 씨는 ‘원이’의 말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원이’가 뚱뚱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에 이 씨는 몸무게를 일부러 늘렸다. 권 군의 검정고시가 가까워지면서 ‘원이’는 “권 군이 검정고시 합격 못하면 야쿠자가 저의 어머니 죽일 거래요”라는 황당한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원이’의 문자에 극도로 불안해진 이 씨는 결국 권 군에게 끓는 물까지 붓게 됐다고 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씨가 4년간 교제했다는 ‘원이’를 실제로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미국 유학중이라 문자연애밖에 할 수 없었다는 ‘원이’는 다름 아닌 김 씨가 만들어낸 가상인물이었다. 인천 연수경찰서 형사팀 관계자는 “이 씨는 1심 재판 초기까지도 모두 자신이 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김 씨를 끝까지 보호하려는 모습이었다”며 “둘 사이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차를 탈 때도 마치 주종관계처럼 김 씨가 뒷좌석에 타는 식이었다”며 “김 씨가 만들어낸 가상인물인 ‘원이’가 실재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설명해도 이 씨는 전혀 믿지를 않았다. ‘원이’가 만들어낸 야쿠자 이야기도 진짜라고 믿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검찰은 재판이 시작되기 전인 지난해 8월 “범행동기 등을 확인하기 위해 프로파일링을 실시한 결과 이 씨와 김 씨가 보통 사람들과 다른 성격적 장애가 있을 수 있다고 분석된다”는 발표를 하기도 했다.
‘원이’가 김 씨가 만들어 낸 가상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이 씨는 조금씩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이 씨는 결국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던 10월경 김 씨와 안 씨도 권 군을 폭행했으며 김 씨가 자신에게 권 군이 자신을 성폭행한 것처럼 옷을 벗고 동영상을 찍으라고 한 사실을 털어놓게 된다.
# 이 씨 징역 7년, 김 씨 징역 2년
재판부는 심신미약 상태에서 벌어진 범행이라는 이 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 씨의 범행 경위와 수법, 범행 전후의 행동과 기타 정황 등을 검토한 결과 사건 당시 심신 미약 상태가 아니었다고 본 원심 판단에는 잘못이 없다”고 밝혔다.
이어 재판부는 김 씨와 안 씨에 대해 “피해자에게 세정제를 먹이려고 하거나 벨트 등을 이용하여 피해자의 팔, 등 부위, 엉덩이, 허벅지 등을 때리는 등으로 피해자를 폭행하거나 피해자에게 치료일수 불상의 상해를 가한 사실은 인정된다”면서도 “피고인들이 피해자에게 가한 것으로 인정되는 위 상해와 피해자의 사망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
사건의 전말 끓는 물 들이붓고 성폭행범 누명 씌워 지난해 6월 29일 인천 연수구의 한 원룸에서 권 아무개 군이 숨진 채 발견됐다. 화장실에서 알몸상태로 발견된 권 군은 얼굴과 온몸에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권 군과 동거하며 과외 교습을 하던 이 씨가 이틀 전 권 군에게 끓는 물을 들이부어 생긴 화상이었다.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은 권 군은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방치돼 있다 끝내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당시 원룸에 있던 이 씨는 경찰에 체포돼 순순히 범행을 자백했다. 하지만 이 씨는 이틀 전 새벽 2시께 권 군이 갑자기 옷을 벗기며 성폭행을 시도하려고 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가스레인지 위에서 끓고 있는 물을 부었다며 정당방위라고 주장했다. 이 씨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라며 권 군에게 물을 들이부은 직후 촬영된 동영상 하나를 건넸다. 이 씨가 건넨 동영상은 숨진 권 군이 발견될 당시 권 군에게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던 이 씨의 지인 안 씨가 찍은 동영상이었다. 안 씨가 찍은 동영상에는 권 군이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속옷만 입고 화장실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서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동영상에는 권 군을 향해 이 씨가 “나 죽을 뻔했어. 보리차 안 끓이고 있었으면 나 죽을 뻔했어. 성폭행 당할 뻔했어”라며 울부짖는 목소리가 담겨있다. 권 군은 계속해서 “옷 안 벗겼습니다. 저는 그냥 진짜 당했죠”라는 말을 반복한다. 이 씨의 지인이 촬영한 동영상은 권 군이 갑자기 “누나가 먼저”라고 대답하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그런데 의문스러운 정황이 곳곳에서 발견됐다. 이 씨가 지인인 안 씨와 주고받은 휴대전화 메시지 등을 분석한 결과 이 씨가 권 군에게 뜨거운 물을 들이부은 시점은 이 씨의 주장처럼 ‘27일 새벽 2시’가 아니라 ‘26일 오후 3시’였다. 또 100kg이 넘는 체구의 권 군이 아무 저항 없이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고도 이 씨가 휘두르는 골프채에 맞고 있었다는 점도 미심쩍은 부분이었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인천연수경찰서 형사팀 관계자는 “일선에 있는 형사들은 피의자가 자백을 하면 ‘자백을 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이 씨는 달랐다”며 “이 씨는 자백을 하면서도 무엇인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피의자들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자백을 할 때 보이는 태도 변화도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못하고 있다는 느낌에 프로파일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결국 이 씨는 경찰 수사 6일 만에 “권 군이 내가 원하는 대로 공부하지 않아 뜨거운 물을 붓고 폭행했다”며 “성폭행 시도는 없었다”고 털어놨다. 경찰은 구속기한 10일을 남겨두고 받은 이 씨의 진술을 토대로 이 씨를 상해치사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