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전명규 한체대 교수는 빙상연맹 부회장 자리에 올랐다. 당시 전명규 교수는 쇼트트랙의 대부로 명성이 높았다. 지도자 추천을 잘 활용해 안현수 선수 등 자신이 선택한 한체대 출신 선수를 연거푸 스타로 만들면서 입지를 다져온 그였다. 허나 쇼트트랙은 더 이상 한 사람의 힘으로 좌지우지되지 않을 만큼 저변이 확대된 상태였다. 경쟁 학교에서도 쟁쟁한 선수가 많이 배출됐다.
전명규 교수는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고개를 돌렸다. 최대한 많은 한체대 출신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가 경기에 나설 수 있도록 판을 뒤바꾸기 시작했다. 전현직 빙상연맹 관계자와 국가대표 선수, 한체대 관계자의 증언, 내부 문서에 따르면 전 교수는 이때부터 ‘기획 민원’으로 정적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불만을 가진 선수의 이야기를 구체적인 민원 서류로 만들어 빙상연맹에 투서한 뒤 이를 토대로 정적을 도마 위에 올리는 방식이 사용됐다.
# 전명규식 기획 민원
빙상연맹 관계자에게 입수한 문건에 따르면 2013년 12월 전명규 교수는 당시 자신의 제자에게 한체대 출신 국가대표 A 선수의 민원 서류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민원 서류는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지도자가 편파적인 방식으로 내가 팀 추월 경기에 나가지 못하게 방해했다. 지도자는 비한체대 출신으로 자신의 출신 학교 제자를 밀어 넣어 입상실적을 올리려고 했다”는 내용으로 1차 작성됐다.
A 선수는 대회 전 팀 추월 후보로 이름을 올렸지만 실제 경기 땐 지도자의 출신 학교 선수가 후보 자리에 앉았었다. A 선수가 팀 추월에 앞서 5000m를 이미 탔었고 경기 전날 1만m를 탄 탓이었다. 지도자는 “A 선수가 계속된 장거리 경기를 치러 체력적으로 정상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실적에 급급했다면 내 제자를 후보가 아닌 주전으로 넣었을 거다. 주전은 모두 한체대 선수였다”고 밝혔다. 당시 팀 추월에 출전했던 주전 3명은 모두 한체대 출신이었다. 모두 부상 없이 팀 추월을 탔고 후보에겐 기회가 돌아가지 않았다.
1차 민원 서류는 빙상연맹 스포츠공정위원인 한 대학 교수에게 전송돼 정교화 과정을 거쳤다. 이 교수의 첨삭을 거친 민원 서류는 다시 전명규 교수의 제자에게 전달됐다. 제자는 이를 출력해서 빙상연맹에 제출했다. 전명규 교수는 제자가 민원을 제기하도록 지시했고 민원을 처리해야 할 빙상연맹 담당 위원에게 첨삭을 맡겼다. 모두 짜인 각본이었던 셈이었다.
이런 민원은 내부의 정적 제거 외에 빙상연맹과 하부 조직 장악, 한체대 저변 늘리기에 사용됐다. 2013년 제94회 전국동계체육대회 참가요강과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모집요강, 2012년 말 대학연맹 회장 입후보자 추천인 관련 민원은 모두 전명규 교수의 지시로 작성됐다. 민원이 제기되기 전 방향성이 제시됐고 민원은 정확한 시점에 제기됐다.
# 전명규식 언론 플레이…안현수 겨냥 보도지침
기획 민원은 특정인의 개인정보 취득과 언론 플레이로 진화했다. ‘일요신문’이 입수한 빙상연맹의 한 고위 관계자 관련 서류에는 한 인물의 개인정보와 이력, 약점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이 서류는 정보기관에서 흔히 쓰는 정보보고 형태를 띠었다.
정보보고 형식으로 만든 기자 제공 자료
맨 앞에는 ‘기자에게 전달할 사항’이라는 언론보도지침까지 자세히 적혀 있었다. 치밀했다. 전명규 교수는 ”자신의 이름이 기사에 나오지 말게 할 것“ ”기자에게 서류를 주지는 말 것, 보여주기만 할 것“ ”기자에게 보여준 서류는 파기할 것“ 등을 자료 작성했던 사람들에게 기본 지침으로 내렸다.
안현수 선수를 중심으로 언론 보도 방향이 정해졌다. 서류 위에는 ‘현수=선, 교수=악’이라는 당시 상황과 함께 ‘현수 이용, 현수가 앞장서 러시아 5명 형편 없는’ ‘이슈메이커 현수’ ‘현수=이중국적’ 등 안 선수를 음해할 때 사용될 단어가 적혀 있었다. 또한 ’탐사보도 의도가 보이고. 기사 방향. 같이 무리 엮어서 = 계속 엮어서, 2개 → 7개 → 15개‘ 등의 언론보도 밑그림도 나와 있었다.
안현수 선수뿐만 아니었다. ‘국민의 영웅으로 부각되는 한 빙상 선수의 타락’이라는 문서는 은퇴를 앞둔 한 빙상 선수를 겨냥해 만들어졌다. 확인되지 않은 개인의 사생활 문제가 적시된 문서였다. 이 문서는 현 국가대표팀 지도자의 친구가 작성했다고 나타났다. 타락했다고 묘사된 빙상 선수는 당시 전명규 교수의 특정 선수 밀어주기 교육 방침을 반대했던 선수였다. 한 인터넷 매체가 보도했던 기사 가운데 이 서류에 나왔던 내용과 일치하는 부분이 발견됐다. 이 매체는 최근 노선영 선수가 팀 추월 따돌림 사태에 대해 입장을 내놓지 않는다는 식으로 비판 기사를 계속 내 왔다.
자신과 등돌린 국가대표 선수의 확인되지 않은 사생활은 이런 식으로 언론에 전달됐다.
# ‘낭인’ 전명규가 빙상연맹과 국가대표팀을 장악한 방법
2014년 전명규 한체대 교수는 소치 동계올림픽 부진 등을 이유로 빙상연맹 부회장 자리에서 내려왔다. 버티기 쉽지 않았다. 성적 부진을 넘어 러시아로 귀화했던 안현수 선수가 맹활약하자 급격히 악화된 여론도 전 교수를 향했던 탓이었다. 빙상연맹 부회장 자리에선 내려왔지만 그의 빙상연맹 개입은 끝나지 않았다.
빙상연맹 관계자에 따르면 전명규 교수는 빙상연맹 밖에서도 빙상연맹 분과위원이 된 제자라도 생기면 끊임 없이 빙상연맹 행정에 개입했다. 분과위원회 안건은 위원회에 앞서 위원 전체에게 전송된다. 전 교수는 이 안건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어떤 식으로 밀고 나가야 할지 세세하게 지시했다고 알려졌다. 빙상연맹 내부 자료는 전명규 교수 손으로 계속 전달됐다. 2016년 5월 스포츠공정위원회 회의 결과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앞으로 보내는 빙상연맹 운영 혁신 방안은 모두 전명규 교수 손으로 들어갔다. 지도자 선임도 개입했다. 2015년 4월에는 한 외국인 코치에게 ”내가 도움을 주겠다. 네 의견을 연맹에 전하겠다. 연맹이 접촉토록 하겠다“는 식으로 직접 영입 의사를 전달하기도 했다. 기존의 외국인 지도자였던 에릭 바우만 감독을 밀어내려 했던 정황도 나왔다.
에릭 바우만 감독과 전명규 교수의 골은 깊었다. 훈련 방식이 달랐던 탓이었다. 자신의 강도 높은 체력훈련을 버티는 선수만 총애했던 전 교수와 달리 에릭 바우만 감독은 개개인의 심박수를 일일이 확인하고 일대일로 세심한 훈련 방식을 지정해 선수를 이끌었다. 휴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국가대표팀 훈련이 자신의 지도 방식과 달라지자 전 교수는 에릭 바우만 감독을 보좌하던 국가대표팀의 한 지도자에게 자신이 하달한 총평을 읽도록 지시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빙상연맹 관계자는 ”전명규 감독의 조교이자 국가대표 코치가 에릭 바우만 감독의 훈련 방식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우리나라의 문화가 있고 우리나라의 특성이 있다며 외국인 지도자더라도 한국 선수들은 한국 방식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식의 비판이었다. 우린 경기가 끝나면 다 같이 경기를 복기하는 총평을 함께 했었는데 에릭 바우만 감독은 선수 개개인을 불러다가 피드백을 줬다. 그걸 가지고 ’이곳은 개인의 생각으로 움직이는 곳이 아니고 너의 행동은 선수촌을 무시하는 행동이다. 밴쿠버 동계올림픽 성과는 우리 방식이 증명된 대회였다. 너는 지도자로서 능력이 부족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에릭 바우만 감독의 얼굴이 검붉게 변했었다“고 전했다.
전명규 교수는 에릭 바우만 감독 평가와 계약해지 관련 비용 등 세부 내용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에릭 바우만 감독 관련 빙상연맹 내부 서류가 전 교수 손에 입수된 상태였던 까닭이었다. 에릭 바우만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백철기 감독이 에릭 바우만 뒤를 이었다.
백철기 감독은 전명규 교수보다 선배지만 전 교수의 방향을 잘 따르는 감독이었다고 전해졌다. 백 감독은 김보름 선수를 밀어 주려 2017년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직전 박지우 선수에게 김보름 선수 페이스 메이커를 부탁한 바 있었다. 거절당하자 박 선수에게 소리지르며 폭언을 가했다. 또한 백 감독은 이승훈 페이스 메이커 요청을 거부한 주형준 선수를 매스 스타트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도록 했다.
김보름과 이승훈 선수는 한체대 빙상장에서 전 교수에게 개인훈련을 받는 선수였다. 익명을 원한 전직 국가대표 선수는 ”백 감독은 전 교수에게 ’살려달라‘는 문장이 담긴 장문의 문자를 보낸 바 있었다. 전 교수는 이 문자를 받은 뒤 껄껄 웃으며 선수들 앞에서 자랑하듯 보여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전명규 교수가 낭인일 때도 국가대표팀은 전 교수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2017년 2월 그는 별다른 명분 없이 빙상연맹 부회장으로 복귀했다.
# 전명규가 자신의 체제를 선전하는 방법
전명규 교수가 자신의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이용했던 대상은 빙상연맹과 한체대뿐만 아니었다. 삼성도 이용했다. 삼성에 몸을 담갔었던 전 교수가 삼성과의 친분을 자주 자랑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삼성 팔이‘는 국제빙상연맹으로까지 향했다. 빙상연맹 관계자가 제공한 문서에 따르면 2016년 6월 크로아티아에서 열린 국제빙상연맹 총회 때 기술위원 자리를 노렸던 전 교수는 국제빙상연맹 관계자에게 ”자신이 삼성 관계자를 이미 만났고 삼성 휴대전화 선물도 받았다“는 발언을 했었다.
삼성뿐만 아니었다. 전명규 교수는 2013년 대한항공에 취업 청탁도 넣었다는 의혹도 있다. 대한항공은 빙상단을 운영하고 있으며 한체대 출신 이승훈과 모태범이 소속돼 있었다. 당시 청탁 받은 것으로 지목된 승무원은 현재 대한항공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관련 기사)
빙상연맹과 한체대, 주요 대기업까지 입에 자주 올리는 전명규 교수는 학부모에게 절대적 존재가 됐다. 기업의 지원이 몰리고 메달을 따게 해줄 수 있다는 장밋빛 꿈에 빙상 새싹들은 한체대 앞으로 모여 들었다. 전명규 교수의 줄을 잡으려는 지도자들 역시 전 교수 앞으로 몰렸다. 전 교수는 자신의 팔 안에 들어온 이들을 감싸고 돌았다. 여자 선수 성추행 의혹에 휘말렸던 한체대 지도자는 아직까지도 한체대에서 일하고 있다. 자신이 가르치는 선수와 연인 관계를 맺었던 한 코치는 고등학생 2명에게 폭행과 폭언을 가했는 데도 여전히 한체대를 지키고 섰다.
한체대 빙상장은 기자를 반기지 않는다.
’일요신문‘은 전명규 교수의 해명을 들으러 학교를 여러 번 찾았다. 최근 전명규 교수는 학교를 나오지 않고 있다. 교수 연구실 명패에서 이름이 사라졌다. 한체대 빙상장 현관문 앞에는 ”본교 빙상장은 교육시설입니다. 학교의 승인을 받은 후 취재하시기 바랍니다“라는 팻말이 붙었다. 전 교수의 연구실이 있는 2층은 출입금지였다. 어렵사리 만난 전명규 교수는 ”일 마무리되고 뵙겠습니다“라고 말한 뒤부터 ‘일요신문’의 연락을 받고 있지 않다.
전명규 교수실의 이름이 지워진 명판
빙상계에서 전명규 교수의 위세는 대단하다. 빙상연맹에서 의사결정이 필요한 안건이 떨어지면 전명규 부회장이 대부분 구두로 결정을 짓는다고 알려졌다. 한 빙상연맹 관계자는 ”회장의 의중을 물어야 한다고 전 교수에게 말하면 ’회장이 뭔데? 내가 알아서 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난 청룡장 받은 사람이다. 뭔 짓을 해도 안 잡혀간다‘는 말도 자주했다“고 전했다. 그는 전명규 교수가 가장 많이 말하는 문장이 꽤 뇌리에 박힌다고 전했다. ”너희들이 빙판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이 또한 지나 갈 거야.“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