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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발굴독립운동가 정용선 선생에 대한 사연

정병기 2014-08-22 조회수 2085
미발굴독립운동가 정용선 선생에 대한 사연
일제강점기에 군자금 관련 독립운동을 하시다 경성형무소에 투옥되어 옥사
 
증조부님 정용선 선생의 경성형무소 수형기록이나 옥사기록 재판관련 자료를 요청하오니 관심 가져 주시길 바랍니다. 올해는 8.15 해방을 맞은 광복 68주년이자 3·1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난 지 94주년이다. 그러나 미발굴독립유공자의 명예를 드높이고 그 후손들의 한 풀어주어야 할 중요한 때이지만 해결되지 않은... 요연한 현실로 답답하기만 하다. 정부 당국은 미발굴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에 대하여 최소한의 예우와 조치가 있어야 하며 이는 선열에 대한 기본적 예의다.방치된 미발굴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 지금도 가슴치고 눈물 흘리고 있다는 사실 알아야 합니다. 올해가 건국 61주년이자 광복 제65주년을 맞으며 3·1운동 제91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이다. 여기저기서 행사계획과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지만, 문제는 많이 남아있다. 진정으로 대한민국의 친일문제가 청산되었는지와 진정한 광복과 해방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3·1 민족정신의 계승과 과거사는 반드시 제대로 정리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대충 덮어놓고 잘해보자는 식의 과거사 정리는 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이는 애국선열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본다. 암울했던 민족의 암흑기인 일제 강점기에 나라의 주권을 되찾으려고 동분서주하신 애국선열과 미발굴독립유공자들에 대한 넋을 기리고 그들을 위한 나라 잃은 국민의 독립운동과 민중봉기를 일으킨 항일독립정신을 높이 기리고 평가하며 재정립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현재까지 독립운동가 자손들의 상당수가 배움의 길에서 멀어진 지 오래고 가난 때문에 먹고 사는 일에 매달려야 하는 형편이다. 일제강점기하에서는 독립운동가의 가족이란 이유로 감시와 멸시 그리고 온갖 천대와 모진 박해를 받으며 살아야 했는데 지금도 힘겹게 사는 자손이 많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조상이나 선조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여유가 없다. 오늘도 일부 자손들이 관련 자료발굴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많은 자료가 소실되거나 소각처리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난 이후라 찾기란 매우 어려운 현실이 되고 말았다. 독립운동 관련 문서는 역사적 문서로 반영구적인 보존서류임에도 그 중요성이 인식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고 개탄스럽다.
 
후손들이 자손된 도리 다하지 못해 가슴치며 눈물 흘리는 눈물은 한이 맺인 피눈물이라는 사실이다.
 
몇몇 자손들이 조상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거증 자료를 찾아 동분서주하지만, 관련 자료는 누군가에 의해 없어지거나 6·25전쟁 중에 사라진 경우가 많다. 자손들이 자력으로 찾을 수 있는 자료는 그저 전해오는 말이거나 제정 호적에 형무소 수형기록이 있는 것이 전부이다. 그럼에도, 해당부처인 국가보훈처에서는 독립유공자임을 인정받아 명예회복을 하고자 하는 후손들에게 상세한 거증 자료나 수형인 명부나 당시의 재판서류 등 무리한 자료를 요구하는 현실이다. 이제는 후손들에게 자료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정부가 가족들에게 아님을 반증하는 자료를 내 놓아야 하지 않을까 반문하고 싶은 심정이다.
 
더 늦기 전에 이제는 국가가 직접 나서고 서둘러야
 
독립유공자 후손들에 대한 예우를 국가가 마땅히 나서야 하지만 오늘날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다는 게 8·15 광복절이나 3·1절 행사에서 애국선열과 호국영령을 위해 묵념하는 게 전부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일회성 겉치레 행사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영혼을 편히 쉬게 할 수 있는지 반문하고 싶다. 그리고 시신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영혼들이 눈도 못 감고 구천을 맴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저승에서라도 그들의 자손들이 이렇게 돌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구천을 맴도는 혼령 자신도 아마도 가슴을 치고 통분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3·1절이나 8·15 광복절이 진정한 민족의 광복절이 되도록 하려면 3·1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친일역사 청산과 독립유공자 발굴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더불어 해외의 관련자료 수집을 위한 노력도 절실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독립운동가 명예회복과 자손들에 대한 관심이 급선무이며, 이제는 후손들에게만 맡겨 놓을 것이 아니라 정부가 앞장서 부처 간 유기적이고 과학적인 자세와 노력으로 자료발굴을 진행해야 한다. 이제 91여 년이 흐른 현재 경성형무소에서 오로지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위해 일제와 투쟁하다 해방을 맛보지 못한 채, 한 많은 생을 마감한 미발굴독립운동가들에게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져 하루빨리 명예가 회복되고 예우의 길이 열리기를 간절히 바라며 나라가 어려울 때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되는 자세와 노력이 뒤따르게 되기를 아울러 바라고 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하여 35년이 지난 장년의 나이가 된 국가유공자입니다. 저의 사연을 다시 보내오니 한번 살펴 주시고 저의 소망인 증조부 명예회복이 될 수 있게 도움을 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국민적인 관심과 공감대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정부당국은 자료가 전쟁이나 그 이후 정부가 관보나 행정명령으로 소각하거나 폐지하여 놓고 수형자료 없다고 미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선조의 명예회복을 거절하는 현실에 대하여 매우 유감스럽고 안타깝게 생각한다.지금도 미발굴독립유공자들의 잊혀진 명예를 찾기 위해 갖은 고생과 노력을 경주하며 떠 다가오는 제65주년 광복절을 맞는다. 지난 35년간 증조부의 항일운동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정병기(정용선의 증손자 /경성형무소 옥사자)는 나홀로 외로운 투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올해로 광복 65주년을 맞았지만 과거사 정리 작업은 여전히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 독립적 국가기구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전후, 광복 후 권위주의 통치시까지 항일독립운동과 해외동포사, 민간인 집단 희생 등의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을 진행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실질적인 성과는 기대에 못미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역대정권마다 과거사 문제는 가장 껄끄러운 문제로 치부되거나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현 정권에서도 친일인명명단 공개와 관련해 “친일문제는 공과를 균형있게 봐야한다”한다거나 대일관계에서도 실리외교를 표방하며 “일본에 과거사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발언하는 등 과거사 정비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내비쳤다. 이처럼 과거사 정리 작업이 걸음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친일파들은 여전히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반면 일제강점기 시대에 항일운동을 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그 공을 인정받지 못한 채 과거 속에 묻혀 있다. 그러나 정부가 이들을 외면하는 동안에도 미발굴독립유공자들의 행적을 찾기 위해 남은 그 후손들은 자료가 있을만한 고이면 어디든지 찾아다니며 추적하고 있다. 저의 증조부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시다 옥사하셨지만 근거자료가 부족해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정씨는 근거를 찾기 위해 30년째 노력을 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정씨는 증조부의 독립운동을 증명하기 위해 애써왔지만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독립운동가에 대한 증빙자료 발굴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공여방송인 kbs1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호소도 해본바 있다.
 
정병기(57)는 증조부인 정용선 선생의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이 잡듯 뒤져 경성형무소(현 서대문형무소)에 옥사했다는 기록이 담긴 호적을 비롯한 관련 자료를 찾아냈고 주변인들의 증언을 확보했지만 국가보훈처는 미흡하다고 하며 거증자료를 요구하고 있는 현실이다. 증조부는 일제시대 군자금 모금 벌이다 경성형무소에 투옥돼 숨졌다. 제정호적과 주변인들 증언 등 항일운동 행적 드러났음에도 보훈당국은 외면…수형인 명부 정부에 의해 소각돼” 분개하고 있다. 증조부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군자금 모금 운동을 한 혐의로 악명 높은 경성형무소에 투옥돼 숨을 거뒀다. 이는 일본형무소장인 일본인이 제정호적에 형무소 옥사내용이 기록돼 있다. 증조부로 인해 우리 집안은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았고 이를 견디다 못한 일가족들이 그의 이름을 족보에서 파냈고, 증조모를 개가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곧 발각돼 증조모는 굶어 죽었고, 조부는 탄광에서 일하다 폐병으로 사망했다. 아버지는 머슴살이를 전전하다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등 기구한 인생을 사셨다. 제정호적과 주변인들의 증언 등 증조부의 항일운동 사실이 명명백백한데도 보훈당국은 구체적인 죄목이 적힌 수형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지난 35년을 하루 같이 증조부의 항일행적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해온 정병기는 “광복 65주년이 무색할 만큼 항일운동을 했던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발굴작업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독립운동가들의 모든 자료를 보존하고 발굴하는 것은 국가의 몫인데 그 자손들에게 독립운동 사실을 직접 입증하라고 하는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라고 성토하고 있다. 정용선의 증손자는 증조부의 명예회복에 이처럼 발 벗고 나서는 것은 다분히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그는 경찰관으로 복무하던 중 1980년 강도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칼에 찔려 국가유공자인 상이군경회원으로 연금을 받고 있다. 더욱이 증조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된다 하더라도 증손자인 자신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없다. 정병기는 “증조부님의 행적을 찾아다니면서 보상금 때문이라는 둥, 미쳤다는 둥 오해를 많이 받았다”고 그간 마음고생을 많았다. 그는 “솔직히 경제적으로 힘들게 사신 아버지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궁극적인 이유는 증조부의 명예회복”이라며 “한국의 진정한 독립은 이를 위해 희생한 수많은 미발굴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발굴이 이뤄질 때 참의미가 있기 때문”이라는 신념을 피력했다.
 
나의 민원제기에 대한 국가보훈처의 답변은 매우 소극적이다.
 
나의 민원에 대해 봉화군은 증조부의 수형인 명부가 형의실효등에관한법률에 의해 폐기됐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그 자료를 가지고 정부의 당시 관보도 찾아냈다. 그가 증조부인 정용선 선생의 발자취를 본격적으로 찾아 나선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조상들의 성묘조차 갈 여건이 안됐지만 정씨의 아버지는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그를 데리고 경북 봉화군에 있는 묻혀있는 증조모에게 성묘를 갔다. 그러나 증조부의 산소가 없는 것을 보고 그 연유를 물었고 아버지로부터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 투옥된 후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된다. 어린 나이였지만 막연하게나마 증조부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면서 증조부를 찾기 위해 친인척들에게 편지를 보내 당시 상황을 물었고 기구했던 가족사를 알게 됐다. 친인척들 및 주변인들의 증언과 30년간 증조부의 발자취를 찾아다닌 끝에 그가 밝혀낸 정용선 선생(1883년~1928년)의 행적은 이렇다.
 
증조부인 정용선 선생은 1983년 12월17일 경북 봉화군 춘양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0년대 초부터 1916년까지 고향인 경북 봉화군을 중심으로 의성, 풍기, 울진, 영덕, 영주 등지에서 군자금 모금운동을 벌였다. 만주에 있는 독립군에게 돈을 보내기 위해 친일파의 집을 털고 일본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이렇게 모은 돈은 척곡교회(1909년 설립, 2006년 6월19일 등록문화재 제257호로 지정) 창립자 김종숙 목사와 논의해 독립군에게 보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당시 거부들이 모여 살았던 충북 청주군(현 청원군) 양성면 도원리에서 만석군의 집을 털다 발각돼 1년 만에 다시 경북으로 도망을 나왔다. 그러다 1916년 갑자기 종적을 감췄고 10여년이 지난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통지서 한통만이 날아왔다. 증조부의 독립운도을로 일가친척들은 일제로부터 모진 감시와 탄압 그리고 박해를 받았으며 큰댁의 경우는 반신불수나 고막이 터져 평생을 듣지 못하고 살았다고 한다. 정씨는 “친인척분들이나 주변인들 모두 증조부님이 군자군 모금 운동을 했다고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다”며 “당시 경성형무소는 항일운동을 했던 애국지사들이 투옥된 던 곳으로서 고향이 경북인 증조부가 경성으로 압송됐다는 사실만으로도 항일운동을 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군자금 모금 운동의 근거지였던 척곡교회의 김종숙 목사의 손자 김명성(86)씨도 “조부로부터 정용선 선생과 함께 군자금 모금활동을 한 바 있다고 들었다”고 인우사실 증명서를 써줬다고 주장했다.
 
김명성(86)씨는 인우사실 증명서를 통해 “척곡교회는 독립운동을 하는 동지들의 비밀 결사 장소로 활용되었다. 군 자금 모금은 관내 친일파나 지역거부들의 집이 대상이었는데 야간에 침입해 금품을 강탈, 폭력을 행사하여 수탈하였고 소나 가축 등 금품환전이 가능한 모든 것들이 대상이었다고 조부로부터 들은 바 있다”고 말했다. 또한 김씨는 정용선 선생이 군자금 모금 운동은 물론 일본군과의 항일 전투에 참가해 싸우던 중 체포됐다고 증언했다. 그에 따르면 정용선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군 자금 모금 과정에서 일제 헌병과 경찰과 수차 격돌한 바 있고 관공서 습격과 방화 등을 수시로 시도했다고 한다. 또한 의병대장 석태산과 함께 재산전투에 참가해 동지들과 전투를 직접하며 항전했다는 것. 그러나 물자부족과 병력의 열세로 패해 후퇴, 석태산 의병장 가족은 강원도 평창 그리고 교회로 피신시키고 석태산, 정용선, 김명림 등 잔여병력은 소백산으로 이동 침입하여 병력을 재정비했다고 한다. 이후 군자금 모금 운동을 계속하던 중 일본군의 간교(만나 협상 요청)에 의해 협상장에서 체포되어 석태산 의병장은 현장에서 처형당하고 정용선은 소백산에서 체포돼 경성으로 압송된 후로는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는 것. 함께 전투에 참여했던 김명림은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0년을 복역하고 만기 출소 후 독립운동본거지인 척곡교회로 돌아와 조부와 함께 거주한 사실이 있다고 전했다.
 
김씨는 정용선 선생의 가족 상황에 대해서도 소상히 증언했다. 그는 “정용선의 가족들은 일제의 모진 박해와 고문으로 어려움을 겪은 바 있고 정용선의 처에 대해 집안 일가친척의 주선으로 개가하였다는 사실을 인근 주민으로부터 듣고 확인했다”고 말했다. 정용선 선생과 달리 김명림씨는 수형인 명부에 기록이 남아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 이제는 뒤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서둘러서 정부가 독립유공자 발굴해야한다. 척곡교회 창립자 김종숙 목사의 손자 김명성씨가 써준 인우사실 증명서와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기록이 담긴 일제시대 제정호적등을 수시로 국가보훈처에 제출한바 있다. 정씨는 김명성씨의 증언처럼 증조부의 항일운동 여파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일제는 수시로 찾아와 감시와 고문 등의 탄압을 일삼았고 이를 견디다 못한 집안어른들이 증조부를 족보에서 파내고 증조모의 이름을 ‘박열이’에서 ‘정열이’로 고친 후 야밤에 40리 떨어진 인동장씨 집안으로 개가시켰다는 것. 그는 그 근거로 인동장씨의 호적에 기록된 증조모의 이름 ‘정열이’를 제시한바 있다 제정호적과 인동장씨 호적을 살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일제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밀착 감시와 탄압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하기 어렵다고 본다.
 
정병기는 기구했던 가족사를 설명한다. 누가 그것을 이해해주나? 한숨밖에 안나온다. 증조부는 슬하에 딸과 아들을 두었으나 딸은 병으로 죽고 아들(조부 정덕수)은 증조모를 따라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인동장씨 집안은 모진 박해를 받았고 증조모는 초가집에 감금되어 굶어죽었다. 조부는 집을 나와 큰아버지집 근처의 광산에서 일을 했는데 그곳에서도 여전히 일본군의 엄한 감시를 받았다. 조부는 결국 광산에서 일을 하다 폐병으로 사망했고 당시 7살이었던 아버지(정건순)는 5살인 남동생을 데리고 남의 집 머슴살이와 공사판을 전전하다 어머니를 만나 데릴사위로 들어가 살게 됐다는 것이다. 정씨는 “아버지는 배움이 없어 글을 모르신다. 증조부를 시작으로 계속된 일제의 탄압은 해방된 오늘날까지도 깊은 생체기가 되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며 “이는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친일파 후손은 부와 권력을 누리고 독립유공자 후손은 가난과 배고픔에 허덕이는 부조리한 현실 때문”이라고 울분을 터뜨렸다. 그는 이러한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자 오랜 세월동안 물불을 가리지 않고 증조부의 행적을 추적해갔는지도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증손자인 나는 지난 35년간 증조부의 활동근거지로 알려진 경북 봉화군 일대의 모든 면사무소를 비롯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경찰관으로 복무하는 도중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수 십리를 오가며 기록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결과 10년이 흐른 후에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기록이 담긴 호적과 당시 봉화군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벌인 독립군 명단을 입수했다. 또한 증조부 생존 당시 소년이었던 90대 노인의 증언도 확보했다. 국가보훈처 “독립운동 사실 검증돼야 서훈 추서” 하겠다고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보훈당국은 “구체적인 죄목이 담긴 수형 자료가 없어 독립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정씨는 포기하지 않고 1989년부터 수형기록을 찾기 위해 법무부와 경찰청, 국사편찬위원회 등에 민원을 제기했다. 하지만 “관련자료가 없다”는 답변만 되돌아왔다. 이에 봉화군에 증조부의 수형기록을 요청했고 “수형인 명부는 형의실효 등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폐기됐다”는 답신을 받았다. 정씨는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이 담긴 중요한 자료를 어떻게 국가에서 소각할 수 있느냐”며 “정부가 자료를 없애놓고 그 후손보고 그것을 찾으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는 추적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법무성과 미국 국무부 문서보존소에 도움을 요청, 미국 의회도서관에 편지를 보내 수형인 명부가 들어있는 마이크로필름 500장을 200달러를 지불하고 구입했다. 그러나 증조부의 항일행적을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2005년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증조부의 독립활동을 인정해달라는 민원을 제기했으나 이 역시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없다”는 답변만 할 뿐이었다. “정부는 미발굴 독립유공자에 대해 관심이 없지만 이분들의 땀과 희생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며 “할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개인으로서는 할 수 있는 만큼 다 했다. 국가가 계속 외면한다면 향후 행정소송 등 법정싸움도 불사하였지만, 국가보훈처는 “객관적인 자료가 검증돼야 서훈을 추서할 수 있다”던 기존입장에서 일보 진전된 반응을 보이기는 했으나 큰 변화는 없다고 본다. 그는 “당시 이슬처럼 간 혼령들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후손들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이제는 정부가 미발굴독립유공자 찾기에 나서주길 바라는 입장이다. 나의 증조부님께서는 경북을 중심으로 봉화 의성 풍기 울진 영덕 영주 등을 중심으로 군자금 관련하여 독립운동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변에 일본군과 충돌 할 때에도 참가하셨다는 증언이 새롭게 나온 만큼 일대 당시 전투가 벌어졌거나 격돌했던 사건에 대하여 살펴주셨으면 하며, 일대 제산전투에도 참여했다는 얘기가 있다.
 
일제 때 경북경찰에서 발간이 된 수사지침서인 "고등경찰요사"를 깊이 살펴보면 당시 경북지방에서 얼마나 많은 독립운동이 일어났으며 일제에 항거하며 대항했으며 검거되었는지 여부를 잘 알 수 있다고 본다. 증조부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증언들에 의해 새롭게 밝혀진 것들이 있답니다. 경북 봉화군 척곡리 척곡교회(금년 102주년 되는 교회)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이곳 척곡교회가 독립운동 관련 군자금운동의 봉화의 본거지라고 생각이 됩니다. 많은 관련 자료들이 교회역사니 기록물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 관심을 가져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척곡교회를 지키고 계시는 분이 당시 김종숙목사님의 손자 김영성(86) 장로님 부부이십니다. 김종국목사는 중국의 간도와 관련이 있고 현재 경북 봉화군 법전면에 소재한 교회에도 명동서숙이라는 간판이 사용되어지고 있다. 당시 소중한 교회역사를 포함한 많은 소중한 자료들이 보존되고 있으며 교회관련 기독신문에도 교회가 소개되기도 했답니다. 이곳이 해발 350m 고지에 위치해 있고 천혜의 독립운동가들이 은신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곳에서 군자금이 모금되어 교회를 통하여 독립군에게 전달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증조부(정용선)의 호적 주소는
 
성명:정용선 다른 이름은 족보에 의하면 정재열. 정차용 가명은 여러개가 있다고 하는데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출생년월일:서기1883년12월17일생(명치16년12월17일생)
 
본젹지:경북 봉화군 춘양면 도심리 391번지
거주지:대정3년 충청북도 청주군 양성면 도원리3통1호
 
대정4년 경북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7통10호
경북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 1062번지
전국을 무대로 독립운동(독립자금 군자금)을 담당 하였다고 함 .
 
사망기록: 제정호적에 소화3년5월20일 오후3시20분 경성형무소 감방(서기1928년5월20일 오후3시20분 사망)형무소에서 통지하여 호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부가 요구해도 소각한 관련 서류는 후손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정말 이제는 정부가 나서서 나라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받친 고귀한 희생에 대한 예우와 명예회복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되어야 당연지사이고 대한민국이 앞으로 국가의 난국을 극복하는데 국민적인 동참과 애국심을 발휘하는데 크게 기여하는 전기가 마련되고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글쓴이/정병기<미발굴독립유공자 정용선의증손자>
 
http://www.youtube.com/watch?v=xSxb0IcQq1U
KBS 독립운동가 기록찾기 30년의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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