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자이언츠 팬들이 열띤 응원전을 펼치고 있다. 최준필 기자
#팬이 내보낸 감독
KIA 선동열 감독은 프로야구 포스트시즌이 한창이던 지난달 말 자진해서 사퇴했다. 2012년 고향팀 KIA 감독으로 부임한 선 감독은 임기 3년 동안 팀을 한 번도 포스트시즌으로 이끌지 못했다. 첫 해에만 5위로 ‘선방’했을 뿐, 그 후 2년 연속 8위에 그쳤다. 평소였다면 당연한 수순으로 여겨졌을 수 있다. 이 사퇴가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따로 있다. 불과 6일 전 선 감독이 구단과 2년 재계약을 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구단은 선 감독에게 ‘4강’이 아닌, ‘리빌딩’이라는 새 과제를 맡겼다. 성적에 신경 쓰지 말고 팀을 재건해달라고 했다. 선 감독도 “열심히 해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팬들이 용납하지 않았다.
연임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팬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구단에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재계약 철회 릴레이’가 열렸다. 한 팬은 서울 양재동에 있는 현대-기아자동차 본사 앞에서 선 감독의 사퇴를 요구하는 1인 시위를 펼쳤다. 선 감독은 이례적으로 직접 팬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해 구단 홈페이지에 게재하는 고육지책까지 썼다. 소용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광주 지역 언론에서 “선 감독이 군입대를 원하는 안치홍에게 ‘임의탈퇴’ 얘기까지 꺼내며 말렸다”는 보도가 나왔다. 민심은 더 들끓었다. 선 감독 본인은 물론 가족들에게까지 협박성 전화와 문자 메시지가 쏟아졌다. 결국 선 감독은 의지를 접었다. “재신임을 받은 후 고민을 많이 했지만, 지금 물러나는 게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팬들에게 사과 인사를 전하고 떠났다.
#팬이 불러온 감독
선 감독이 사퇴한 다음날에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또 다른 감독이 팬들의 뜻에 따라 지휘봉을 잡았다. 한화가 새 사령탑으로 김성근 전 고양 원더스 감독을 선임한 것이다. 김응용 감독의 2년 임기가 끝난 한화의 감독 교체는 예견된 일이었지만, 시즌이 끝날 때까지만 해도 양상은 달랐다. 한화의 새 감독으로는 내부 인사의 승격이 유력하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감독 후보 두 명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거론됐다. 그런데 그 후 여론이 예상 밖의 방향으로 흘렀다. ‘보살’로 소문났던 한화 팬들이 “바닥까지 내려간 팀을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김성근 감독의 힘이 꼭 필요하다. 내부 승격은 절대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김 감독을 한화로 영입하라는 청원 동영상을 직접 제작해 인터넷에 올렸고, 역시 공식 홈페이지와 포털사이트에서 김 감독 영입을 바라는 서명운동을 펼쳤다. 그 가운데 한 팬도 서울 장교동 한화그룹 본사 앞에서 1인 피켓 시위를 펼쳤다. 이 1인 시위는 김성근 감독이 새 사령탑으로 결정되는 데에 실제로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팬들의 목소리는 감독 결정의 절대적 권한을 쥐고 있는 한화 그룹 오너 일가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한화 그룹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윗선에서 ‘도대체 김성근이라는 감독이 어떤 인물이기에 팬들이 저렇게까지 원하는지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그리고 김 감독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화 유니폼을 입었다. 한화 팬들이 모이는 게시판은 “우리가 해냈다!”며 축제 분위기가 됐다. 심지어 다른 구단 팬들의 축하 인사까지 받았다.
KIA팬이 선동열 감독 퇴진을 요구하는 1인 시위(맨 왼쪽), 한화팬이 김성근 감독 영입을 요구하는 1인시위와 김 감독 부임에 108배를 올리며 환영하는 모습.
#팬이 바꾼 사장
이뿐만 아니다. 롯데 팬들은 감독을 넘어 사장까지 바꿨다. 롯데는 시즌이 끝난 뒤 프런트 일부 인사와 선수단의 극렬한 대립 속에 사상 최악의 내홍 사태에 휘말렸다. 이 과정에서 롯데 대표이사가 선수단의 원정 숙소 CCTV 감시를 지시했던 사실이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이른바 ‘불법 사찰’이다. 안 그래도 연일 분노하고 있던 롯데 팬들이 끝내 들고 일어났다. 부산 시내 주요 장소에서 경영진과 프런트 주요 인사 사퇴를 요구하는 피켓 시위가 펼쳐졌다. 롯데 구단 사무실이 있는 사직구장에는 팬들이 보낸 근조 화환이 여러 개 배달됐고 삭발까지 감행하는 팬들도 있었다. 언론의 잇단 포화에도 꿈쩍하지 하던 대표이사는 팬들의 반발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국회의원까지 진상조사에 나서자 결국 사직서를 냈다. 곧바로 단장도 함께 물러났다.
프로야구는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다. 구단도, 감독도, 선수들도 입을 모아 “팬들이 주인”이라고들 한다. 애초에 프로야구단은 대기업들의 마케팅 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팬들의 의사를 전혀 무시할 수가 없는 구조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사장, 단장, 감독을 비롯한 구단의 주요 인사에는 팬들의 의사가 개입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구단주를 비롯한 그룹 고위층의 취향과 의견에 따라 결정되곤 했다. 올 시즌이 끝난 뒤 세 구단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그만큼 이례적이라는 의미다.
롯데팬들이 부산 시내 주요 장소에서 경영진과 프런트 주요 인사 사퇴를 요구하는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이고 근조 화환을 설치했다.
#팬의 단체행동, 어디까지 용인되나
물론 이전에도 팬들이 구단에 청원 혹은 반대 의사를 전달하려는 시도는 여러 차례 있었다. 특히 최근의 팬들은 즉흥적으로 개인의 감정을 분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조직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움직인다. 2011년 김성근 감독이 SK에서 시즌 도중 경질되자 팬들은 연일 문학구장에 과격한 플래카드를 걸어 놓고 프런트를 규탄했다. 심지어 경기가 끝난 뒤 1000여 명의 팬이 그라운드로 난입했다. 마운드까지 올라와 자신들이 입고 온 SK 유니폼을 모아 놓고 불을 질렀다. ‘김성근 감독 없는 SK를 거부한다’는 뜻으로 펼쳐진, 사상 초유의 유니폼 화형식이었다. 결국 20여 분이 지나 소방차가 그라운드로 들어온 후에야 팬들의 행동이 진정됐다. 이뿐만 아니다. 2010년에는 LG팬들이 잠실구장 중앙출입문 앞을 막아선 채 당시 감독에게 청문회를 요구하기도 했다. 감독은 서슬 퍼런 팬들의 기세에 결국 밖으로 나와 모자를 벗고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팬들이 벌이는 단체 행동의 규모는 이런 식으로 점점 커진다. 각 구단 홈페이지 팬 게시판은 물론, 여러 야구 커뮤니티와 SNS 등이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면서 더 그렇게 됐다. 팬들은 점점 더 단합된 목소리를 내고, 그 의견은 최고 결정권자에게까지 전해진다. ‘팬심’의 위력이 믿을 수 없이 커졌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런 현상에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한 구단 홍보 관계자는 “최근의 분위기라면, 온라인에서 활동하고 있는 극히 일부 팬들의 의견이 전체 팬들의 뜻인 것처럼 잘못 알려질 위험이 있다”며 “물론 팬들의 뜻을 구단 운영에 적극 반영하는 것은 환영하지만, 자칫하다 팬들도 ‘이렇게 하면 구단이 우리 뜻을 받아주는 구나’ 싶어 점점 더 과격하게 대응할 위험도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어차피 구단과 팬들은 공생하는 관계다. 팀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은 모두 같다”면서 “팬들이 미처 볼 수 없는 구단 안팎의 사정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무작정 팬들의 뜻에만 따라 팀을 운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좀 더 구단을 믿고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봐 주시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고 토로했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달라진 관중석 문화 백태 여성팬 음지서 양지로… 야구장 관중석은 더 이상 전쟁터가 아니다. 치열한 승부는 그라운드 안에서 펼쳐질 뿐, 팬들은 응원단장의 리드에 따라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야구를 즐긴다. 출범 초기부터 지금까지, 관중석 문화는 끊임없이 변신해왔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야구장에 여성팬들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최준필 기자 잠실구장이 개장하기 전, 프로야구가 동대문구장에서 열렸던 1982년은 이전에 아마 야구에 열광하던 골수팬들이 도시락을 싸와서 먹곤 하던 시절이었다. 프로야구가 지역 연고제에 바탕을 뒀던 터라, 야구장은 고향 선후배들과 모교 동창들을 만나던 장소였다. 열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팬들의 욕설 응원도 심했다. 상대 선수들이 심판에게 하소연을 할 정도였다. 또 선수들이 밤마다 술집과 나이트클럽을 많이 찾았던 때라 유흥업소 종업원들도 종종 보였다고 한다. ‘영업’과 ‘외상’ 대금 수금을 위해서다. 그 후에는 지역감정의 시대가 이어졌다. 영남과 호남, 롯데와 해태, 연세대와 고려대로 대변되는 라이벌전이 무척 뜨거웠다. 롯데 최동원과 해태 선동열의 맞대결이 유독 관심을 모았던 이유도 이 세 가지 조건이 모두 부합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여성팬들의 열정도 대단했다. 그러나 예전에는 야구장 안보다 밖에 더 많이 출몰했다. 한 야구인은 “당시 야구장은 음주와 폭언, 고성이 자주 오가는 장소라서 지금처럼 야구를 보러 오는 여성팬들이 많지는 않았다. 다만 선수들을 연예인처럼 흠모하는 골수 여성팬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때로는 그 애정의 도가 지나치기도 했다. 이 야구인은 “여성팬에게 인기가 좋은 선수와 룸메이트로 지냈는데, 밤마다 방에서 수십 통의 전화를 받았다”며 “몇몇 극성팬들은 아예 원정 숙소로 쓰는 호텔에 숙박을 하면서 은밀하게 자신의 방 번호를 알려주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요즘은 더 많은 여성팬이 ‘양지’인 관중석에서 야구를 즐긴다. 여성 관중이 증가하면서 프로야구는 연일 역대 최다 관중을 경신할 수 있게 됐다. 1990년대까지의 야구장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응원 문화도 등장했다. 개인이 만든 피켓이나 현수막으로 팀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다. 선수 개인 별로 다른 응원가도 생겼다. 일부 선수들의 응원가는 타 구단 팬들까지 외워 부를 정도로 유명하다. 한 선수는 “만원 관중이 찼을 때 내 응원가가 크게 울려 퍼지는 것을 들으면,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기분 좋은 전율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은] |
화제 모은 눈물의 팬들 이들이 있기에…선수는 행복합니다 요즘 프로야구 TV 중계 카메라들은 자주 관중석의 팬들을 자세하게 잡아준다. 선수들의 플레이에 환호하는 미모의 여성팬, 함께 왔지만 서로 다른 유니폼을 입고 앉아 있는 커플, 독특한 응원 피켓이나 의상을 준비한 팬이나 외국인 팬이 주된 타깃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시청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은 응원하는 팀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팬들의 얼굴이다. 그 눈물에 해당 팀의 사연이 배어 있다면 감동은 더 커진다. ‘눈물녀’ 민효정 씨 시구 장면. 사진제공=한화 이글스 이때 화면에 잡힌 민 씨는 한화의 승리가 임박한 순간부터 하염없이 울기 시작했다. 개막 이후 힘들었던 한화팬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눈물이었다. 한화 구단도 감동했다. 다음날부터 그 팬의 정체를 수소문해 민 씨라는 사실을 알아냈고, 사흘 뒤인 대전 두산전에 시구자로 초청했다. 민 씨의 곁에서 함께 울고 있었던 홍미해 씨도 시타자로 나섰다. 한화 프런트는 한동안 책상 위에 민 씨가 울고 있는 사진을 올려놓고 일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구단을 생각해주는 팬들의 마음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였다. 올해 6월 10일 광주에서 열린 한화-KIA전에서는 ‘KIA 눈물남’이 화제였다. 양 팀이 끊임없는 시소게임을 펼치면서 도합 31점을 뽑은 경기였다. 11-9로 앞서던 KIA가 8회초 3점을 내줘 11-12로 역전 당하는 순간, 한 남성팬이 안경을 벗으며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화면에 크게 잡혔다. KIA가 다시 8회말 15-12로 재역전을 한 후에는 다시 이 팬이 하늘이 떠나갈 듯 함성을 지르며 기뻐하는 모습이 등장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경기는 다시 9회초 한화의 4득점과 함께 16-15로 뒤집어졌다. 카메라는 다시 이 남성팬을 비췄다. 그는 어처구니없는 패배에 분노하는 대신, 정말 분하다는 듯 엉엉 울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후에는 눈물 맺힌 얼굴로 박수를 쳤다. 요즘 팬들의 열정을 그대로 반영한 장면이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