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지법 제3형사부(재판장 박형준 부장판사)는 지난 17일 특수강도강간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된 정 아무개 씨(32)에 대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경찰에 따르면 정 씨의 첫 번째 범행은 2001년 5월 22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남 창원의 한 원룸에 침입한 정 씨는 집안에 있던 여성 두 명을 흉기로 위협해 차례로 성폭행했다. 그리고 이것을 시작으로 정 씨는 2001년 5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경남 일대를 주무대로 수많은 부녀자들을 유린해왔다. 총 43차례에 달하는 그의 파렴치한 범행에 희생된 부녀자만도 57명이나 된다. 하지만 정 씨를 검거하기까지는 무려 7년이 넘게 걸렸다.
경찰이 처음 신고를 접수한 것은 2001년 7월 중순이었다. 단순 강간사건으로 여긴 경찰은 동종수법전과자 등을 상대로 주변 탐문수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범인은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2년여의 시간이 흐른 2003년 말 마산의 한 경찰서는 수사를 진행하다 범인이 연쇄강도강간범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파악하기에 이른다. 그간 접수된 동일수법의 범행 10여 건에서 채취된 체액이 한 사람의 것으로 판명됐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속칭 ‘마창 발바리’로 명명되던 범인에 대해 경찰의 본격적인 추적이 시작됐다.
하지만 수사는 쉽지 않았다. 보통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들은 신고 자체를 꺼릴 뿐 아니라 경찰서에 방문해서도 쉽사리 피해사실을 털어놓지 않는 경향이 있다. 특히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피해자들은 지속적인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을 정도로 심각한 불안감과 두려움을 호소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이 사건을 파악하는 자체부터 녹록지 않았다.
조사결과 드러난 피해상황은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피해자들은 10대 소녀부터 40대 부녀자 등 연령별로 다양했다. 범행장소는 주로 여성 혼자 지내는 원룸이 많았으나 일반 가정집도 상당수였다. 공통적으로 드러난 사실은 범인이 복면을 쓴 채 침입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피해여성들은 범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특히 얼마 후부터는 범인은 새벽시간뿐 아니라 대낮에도 아파트에 침입해 주부를 상대로 범행을 저지르는 대담함을 보였다. 그는 피해자들이 수치심 때문에 신고를 하지 못할 것을 알고 복면을 벗고 범행을 저지르기도 했으며 범행 후 집안을 뒤져 금품을 훔쳐가기도 했으나 피해자들은 극한의 공포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인상착의조차 거의 기억해내지 못했다.
경찰을 더욱 경악하게 한 것은 범인의 짐승만도 못한 파렴치하고 비열한 범행수법이었다. 일반적으로 성폭행범들은 야심한 시각에 여성 혼자 있는 집을 골라 범행을 저지르고 달아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피해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범인은 같은 장소에서 2~3명의 여성을 동시에 성폭행하거나 자매를 번갈아가며 유린하는 잔악함을 드러냈다. 때문에 피해자들은 친구나 언니, 친동생 등이 지켜보는 앞에서 끔찍한 일을 당하거나 당하는 것을 버젓이 지켜봐야 했다. 또 범인은 흉기로 제압했기 때문에 피해여성들은 감히 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범인은 주부를 상대로 범행을 저지를 때는 함께 집안에 있던 어린 자녀들을 볼모로 잡는 비열함도 보였다. 피해자가 반항할 경우 피해자의 아기를 베란다 밖으로 던지겠다거나 흉기로 찌르겠다고 위협했던 것. 피해를 당한 주부들은 범인이 자녀들에게 위해를 가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어린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입에 담기 힘든 성적 유린을 당해야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피해자들의 삶은 그날 이후 완전히 엉망이 됐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은 아예 불가능했다. 동네에 이상한 소문이라도 날까 노심초사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은 어디에 하소연조차 하지 못한 채 이중삼중의 고통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범인은 발바리라는 별명처럼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범인 정 씨의 신원이 경찰 수사망에 포착된 것은 지난해 12월. 첫 신고를 받은 지 무려 7년 5개월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피해자 중 한 명이 경찰조사에서 “범인이 새벽 시간에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고 진술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피해자의 토대로 기지국 수사를 한 경찰은 정 씨의 실체를 파악, 대구에서 잠복한 끝에 지난해 12월 정 씨를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체포되기 직전 정 씨는 자살을 기도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 담당자는 “자신이 범인으로 지목되고 경찰 수사가 좁혀오자 정 씨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자살로 사건을 종결시키려 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정 씨는 동거녀와 부모님에 대해서는 각별한 생각을 갖고 있었고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한편 범인 체포가 늦어진 것과 관련 경찰의 소극적인 대응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경찰이 연쇄성폭행사건임을 인지하고서도 그동안 수사본부를 차리지도, 공개수사로 전환하지도 않는 등 소극적인 대응이 사건을 키우지 않았냐는 것. 다시 말해 경찰이 초기부터 공개수사 등으로 적극적인 수사를 진행했다면 주민들도 경계심을 가졌을 것이고 추가 범행을 상당 부분 막을 수 있었을 거라는 주장이다.
연초인 1월 7일 강도강간 등으로 기소된 정 씨는 1월 말부터 4월 24일까지 여섯 차례 재판을 받았고 지난 17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강간 혐의 피의자에게 법원이 무기징역을 선고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경우다. 이에 대해 경찰 관계자는 “여성에게 있어 강간은 살인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간 파렴치한 성폭행을 저질러도 3~5년 정도 살고 나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번 판결은 성폭행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은 자신의 왜곡된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어린 소녀에서부터 40대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연령의 고하를 막론하고 무차별적인 성폭력 범죄를 저지르는 등 그 범죄의 수법이 너무나 대담하고 흉악하다”며 무기징역을 선고하게 된 배경을 밝혔다. 재판부는 또 “정 씨가 같은 장소에서 여러 명의 여성을 성폭행하고 언니 앞에서 여동생을 성폭행했을 뿐 아니라 피해자가 저항하자 어린 자녀들을 아파트 베란다 밖으로 던지겠다거나 흉기로 찌르겠다고 협박하는 등 인간으로서 상상하기 어려운 범죄를 저질렀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정 씨에 대해선 “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과시욕이 있고 변태적인 성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여성을 성적 도구로 왜곡해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며 “정신병력은 없으나 충동성 조절능력이 매우 약하며 ‘간헐적 폭발성 장애’가 의심된다”고 판단했다. 정 씨는 법정에서 범행 일체를 자백하고 깊이 뉘우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성폭력 전과가 없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우리 사회가 피고인을 포용하기에는 그 위험성이 너무도 크다고 판단된다는 것이 재판부의 설명이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