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코미디언 빌 코스비가 과거에 수십 명의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작은 사진은 코스비가 주인공을 맡았던 1980년대 최고 인기 시트콤 <코스비 가족>. 로이터/뉴시스
1984년 첫 방송을 시작으로 1992년 종영될 때까지 미 NBC의 최고 인기 시트콤이었던 <코스비 가족>은 미국인들에게는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드라마였다. 흑인들이 주인공인 드라마가 히트를 했다는 점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도 처음으로 흑인 중상류층(아빠는 의사, 엄마는 변호사) 가정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는 점은 파격 그 자체였다.
주인공 클리프 헉스터블 박사 역을 맡았던 코스비 개인에게도 이 드라마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시트콤 자체가 자신의 이름을 딴 데다 극중 딸 넷에 아들 하나를 둔 5남매의 아빠라는 점도 실제 현실에서의 자신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니 시청자들이 훈훈하고 인자한 헉스터블 박사와 코스비를 동일시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때문에 시트콤이 끝난 후에도 코스비는 미국인들에게 늘 ‘이상적인 아빠’이자 ‘모범적인 남편’ 1순위로 꼽히곤 했다. 그 누구도 코스비의 사람됨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코스비 가족> 속의 주인공이 바로 코스비의 진짜 모습이라고 여겼으며, 그렇게 코스비는 흑인들의 우상이자 전체 미국인들의 롤모델로 자리 잡았다. 지난 2009년에는 코미디언 최고의 영광인 ‘마크 트웨인상’까지 수상했으니 미국 사회에서 그의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하지만 이렇게 쌓아온 신뢰와 명성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발단은 지난 10월 코미디언인 한니발 뷰레스의 입을 통해서 시작됐다. 당시 필라델피아의 스탠드업 코미디쇼 무대에 출연했던 뷰레스는 코스비를 가리켜 ‘연쇄 강간범’이라고 거침없이 비난했다. 그는 청중들에게 “빌 코스비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거만한 흑인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코스비는 TV에 나와서 이렇게 말하죠. ‘흑인들이여, 바지를 올려라. 나는 80년대 성공한 인기 시트콤에 출연했고,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라고 말예요. 맞아요, 코스비. 하지만 당신은 여성들을 성폭행했어요. 그러니까 그 시답잖은 소리는 좀 그만 두세요”라고 쏘아붙였다.
이 발언을 담은 동영상은 곧 인터넷에서 삽시간에 퍼졌고, 누리꾼들을 중심으로 ‘코스비가 성폭행범이다’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동영상을 본 한 여성이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과거 코스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바바라 보먼(47)이 그 주인공이었다. 그녀는 “코스비는 내가 자신을 아버지처럼 여기도록 세뇌시켰고, 나를 여러 차례 성폭행했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코스비는 내게 자신이 아버지 같은 사람이고, 또 아버지처럼 100% 믿어야 한다고 수없이 말했다”라고 폭로했다.
그녀가 처음 코스비를 만났던 것은 1985년이었다. 당시 17세 배우 지망생이었던 보먼은 에이전트의 소개를 통해 코스비에게 개인 오디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코스비에게 오디션을 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흥분했었다.
하지만 오디션은 다소 이상하게 흘러갔다. 코스비가 그녀에게 가장 먼저 시킨 것은 욕실에 가서 머리를 적시고 오라는 것이었다. 젖은 머리로 의자에 앉아있는 보먼에게 눈을 감고 만취한 여자 연기를 해볼 것을 주문했던 코스비는 뒤에서 그녀의 목과 가슴을 힘껏 졸랐다.
배우로서 성공하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눌러 참았던 그녀는 그렇게 합격점을 받았고, 곧 코스비의 든든한 후원을 받기 시작했다. 코스비와 함께 유명 배우들을 만나거나 함께 공연을 보거나 각종 행사에 동행했으며, 마치 왕족이라도 된 양 1등석으로 미 전역을 여행했다. 코스비는 그녀에게 “이 모든 건 너에게 연기를 가르치고 키울 만한 재목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야”라고 말했으며, 머지않아 <코스비 가족>에 캐스팅해주고 스타로 키워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이뤄지지 않았다. 코스비가 점점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성추행으로 시작됐다. 어느 날 방 안에 둘이 남게 되자 코스비는 보먼에게 자신의 성기를 만지도록 강요했으며, 당시 구토를 할 정도로 당황했던 보먼은 “모든 게 내 상상이었다”라고 스스로를 다스렸다.
보먼이 성폭행을 당했던 것은 뉴욕에 있는 코스비의 아파트에서였다. 당시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와인을 한 잔 마셨던 보먼은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변기에 대고 구토를 하고 있었으며, 입고 있는 옷이라곤 남성용 티셔츠와 팬티가 전부였다.
뒤에서 머리를 잡아주던 코스비는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했고, 차츰 정신이 돌아온 그녀에게 택시를 잡아준 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때를 회상하면서 보먼은 “그때 약을 먹이고 성폭행했던 것이 분명하다”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 후에도 몇 차례 약에 취한 상태에서 성폭행을 당했던 그녀는 결국 맨 정신에 강제로 성폭행을 당할 뻔한 후에야 모든 관계를 끝낼 수 있었다. 강력하게 저항했던 그녀에게 코스비는 모든 후원을 중단했고, 그렇게 그녀를 쫓아냈다.
코스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들. 왼쪽부터 바바라 보먼, 안드레아 콘스탄드, 조앤 타시스, 제니스 디킨슨.
수치심과 치욕에 떨었던 그녀는 용기를 내서 변호사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코스비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말도 안 된다”며 믿지 못하는 눈치였으며, 오히려 그녀를 돈을 노리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는 꽃뱀 정도로 여겼다.
그렇게 속을 앓던 중 다른 피해 여성의 소식이 들려왔다. 2004년 안드레아 콘스탄드(41)라는 여성이 코스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며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당시 템플대 여자 농구팀 작전코치이자 대학 농구 스타였던 콘스탄드는 템플대 동창회에서 코스비를 처음 만나 친구로 지내고 있었다. 코스비를 ‘멘토’로 여기면서 따랐던 그녀는 곧 코스비 가족과도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어느 날 스트레스가 많아 힘들다는 그녀에게 코스비가 파란색 알약 세 개를 건네면서 악몽은 시작됐다. 알약을 먹자 곧 무릎이 떨리고 팔다리에 힘이 빠졌으며,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거의 의식을 잃고 쓰러졌던 그녀에게 코스비가 다른 약을 건넸고, 그렇게 그녀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옷과 속옷이 전부 흐트러져 있었고, 그렇게 그녀는 자신이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경찰에 신고를 했던 그녀는 코스비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녀의 변호인은 코스비에게 비슷한 방식으로 성폭행을 당했다는 여성들 열세 명의 증언을 확보한 상태였다. 그 가운데에는 보먼도 포함되어 있었다. 보먼은 “당시 나는 법정 증언뿐만 아니라 방송국 인터뷰도 계획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코스비의 재판은 이뤄지지 않았다. 재판이 열리기 직전 코스비와 콘스탄드가 극적인 합의를 보면서 송사가 마무리됐던 것이다. 당시 콘스탄드가 코스비로부터 얼마만큼의 합의금을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는 상태.
하지만 당시 사건을 맡았던 브루스 캐스터 전 지방검사는 “나는 당시 코스비가 분명 유죄라고 믿고 있었다. 그를 체포하고 싶었다”라면서 “하지만 증거가 불충분했다. 피해 여성이 1년이 지난 후에야 신고를 했기 때문에 머리카락, DNA, 약물 검사를 실시할 수가 없었다”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성폭행 논란이 가중되자 곧 제2의, 제3의 피해 여성들이 나타났다. 전 음반 홍보 담당이었던 조앤 타시스(66)는 “19세 때 두 차례에 걸쳐 코스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라면서 “그는 도움이 필요한 아주 심각하게 병든 사람이다”라고 비난했다.
코스비의 수법은 늘 똑같았다. 먼저 독한 술과 함께 약을 먹여 의식을 잃게 한 후 성폭행하는 것이었다. 타시스는 “하루는 집에서 함께 자료를 검토하자면서 나를 불렀다. 그때도 독한 술을 마셨는데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 눈을 떴는데 코스비가 옷을 벗은 채 내가 누워있는 소파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나는 재치를 발휘해서 성병이 걸렸다고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그는 다른 구멍을 찾았고, 나는 내가 존경했던 분이 지금 나를 강간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었다”라고 회상했다. 그동안 수치심에 시달려 왔던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대통령부터 오프라 윈프리까지 모두 그를 칭찬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참을 수 없었다”라면서 “그는 너무 강자였다. 어떻게 나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이 그를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그에게 성폭행당했다고 말한들 누가 내 말을 믿어줬겠는가”라고 한탄했다.
더욱 충격적인 피해자는 제니스 디킨슨(59)이었다. 슈퍼모델이었던 디킨슨마저 코스비의 희생양이었다는 사실에 온 미국은 다시 한 번 충격에 빠졌다. 디킨슨이 처음 성폭행을 당했던 것은 1982년이었다. 당시 <코스비 가족> 캐스팅 건으로 코스비와 만났던 디킨슨은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와인 한 잔과 함께 알약 하나를 건네받았다. 생리통 때문에 진통제를 부탁했었던 그녀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알약을 먹었다.
그리고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다음 날 눈을 떴을 때의 모습뿐이었다. 침대에 누워있었던 그녀는 알몸이었고, 그렇게 자신이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디킨슨은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코스비가 나이트가운을 입고 있었던 모습과 가운을 벗고 내 위로 올라오던 모습이었다. 그리고 심한 통증도 기억이 났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는 잠옷은 벗겨져 있었고, 다리 사이에는 정액이 묻어 있었다”라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 후 자서전을 통해 이 사실을 폭로하려고 했지만 코스비 측의 압력으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고 주장한 그녀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게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일은 분명히 일어났고, 이것은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왜 수십 년이 지난 이제서야 입을 여는가라는 질문에 보먼 역시 “너무 오랫동안 침묵해왔다. 이제 용기를 내야 할 때이다. 그가 나에게 저지른 일에서 벗어나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라면서 “그는 괴물이다. 바라건대 나처럼 성폭행을 당했던 여성들이 유명하고 부자이고 권력 있는 사람들 때문에 겁이 나서 침묵하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피해 여성들이 하나둘 이렇게 고백하기 시작한 것은 내년 여름부터 방송될 예정인 NBC 방송의 새로운 시트콤 때문이기도 하다. 코스비가 이 시트콤에서 다시 푸근한 아버지 역할을 맡기로 했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있는 보먼은 “절대 안 될 일”이라면서 “당신의 딸과 손녀딸의 눈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나요? 만일 어떤 남자가 당신의 딸에게 똑같은 짓을 저지른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그를 죽일 건가요? 아니면 시가라도 나눠 피면서 축하할 건가요?”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현재 코스비 측은 이런 주장에 대해 “아무 근거도 없는 중상모략이다. 일일이 해명할 가치도 느끼지 못한다”라며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상태. 코스비의 변호인은 “지난 몇 주 동안 아주 케케묵은 주장들이 다시 불거지기 시작했는데, 다시 주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성폭행 논란이 불거진 후 현재 코스비에 대한 여론은 싸늘하게 식은 상태다. 출연 예정이었던 방송은 줄줄이 취소됐으며, 매진됐던 스탠드업 코미디쇼도 모두 취소된 상태다. 그야말로 할리우드에서 퇴출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코스비를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코스비 옹호’ 지인들의 주장 “모두 코스비 돈 노린 꽃뱀들” 우피 골드버그 전설적인 색소폰 연주가이자 코스비의 60년 지기인 토니 윌리엄스(83)는 이렇게 말했다. 코스비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는 그는 최근 불거진 성폭행 주장이 모두 거짓말이라면서 코스비를 두둔하고 나섰다. 그는 “코스비의 돈과 유명세 때문에 이러는 것들이다”라고 비난하면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들이 모두 코스비의 재산을 노린 사기꾼들이라고 말했다. 실제 코스비의 재산은 할리우드 흑인 연예인들 가운데 상위권을 차지한다. 특히 1992년에는 9800만 달러(약 1090억 원)의 수입을 올리면서 마이클 잭슨과 오프라 윈프리를 제치고 흑인 연예인 가운데 소득 순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포브스>에 따르면 현재 코스비의 순자산은 3억 5000만 달러(약 3090억 원)로 흑인 연예인 가운데 4위다. 우피 골드버그(59) 역시 코스비 편을 들고 나섰다. 그녀는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여성들이 당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의심스럽다고 말하면서 “왜 경찰에게도, 부모님에게도 피해 사실을 알리지 않았는가?”라며 비난했다. 또한 콘스탄드 사건의 경우 당시 합의가 이뤄졌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아마도 이번에도 비슷한 경우 아니겠냐며 의심했다. 또한 골드버그는 “유명인들이 범죄인으로 몰리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라며 코스비를 동정하기도 했다. [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