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이해찬 총리와 정동영 김근태 장관을 전면에 내세운 노무현 대통령의 진짜 속내는 무엇일까. 사진은 지난 12일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을 방문해 시승해보는 노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 ||
분권형 시스템은 이 총리가 일상적 국정운영을 총괄하고 정 통일부 장관은 내각의 외교-안보-국방 분야를, 김 복지장관은 사회 분야를 ‘팀장’ 격으로 책임지도록 한다는 것이 뼈대다. 새 체제가 가동됨에 따라 당장 총리실의 기구 확대개편이 진행되고 있고, 정 통일부 장관은 그동안 권진호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이 맡았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직을 물려받았다. 또 김 복지부 장관에 대해서도 사회 분야 팀장을 맡게 된데 따른 권한강화 조치가 곧 있을 예정이다.
여권 핵심부는 노 대통령이 이 총리 등 3인의 내각내 권한을 증대시킨 것은 대통령 중심의 수직적 네트워크를 분해해 내각이 서로 수평적으로 협력하고 견제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라 밝히고 있다. ‘대통령-각 부 장관’의 단선 체제를 ‘대통령(국가전략-혁신과제)-총리(일상 국정 총괄)-분야별 팀장(경제-과학-외교 안보 국방-사회 문화)-각부 장관’의 다단계 구조로 바꿔 “내각의 분권화와 유관부처별 업무 협력을 강화하겠다”(김종민 청와대 대변인)는 설명이다.
그러나 여권내에선 분권형 시스템 도입에 담긴 노 대통령의 의중이 단순히 내각의 권한 조정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오히려 차기 대권구도와의 연관성, 당-정-청간 역학구도 변화 등의 견지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여권 한 핵심인사는 이를 “노 대통령이 차기 주자들간 대권 경쟁이 ‘줄 세우기’가 아닌 국정의 틀에서 ‘선의의 경쟁’으로 유도하고, 이를 통해 여권의 정국 대응력을 높이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권내 중-장기적 권력지형 변화를 꾀하고 나선 ‘노심’의 실체를 추적해 봤다.
‘분권형 국정운영’으로 포장된 차기 3인방의 전면 부상에서 가장 관심을 모으는 대목은 역시 이 총리의 위상 변화다.
“책임총리제의 개념은 아니다”(청와대 김종민 대변인)라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으로부터 내각 통할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으면서 이 총리가 여권의 명실상부한 ‘2인자’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평가다. 특히 이 총리가 매주 월요일 노 대통령과 정례 조찬회동을 갖는데다, 지난 7일엔 골프 회동을 가진 사실이 확인되면서 둘 간의 ‘밀월’ 배경을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여권내에선 일단 노 대통령-이 총리의 ‘찰떡 공조’가 상당기간 유지될 것으로 보고 있다. 88년 13대 국회 때 함께 등원하면서 맺어진 오랜 인연과 돈독한 신뢰를 감안할 때 이 총리가 국정운영의 중심축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노 대통령의 후원이 계속 이어지리란 관측이라 하겠다.
친노그룹의 한 의원은 “노 대통령은 정계입문 초기부터 이 총리를 ‘내용 있는 대화를 할 수 있는 드문 사람’으로 평가해 왔고, 취임 이후에도 편안하게 국정을 논의해 왔다. 측근들 사이엔 ‘노무현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은 김원기 이해찬 둘뿐’이란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는 또 “노 대통령이 이 총리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은 자신과 임기 막바지까지 함께 하겠다는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해석해 주목을 끌었다. “금년 말, 내년 초 국회의원 재-보선을 지나면 우리당의 원내 과반이 허물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총리를 바꾸려 하면 인준 문제 등이 걸리기 때문에 노 대통령은 가능한 한 오랫동안 이 총리에 내각을 맡기려 할 것”이란 설명이다.
이 총리 본인도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오찬 간담회(13일)에서 “대통령이 그만두라면 언제라도 그만둬야지.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끝까지 모시려고 한다. 끝나고 나면 (대통령과) 같이 놀러 다니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지원이 이 총리를 차기 주자로 키우겠다는 목표를 갖고 이뤄질 것인가에 대해선 친노 그룹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의견이 있는 반면 역시 청와대 출신인 한 핵심 의원은 이 총리의 대중성 부족을 들어 “(이 총리는) 국회의원 선거 빼곤 초등학교 반장 선거에 나가도 떨어질 것”이라며 반론을 펴고 있는 상황이다. 이 총리도 여권내에서 ‘이해찬 대망론’이 제기되고 있는 것에 대해 “뭐 하러 (청와대에) 갇혀서 사나, 인생 살면 얼마나 산다고…. 청와대 녹지원 보다 삼청동 총리 공관의 나무와 잔디가 훨씬 더 좋다”며 ‘무욕’을 강조하는 등 몸을 낮추고 있다.
정 통일장관도 외교·안보·국방분야를 책임지게 되면서 대권 도약의 발판을 어느 정도 마련했다는 분석이다. 특히 본연의 영역인 남북관계 외에 한미동맹과 자주국방 등 핵심 현안을 다룰 기회를 부여 받음으로써 그동안 높은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콘텐츠가 없다”는 비판을 불식시킬 기회를 맞이하게 됐다는 얘기도 나온다. 실제 정 장관은 NSC 상임위원장 겸직 후 남북관계 경색의 단초가 된 북한 김일성 주석 조문 불발과 탈북자 대량 입국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는 등 발빠른 행보를 보여 주목을 끈 바 있다.
김 복지장관은 이 총리, 정 통일장관의 행동반경이 커진데 반해 아직 권한강화 조치가 ‘예정’이란 점에서 다소 뒤쳐지는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일부 측근 의원들 사이에선 “이럴 바에야 당으로 돌아오는 것이 낫다”는 격앙된 반응도 나오고 있지만, 김 장관측에선 “우리에게도 사회분야를 총괄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국민의 피부에 다가서는 정책을 펼쳐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대중성을 높일 수 있는 기회”라는 기대를 표명하고 있다.
▲ 지난 10일 국무회의에 앞서 이해찬 총리가 정동영 통일부 장관(왼쪽 사진), 김근태 복지부 장관(오른쪽 사진)과 번갈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노 대통령의 이같은 의중에 따라 당-정-청 관계도 3인방을 중심으로 한 내각의 주도성이 강화되는 반면 신기남 의장, 천정배 원내대표 등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발언권은 더욱 더 축소되는 방향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커졌다.
우선 당정 관계는 3인방이 역할이 커짐에 따라 ‘당정 일체’의 면모가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당내 친노그룹과 중진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 총리나 각각 당권파, 비당권파의 ‘대주주’격인 정 통일-김 복지장관이 당정 현안을 조율하는데 지지그룹을 상대로 적극적인 행보를 보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청와대 출신 한 의원은 “노 대통령이 이 총리 등 세 사람의 권한을 확대한 것은 당내 세력관계를 대표하는 이들이 주요 현안에 대한 당정협의가 제대로 진행될 수 있도록 나서달라는 의미도 담겨있다. 3인의 직무수행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는 얼마나 매끄럽게 당정 현안을 풀어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고 말했다. 실제 세 사람은 최근 들어 경쟁적으로 열린우리당 의원들과의 접촉기회를 넓히며 소관 현안에 대한 이해와 협조를 구하는데 각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당정관계의 긴밀성이 높아질 가능성이 높아진 반면 청와대와 열린우리당 사이는 더욱 소원해 질 것이란 예상이 많다. 노 대통령이 일상적 국정운용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한 만큼 당 지도부와 접촉할 기회는 사실상 없어지게 됐기 때문이다. 당청간에는 현재 신기남 의장, 천정배 원내대표와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을 핵심멤버로 하는 당청협의회가 존재하지만 지난 6월12일 신행정수도 건설과 이라크 파병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한 차례 열린 후 ‘가동 중단’ 상태다. 여기에 노 대통령이 제시한 분권형 국정운영 시스템이 적용되면서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대 청와대 접촉 루트는 폐쇄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평가다. 6·5 재-보선 직전 노 대통령과의 정례회동을 요청했다 거부당한 바 있는 신 의장, 천 대표로서는 여러모로 달갑지 않은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 당청채널이 ‘불통’되면서 당 지도부의 입지도 적지않게 흔들릴 것이란 전망이 많다. 열린우리당의 정국대응에 마뜩지 않아 하는 청와대의 시선이 갈수록 싸늘해지고 있는데다, 비당권파인 이 총리가 당정관계의 전면에 나선 것이 신 의장, 천 대표로선 반가울리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임 당 의장-원내대표인 정 통일, 김 복지까지 당정 일체를 내세워 계파 의원들에 대한 영향력 확대에 나서고 있는 것도 현 지도부의 리더십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 분명해 내년 1~2월 전당대회 당권경쟁 판도에서 변수가 되리란 예상이다.
‘선명 개혁’을 내건 당 지도부에 대한 여권 핵심부의 평가가 부정적인 것과 맞물려 차기 당 지도부는 노 대통령의 국정수행을 힘있게 뒤받침할 수 있는 ‘관리형’ 체제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확산되고 있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 특히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돼 있다”는 본인의 입장표명에도 불구하고 친노그룹의 ‘좌장’으로 최근 의원들과의 접촉 빈도를 높혀가고 있는 문희상 의원(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당권 도전설이 나와 주목을 끌고 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