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개입 문건 파문 이후 ‘정윤회+십상시 대 박지만’ 구도의 권력암투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왼쪽부터 정윤회, 이재만, 박지만 씨. 일요신문DB, 사진제공=한겨레
이처럼 이례적으로 긴장이 감돌았던 이유는 이날치 <세계일보>가 1, 3, 4면에 걸쳐 게재한 충격적인 보도 때문이었다. ‘단독’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정윤회 국정 개입은 사실’이라는 제목의 1면 머릿기사를 필두로 ‘비선 실세그룹 십상시, 국정 정보 교류·고위직 인사 간여’, ‘박 대통령 측근 행세했던 3인방, 정 씨 정보원 노릇’ 등의 제목을 단 기사들이 이어졌다. 굳이 기사를 자세히 읽지 않고 제목만 봤더라도 심상찮은 내용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세계일보>는 지난 1월 6일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이 작성한 것으로 돼 있는 ‘靑(청) 비서실장 교체설 등 관련 VIP측근(정윤회) 동향’이라는 제목의 문건 사진을 내걸고 박근혜 정부의 보이지 않는 실세라는 의혹을 받아 온 정윤회 씨가 청와대의 이른바 문고리 3인방(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 등과 결탁, 인사 등 국정에 개입해 온 사실이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공개한 문건을 ‘감찰 보고서’라고 규정했다. 지난 11월 24일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정윤회 씨에 대해 감찰을 실시한 바 없다”고 밝힌 것은 거짓이며, 청와대의 감찰 결과 정 씨의 국정 개입 사실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세계일보>가 전한 바에 따르면, 문건에는 정 씨가 지난해 10월부터 문고리 3인방을 포함한 박 대통령의 측근 참모들과 서울 강남의 일식집, 중식집 등에서 매달 두 차례씩 만나 국정 정보를 공유하고 정부 고위직과 청와대 인사 등에 개입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문건에는 측근 참모들이 ‘십상시’라고 표현돼 있다.
특히 문건에는 정윤회 씨가 지난해 송년 모임에서 “김기춘 실장은 최병렬이 VIP께 추천해 비서실장이 됐는데 ‘검찰 다잡기’만 끝나면 그만두게 할 예정이다. 시점은 2014년 초·중순으로 잡고 있으며 7인회 원로인 김용환도 최근 김 실장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는 내용도 실렸다. 또 정 씨가 당시 참석자들에게 소위 찌라시(사설 정보지) 관계자들을 만나 김 실장의 사퇴 분위기를 조성하도록 지시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세계일보>에 따르면 문제의 문건은 현재 서울시내 모 경찰서에 근무하고 있는 A 경정이 지난 1월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으로 재직할 때 작성했다고 한다. 또 “당시 조응천 공직기강비서관은 A 경정 등이 보고서를 작성해오자 이를 직속 상사인 홍경식 당시 민정수석에게 보고했다”며 “이후 조 비서관은 홍 수석 보고를 마친 뒤 김기춘 비서실장을 만나 대면 보고한 것으로 전해졌다”고 보도했다.
결국 세간에 떠돌던 ‘정윤회 실세설’은 사실이었으며, 심지어 정 씨는 십상시와 함께 소위 ‘김기춘 사퇴설’, ‘김기춘 중병설’ 등의 루머를 생산해 낸 진원지였다는 얘기다. <세계일보>의 첫 보도를 접한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사실이라면 정권이 흔들릴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로 메가톤급 폭발력이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청와대는 <세계일보>가 보도한 문건에 대해 “정윤회 씨에 대한 감찰 보고서가 아니라 시중의 찌라시에 떠도는 풍문과 풍설을 짜깁기해 놓은 문건일 뿐”이라며 즉각 반박했다. 문고리 3인방으로 지목된 3명의 비서관 등은 이를 사실처럼 보도한 <세계일보>에 대해 당일 오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또 문건 작성의 당사자로 지목된 A 경정에 대해선 공공기록물관리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청와대의 주장을 요약하면 문제의 문건은 A 경정이 청와대 재직 중 작성한 게 사실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시중에 떠도는 풍문을 모아놓은 동향 보고 문건일 뿐 그 내용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건에 나온 문장이 ‘~를 지시하기도 한다 함’, ‘~를 지시 하였다 함’이라는 식으로 작성된 것도 이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국정개입 문건 보고라인의 인물들. 왼쪽부터 A 경정,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 홍경식 전 민정수석, 김기춘 비서실장.
민경욱 대변인은 우선 “정윤회 씨에 대한 감찰 조사는 없었다”고 못 박았다. 문제의 문건이 정 씨에 대한 감찰 조사 결과물이라는 <세계일보>의 핵심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민 대변인은 이어 A 경정이 작성한 문건이 처음 보고됐을 때 청와대가 어떤 조치를 했는지에 대해 “조사라고 얘기하기 뭐하지만 (문건에 등장하는 십상시 등에게) 확인을 했을 것”이라며 “근거가 없는 내용이라고 판단해 당시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당시 이 문건이 김기춘 실장에게 보고됐는지에 대해서는 “루머의 내용은 구두로 보고됐지만, 해당 문건이 전달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민 대변인은 A 경정이 문건 작성 한 달 뒤인 지난 2월 갑작스럽게 경찰로 원대복귀된 게 문건 내용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의혹에 대해서는 “행정관 인사는 수시로 있고, (A 경정에 대한 인사는) 통상적인 인사였다”고 일축했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이번 <세계일보> 보도 파문에 대해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언론사에 빗대 설명하자면 한 기자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풍문을 모아 보고한 것에 대해 데스크가 기사로 쓸 수 없는 믿기 어려운 내용이라고 판단해 킬(Kill)시켰는데, 그런 사실을 모르는 엉뚱한 사람이 엉터리 보고 내용을 가져다가 그대로 기사를 써 버린 격”이라고 말했다. 그는 “<세계일보>는 문건의 내용이 사실인지 여부에 대해 확인을 거치지 않았다”며 “사실 관계를 조금이라도 확인했다면 그렇게 황당한 내용을 기사화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보탰다.
다른 청와대 인사들도 “팩트에 기반하지 않은 의혹 제기인 만큼 결국 해프닝으로 마무리될 것”이라며 자신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민경욱 대변인은 “모임이 열렸다는 식당에 가서 확인해보면 될 것 아니냐”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이들의 희망처럼 단기간 내에 마무리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만만찮다. 우선 청와대의 반박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청와대 근무 경험이 있는 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청와대에 파견될 정도의 엘리트 경찰 간부가 아무런 확인 과정도 없이 시중의 찌라시를 짜깁기해 동향 보고를 올렸다는 해명은 청와대의 메커니즘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반박했다. 이 의원은 “더욱이 문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알려진 실세들 아니냐”며 “권력 내부의 암투가 없었다면 이런 류의 동향 보고가 이뤄졌을 리 없다”고 덧붙였다.
한 경찰 관계자도 “A 경정은 자신의 업무에 대해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며 “그런 사람이 이렇게 민감한 내용을 아무 근거도 없이 보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청와대의 주장처럼 <세계일보>가 찌라시 수준의 문건에 기대 지나치게 무모한 기사를 쏟아냈다고 해도 그 자체로 권력 핵심부의 암투가 실재하고 있음이 확인됐다는 주장도 있다. 한 여권 관계자는 “문제의 문건을 유출한 사람, 그것을 <세계일보>에 건네준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며 “누군가 든든한 사람이 자신을 보호해줄 것이라는 확신 없이 공직자가 정권 실세를 겨냥해 그런 무모한 싸움을 걸 수 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번 보도가 나온 것 자체로 권력 내부의 심각한 갈등이 표출된 것이고, 이는 앞으로 얼마든지 재연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관계자는 “조응천 전 비서관뿐 아니라 A 경정도 (박 대통령의 남동생인) 박지만 씨 라인이라는 얘기가 있다”며 “이게 사실이라면 ‘박지만 대 정윤회+십상시’의 구도로 암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야당이 이번 사태의 이슈화를 꾀하고 있고, 청와대와 <세계일보> 간의 법적 공방이 이어지는 것도 청와대에는 부담으로 다가갈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새정치연합은 국회 운영위원회 긴급 소집을 요구한 것은 물론 박범계 의원을 단장으로 하는 ‘비선실세 국정농단 진상조사단’을 구성했다. 향후 국회 상임위원회, 또는 법정 진술 등을 통해 권부 내의 갈등을 보여주는 팩트들이 얼마든지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영 엉뚱한 소리로 들리지 않는 이유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