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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친의 친일행적이 문제가 돼 지난 19일 당 의장직을 물러난 신기남 전 의장. 신 전 의장은 지난 17일 광복회를 방문해 사과하기도 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이 과정에서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이 부친의 친일 문제 ‘유탄’을 맞고 낙마하면서 과거사 규명 문제를 두고 여야 간의 전면전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여권은 신 전 의장의 ‘희생타’를 발판으로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했다고 보고 과거사 규명에 대해 더욱 고삐를 죌 태세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이 문제를 박근혜 대표에 대한 여권의 정치적 공세로 판단하고 있다. 박 대표의 영향력을 조기에 차단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깔려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논란의 와중에서 과거사 규명이 국가의 미래를 위한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이 아닌 정략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거물급 정치인 가족들의 친일 행적이 검증 없이 나돌기 시작하면서 마녀사냥식 정치인 죽이기로 변질되고 있다는 것. 과거사 규명을 둘러싼 정치권의 전면전을 따라가 봤다.
여권은 먼저 과거사 규명이 노무현 대통령의 오랜 ‘숙원’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근 청와대는 노 대통령의 과거사 관련 발언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2002년 11월 당시 노무현 민주당 대선 후보는 영남대 강연에서 “과거 역사가 지속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과거 역사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밝혔다고 주장했다. 또한 노 대통령은 지난 8월17일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대통령 취임 전부터 학자·전문가와 논의를 거쳐 역사를 어떻게 바로잡을까 고민해왔다”면서 “야당과의 관계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과거사 규명 강공 선회 배경에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자리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박 대표가 예상보다 일찍 잠재적 대권 후보로 입지를 강화하자 여권이 그 견제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한나라당의 한 초선 의원은 “박 대표가 비록 당내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진 못했지만 현재로서는 가장 막강한 대권 후보다. 앞으로 대안이 없을 경우 박 대표로 갈 가능성이 크다. 이를 간파한 여권이 과거사 규명 문제로 박 대표에 대한 견제구를 날렸다고 본다. 시기상으로 이른 감이 있지만 대선을 앞두고 박 대표 힘 빼기를 통해 그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짙다”고 말했다.
여권의 개혁 드라이브 첫 신호탄이 과거사 규명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과거사 문제에 이어 국가보안법 철폐, 언론문제 등 각종 개혁 정책을 밀어붙일 것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천정배 원내대표는 최근 “정기국회는 단군 이래 5천년 만에 온 엄청난 기회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책임이 막중하다”며 “우리가 스스로 단결하면 원내 과반수로 무엇이든지 가능하다”고 말해 개혁 입법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밝힌 바 있다. 또한 내년 재보궐 선거에서 과반수가 무너질 경우에 대비해 힘이 있을 때 각종 개혁 현안들을 정리하자는 현실적인 정치지형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여권의 과거사 규명 의도가 다분히 정략적이라고 주장한다. 한 핵심 당직자는 이에 대해 “과거사 캐기는 여권의 장기 집권 음모에 불과하다. 친일 문제에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한나라당을 압박해 인위적으로 세력 교체를 이루고 이를 통해 장기집권에 나서겠다는 시나리오를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이를 위해서 국정원 검찰 등이 직접 나서서 과거사 규명을 구실로 지난 사건을 다시 파헤칠 것이다. 그리고 시민단체 등과 협력해 여론을 조성하고, 국회언론발전위원회 설치를 통해 언론에도 재갈을 물리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정치권은 과거사 전면전 과정에서 ‘제2의 신기남’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며 우려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과거사 규명이 여야 간 마녀사냥식 정치인 죽이기로 변질될 경우 사회 전체에 걷잡을 수 없는 큰 혼란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인터넷에서는 친일 의혹이 있는 여야 의원들의 이름과 혐의내용이 검증 없이 떠돌고 있다. 여권의 대권 주자 중 한 명인 A씨는 부친이 일제강점기 때 금융조합 서기로 일했던 전력이 있어 소작농민들을 착취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하지만 A씨측은 이에 대해 “부친의 경력 자체는 사실이지만 친일에 대한 부분은 어이가 없다”면서 “그렇게 따지면 그 당시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친일파가 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또 다른 대권주자 B씨도 부친의 친일 의혹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그의 부친이 일제 때 소학교 훈도가 되고자 스스로 충성을 선서하고 식민지 황국신민 교육요원을 지냈다는 내용 때문이다. 이에 대해 B씨측은 “당시 교편 잡은 사람은 모두 친일이란 말이냐”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밖에 노무현 대통령의 장인 권아무개씨가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던 ‘진전면 치안대 사건’ 책임자였다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 강창일 의원은 “그 사람들은 모두 재판을 받았던 경우다. 일사부재리 원칙에 의거해 이번 과거사 규명 대상에서 당연히 제외되어야 한다”며 선을 그었다.
한나라당도 과거사 문제에 대해 자유롭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박 대표는 친일 문제와 함께 친북·용공 혐의도 함께 조사하자고 맞불을 놓았었다. 그런데 이것이 자칫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부메랑이 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열린우리당 이부영 의장이 그를 두고 “군내 (남로당) 프락치 총책”이라고 규정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이 가중되고 있기 때문. 강창일 의원은 “박 대표가 아버지 이야기를 잘 모르는 것 아닌가. 친북 용공 세력 조사하자고 하면 그 첫 번째 대상자는 바로 박 전 대통령이다”라고 말했다. 여권이 과거사 규명 작업에서 박 전 대통령에게도 초점을 맞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셈이다.
이밖에 한나라당의 일부 의원들도 부친의 친일 문제가 인터넷에서 확인되지 않은 소문 형태로 떠돌고 있다. 중진인 C의원은 부친이 일제강점기 때 면장을 8년 동안 지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소장파의 한 의원도 조부가 친일반민족 행위자 7백8명의 리스트에 올라있다고 한다. 원외인 K 전 의원도 부친이 면장과 금융조합장을 지낸 전력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런 소문들은 아직 정밀하게 검증받지 못한 채 소문으로만 떠돌고 있다.
이렇게 한국판 매카시즘이 발현할 조짐을 보이자 정치권에서는 과거사 문제를 다룰 특위 구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중립적 인사가 특위에 참여해 최대한 정략적 접근을 막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한나라당 한 핵심 당직자는 이에 대해 “시민단체나 학계에서 추천하는 외부 전문가가 참여한다고 해도 추천 대상의 성격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정치적 판단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특위도 정쟁의 장으로 변질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또한 기구의 중립성 여부를 떠나 실제 조사 결과가 나왔을 경우, 관련자들이 받게 될 개인의 명예훼손에 대해서도 전혀 대비책이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여권은 전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강창일 의원은 “왜 한나라당이 이 문제를 가지고 정쟁화하는지 모르겠다. 제발 한나라당은 경제 살리기에만 관심을 가져라. 이 문제는 국회에서 조용히 처리하면 되는데 이 나라 경제를 망치려고 하는지 정치적으로만 이 문제를 몰아가고 있다”고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