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아무리 자신의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을 지라도 세상이 그리 만만치 않은 데다 자식과의 소통 역시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자기 딴에는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그게 오히려 자식에게 상처와 아픔만 남기는 경우가 있다. 살다 보면 인생이란 게 그렇게 꼬여 버리곤 한다. 영화 <나의 독재자> 역시 바로 그런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 참 복잡 미묘한 관계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못한 경우가 많다. 남자라는 동물은 참으로 미약하다. 티격태격하기야 어머니와 딸이 더 그럴 수도 있지만 여성들은 서로의 감정을 잘 드러내는 편이라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그만큼 서로 보듬어주고 이해하기도 잘 한다. 그렇게 관계도 깊어간다. 반면 미약한 남자라는 존재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서로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신뢰가 존재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는 관계가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다.
제목의 ‘독재자’라는 단어도 한국의 아버지와 맞닿아 있다. 70~80년대 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에는 가부장적인 유교 문화가 뿌리 깊었고 아버지는 집안에서 독재자처럼 보이는 경우가 흔했다. 이 영화에선 실제로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이는 하나의 도구일 뿐 결국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임을 감안하면 ‘독재자’라는 단어는 그 시절 우리네 아버지들을 총칭하는 단어일 수도 있다.
영화는 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무명의 연극배우 성근(설경구 분)은 어린 아들 태식, 그리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2층집에 세 들어 사는 성근의 집은 무척 가난하다. 게다가 수년 째 무명의 연극배우인 성근은 제대로 된 배역 하나 맡아보지 못한 채 ‘행인 1,2,3’ ‘구경꾼 1,2,3’ ‘병사 1,2,3’ 등 단역만 전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성근은 “1,2,3도 그렇게 진득하게 하다 보면 주인공이 된다”는 긍정적인 사고의 소유자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온다. 주연급 배역을 맡은 배우가 연출자와의 불화로 출연을 거부하고 대본을 미리 외우고 있던 성근에게 그 배역이 맡겨진 것. 홀어머니와 아들 태식, 그리고 태식의 친구들까지 초대하지만 단역만 소화하던 성근은 큰 배역을 맡아 무대에 오른 뒤 너무 긴장해서 대사까지 까먹은 채 공연을 망쳐 버린다.
절망에 빠진 성근은 경부대학 연극과 허삼웅 교수(이병준 분)에게 오디션 제안을 받는다. 어떤 연극의 무슨 캐릭터인지도 모른 채 오디션 현장을 찾은 성근은 1차 오디션에 통과한다. 어딘 지도 모른 채 끌려간 2차 오디션 장소는 남한의 정보부였다. 여기서 모진 고문을 받은 성근은 끝까지 아무 것도 불지 않을 만큼 입이 무겁다는 점을 인정받는다. 이것이 바로 최종 오디션이었던 것. 그렇게 성근이 맡은 배역은 72년 남북공동성명 발표 이후 성사 여부가 타진 중이던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에 대비한 김일성 대역이었다. 정보부의 비밀 프로젝트로 진행된 이 기막힌 연극을 위해 성근은 허 교수의 연기 수업을 받으며 서서히 김일성이 돼 간다.
정보부에선 성근에게 집까지 사줄 만큼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지만 성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비밀을 유지해야 했다. 관객은커녕 비밀리에 공연되는 연극인 남북정상회담 리허설을 위해 김일성 대역을 맡은 성근은 어린 아들 태식에게만 그 비밀을 털어 놓는다. 그렇지 않아도 태식은 아무리 기다려도 아빠의 연극을 볼 수 없는 데다 친구들에겐 놀림까지 당하고 있었다.
“내래 대통령 각하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아주 위대한 연극을 준비하고 있어. 그래서 아무도 알면 안 되는 거지. 절대 딴 데 가서 말하면 안 돼”
자랑스러운 아버지와의 비밀이 생긴 어린 태식은 가장 아끼는 딱지를 아버지 성근에게 선물하며 응원해준다.
여기까지가 이상이다. 관객 앞에 설 수 있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김일성 대역을 맡아 혼신의 연기를 다 한 아버지 성근이 꿈꾼 연극은 바로 여기까지였다. 모두 알고 있듯이 70년대에는 결국 남북정상회담이 열리지 않았으며 성근의 ‘아주 위대한 연극’ 역시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실패는 아버지 성근과 아들 태식의 관계를 심하게 뒤틀리게 만들고 만다. 그리고 남은 것은 너무나 힘겨운 현실 뿐이었다.
물론 영화는 뒤틀린 관계인 성근과 태식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결국 무대에 오르는 ‘아주 위대한 연극’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담당한다.
성근과 태식만큼 사회 정치적인 상황들로 인해 극적으로 엇갈리진 않았을 지라도 각자의 사연으로 서로 가까워지지 못하는 아버지와 아들들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많다. 아니 뭔가의 사정으로 서로의 사이가 틀어진 게 아닌 정상적인 부자관계일 지라도 감정 표현을 제대로 못하는 우리네 남성들의 치명적 약점으로 인해 서로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아버지와 아들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이다. 그런 모든 이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영화 <나의 독재자>의 힘은 바로 배우 설경구의 명연기에 있다. 뭐 모든 작품에서 빼어난 연기를 선보인 설경구지만 많은 영화인들은 <박하사탕> 이후 최고의 연기였다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비록 극장 흥행 성적은 기대 이하였지만 그의 연기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게다가 이병준과 윤제문, 그리고 박해일까지 연극배우 출신인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연극을 소재로 한 이 영화에서 진정한 연기력의 향연을 선보인다.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성근을 다시 만난 허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엔 말이야 수많은 배역들 중에 가끔 배우를 잡아먹는 배역이 있다. 그런 배역을 맡으면 열에 아홉은 겁을 먹기 일쑤거든. 근데 자넨 당당했지. 잡혀 먹힌 게 아니라 보란 듯이 잡아먹었으니까. 목구멍까지 차오른 배우가 그걸 토해내지 못하면 얹히는 법이지. 이 봐 성근이, 그때 내가 봤네. 자네 연기는 훌륭했어 이제 그만하면 됐네. 누가 뭐래도 내가 봤으니까. 내가 똑똑히 봤으니까. 이제 그만 하면 됐네.”
기자 역시 똑똑히 봤다. 설경구를 필두고 이병준, 윤제문, 박해일 등 이 시대 최고의 배우들이 선보이는 그 훌륭한 연기를. 영화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극장 흥행 성적은 결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음을 이들의 명연기가 제대로 입증해주고 있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