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레베카 셰퍼가 스토킹에 의해 숨진 이후,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스토킹 처벌법이 제정됐다.
이 시기 그녀에게 접근한 남자가 바로 로버트 존 바르도였다. 1970년생으로 레베카 셰퍼보다 세 살 적었던 그는 7남매의 막내로, 큰형이 휘두르는 폭력에 어릴 적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정신적인 피폐함을 겪었고 결국 가족을 떠나 위탁 가정에서 성장했다. 15세 땐 한 달 동안 정신병원에 있기도 했던 그는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햄버거 가게 경비 일을 하면서 틴에이저 시기를 보냈다. 스토킹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였다. 첫 타깃은 서맨사 스미스. 아역 배우로서 어린 나이에 평화 운동의 아이콘이었던 그녀는 1985년 안타깝게도 13세의 나이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이후 상심에 빠진 바르도는 TV에서 <마이 시스터 샘>을 보던 중 레베카 셰퍼를 발견하고 사랑에 빠진다. 그는 수많은 팬레터를 보냈고, 드라마 제작사인 워너브러더스의 홍보 담당자가 셰퍼의 사인과 함께 감사의 답장을 하기도 했다. 결국 바르도는 1987년에 고향인 애리조나의 투손에서 할리우드로 갔다. 셰퍼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스튜디오 안전 요원에 의해 저지되었다. 한 달 후 다시 LA로 간 바르도. 목적은 역시 셰퍼를 만나는 것이었고, 옷 안엔 안전요원을 물리치기 위해 몰래 칼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쫓겨났다. 그는 한동안 셰퍼에 대한 관심을 끊고, 당시 한참 인기를 끌던 틴에이저 아이돌인 데비 깁슨과 티파니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로버트 존 바르도
1989년 7월 18일, 그는 세 번째로 LA에 갔다. 셰퍼의 아파트 주변을 배회하던 그는 현관 벨을 눌렀다. <대부 3> 오디션을 준비하던 셰퍼는 시나리오 배달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지만, 문을 열었을 땐 자신을 팬이라고 밝힌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바르도는 그녀에게 자신이 받았던 답장과 사인을 보여주었고, 두 사람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셰퍼는 바르도를 보내며 찾아오지 말라고 했다. 근처 식당에서 아침을 먹은 바르도는 다시 셰퍼의 집으로 갔다. 시나리오가 온 줄 알고 문을 연 셰퍼에게 바르도는 총을 쏘았고, 가슴에 총상을 입은 셰퍼는 이웃에 의해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곧 사망했다. 22세의 젊은 나이였다.
바르도는 그 다음날 바로 체포되었고 자신의 범행을 쉽게 자백했다. 범행 현장에 갔을 때의 소지품 중 소설책 <호밀밭의 파수꾼>이 있었는데, 이것은 존 레넌을 죽인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우연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U2의 노래 ‘Exit’를 듣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쇳덩이에 손가락을 댔지. 권총은 너무 무거웠어. 그는 심장이 고동치는 걸 느낄 수 있었지”라는 대목에서 살인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1991년 법원은 그에게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레베카 셰퍼의 베드 신이 등장하는 <상류 사회> 스틸컷.
1982년에 테레사 샐다나가 칼에 찔리고, 1989년에 레베카 셰퍼가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나자 캘리포니아는 운전자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법을 통과시켜, 차량관리국이 함부로 개인 정보를 유출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두 사람은 모두 사립탐정이 차량관리국 자료를 보고 주소가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마이 시스터 샘>에 출연했던 동료 배우들은 총기폭력방지센터 설립을 위한 캠페인을 시작하기도 했다.
당시 셰퍼의 연인이었던 브래드 실버링은 이후 <꼬마 유령 캐스퍼>(1995) <시티 오브 엔젤>(1998) 등을 만드는 영화감독이 되는데, 2002년에 내놓은 <문라이트 마일>은 셰퍼의 죽음을 기리는 작품. 범죄자들에 의해 약혼녀를 잃고 비탄의 삶을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한편 바르도는 2007년, 복역 중에 다른 죄수에게 무려 11번이나 흉기로 찔리는 상처를 입었지만 다행히 목숨은 건졌고, 현재는 캘리포니아의 아이언우드 주립 교도소에 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