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공개된 미 중앙정보국(CIA)의 고문보고서를 접한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아마 공통적으로 이런 생각이 스치지 않았을까. 지난 9일 미 상원정보위원회가 공개한 보고서의 내용은 사람들을 충격을 넘어 공포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고문은 지난 2001년 9·11 테러 직후부터 자행됐으며, 알카에다 포로를 비롯한 수십 명의 테러 용의자들을 상대로 미군 기밀 기지와 관타나모 수용소 등 세계 도처에서 비밀리에 진행됐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보고서를 통해 자세하게 공개된 고문의 수법은 실로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사람이 같은 사람에게 어떻게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을까 경악하고 있는 미국인들은 지금까지 은밀하게 자행되어 온 CIA의 고문 실태가 드러나자 모두들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CIA 고문보고서 파문이 확산되자 존 브레넌 미국 중앙정보국 국장이 지난 11일 CIA 본부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CIA의 고문 행태는 우리의 가치와 역사를 훼손시켰다.” 이번 보고서를 공개한 다이앤 파인스타인 상원정보위원장은 500쪽 분량의 보고서를 공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총 6700쪽의 분량 가운데 보안상의 이유로 협의를 거쳐 500쪽으로 요약했다고 말한 파인스타인은 “실수를 하면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라고 말했다.
이번 보고서의 내용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그간 미군과 CIA 관계자들이 테러 용의자들을 상대로 실시한 끔찍한 고문 행태였다. 이른바 ‘선진 심문 프로그램’이라고 이름 붙여진 각종 고문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선진 심문 프로그램’이란 9·11 테러 직후 CIA가 새롭게 추가한 심문 기술들로 여기에는 구타는 물론이요, 물고문, 항문 강제 주입, 잠 안 재우고 세워놓기, 작은 상자 안에 가두기, 성고문, 전동 드릴 고문, 감각 이탈, 손바닥으로 때리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런 고문은 수십 일에 걸쳐 반복적으로 시행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한 심문관은 고문 대상자에게 “절대로 너를 법정에 세우는 일은 없을 거야. 왜냐하면 내가 너한테 한 짓을 세상이 알아선 안 되니까”라며 협박까지 한 것으로 드러났다.
고문은 주로 ‘블랙 사이트’라고 알려진 CIA가 운영하는 몇몇 비밀 기지를 비롯해 쿠바에 위치한 미군 기지인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이뤄졌다. 고문 대상자의 수에 대해 지난 2007년 당시 CIA 국장이었던 마이클 헤이든은 “약 100명의 수감자들 가운데 약 30명에게만 선진 심문이 시행됐으며, 물고문은 세 명에게만 실시됐다”라고 밝힌 바 있다.
CIA 고문 보고서를 공개한 다이앤 파인스타인 미국 상원 정보위원장이 지난 9일 미 의회의사당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에 반해 이번에 공개된 보고서의 내용은 조금 다르다. 보고서에는 CIA에 의해 구금된 포로의 수는 119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최소 26명이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집중적으로 고문을 당했던 인물들은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 아부 주바이다, 압드 알-라힘 알-나시리 등 9·11테러를 지휘했거나 혹은 미국을 상대로 테러를 저지른 것으로 의심되는 세 명이었다.
이에 앞서 지난 2005년 이미 CIA의 고문 실태를 보도했던 ABC 뉴스는 당시 전·현직 CIA 관계자들과 감독관들의 증언을 토대로 ‘선진 심문 프로그램’에 해당하는 가혹 행위가 2002년 3월 중순부터 실시됐다고 보도한 바 있다. 당시 인터뷰에 응했던 한 수감자는 “그들은 낮이건 밤이건 우리들을 가만 두지 않았다. ‘일어서, 앉아’를 반복해서 시켰다. 잠도 재우지 않았고 바닥에 앉지도 못하게 했다”라고 증언했다.
고문 수법 가운데 가장 악랄하기로 유명한 것은 ‘물고문’이다. 하지만 CIA는 2003년 이후로는 절대 물고문을 실시한 적이 없으며, 2006년에는 아예 ‘선진 심문 프로그램’ 목록에서 물고문을 완전히 삭제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상원 정보위원회는 이런 주장을 거짓으로 의심하고 있다. 그 후에도 물이 담긴 양동이가 놓여 있는 물고문 침대의 사진이 발견됐는가 하면, 지난해 한 수용소에서는 오래 사용해 낡을 대로 낡은 물고문 침대가 추가로 발견됐기 때문이다.
CIA가 주로 사용했던 물고문의 일종인 ‘워터보딩’ 수법은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머리가 아래를 향하도록 물고문 침대에 거꾸로 눕힌 상태에서 얼굴에 천이나 셀로판지를 덮은 뒤 그 위에 물을 붓는 방식이다. 이렇게 얼굴에 물을 부으면 코와 입으로 물이 흘러 들어가면서 바로 구토를 하게 된다. 이때 심문관은 물을 피하지 못하도록 얼굴과 턱을 압박하며, 대부분은 질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 곧바로 항복을 외치게 된다.
물고문 장면과 물고문 침대.
CIA 관계자에 따르면 항복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14초였으며, 그나마 가장 오래 버텼던 수감자는 모하메드였다. 그가 자백을 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2분~2분 30초였다.
모하메드에게는 총 183회에 걸쳐 물고문이 실시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2003년 3월에는 채 하루가 다 가지 않은 시간 동안 무려 65회에 걸쳐 집중적으로 실시되기도 했었다.
주바이다의 경우에는 총 83회의 물고문을 받았으며, 한번은 입에 거품을 문 채 완전히 의식을 잃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항문 주입’ 고문도 끔찍하기는 마찬가지다. ‘항문 주입’은 항문을 통해 직장으로 물이나 음식물을 주입하는 고문이다. CIA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고통이 심해 가장 효과적인 심문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최소 다섯 명의 수감자들에게 행해졌으며, 이 가운데는 모하메드와 주바이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항문고문을 당한 마지드 칸과 항문 주입 의자.
보고서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위치한 ‘솔트 핀’이라는 비밀기지에 수감되어 있었던 마지드 칸은 항문으로 음식물을 주입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고문은 점심식사로 나온 후무스, 파스타, 소스, 건포도를 한데 섞어 직장에 주입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그는 구금 당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여러 차례 자살 및 자해를 시도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또 다른 수감자는 수차례에 걸쳐 ‘항문 주입’ 고문을 받은 끝에 만성 치질과 치열 진단을 받기도 했다.
‘감각 이탈’은 주로 정신적 고통을 일으키는 고문 방식이다. 머리카락, 수염 등 온몸의 털을 깎은 뒤 알몸 상태로 낮은 온도의 흰 방에 가둔 다음 계속해서 큰 소리의 음악을 듣게 한다. 또는 반대로 완전히 어두운 지하 감옥에 쇠사슬로 묶어 감금한 채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는 방법도 있었다.
‘잠 안 재우고 세워놓기’는 이른바 ‘압박 자세’로 40시간 이상 서있도록 하는 것이다. ‘압박 자세’란 보통 알몸 상태로 손발에 쇠고랑을 채운 채 취하는 특정 자세(저울 자세, 비행기 자세, 오토바이 자세, 비둘기 자세 등)를 말한다. 보통 과도하게 한쪽 근육만 사용하기 때문에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
주바이다의 경우에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몸을 뒤로 45도 기울인 자세를 강요당한 적도 있었다. 또한 어떤 수감자는 쇠사슬이 묶인 채 머리 위로 팔을 들고 이틀 연속으로 매일 22시간 동안 서있기도 했다. 뿐만이 아니다. 심지어 다리나 발가락이 부러진 수감자에게 압박 자세를 강요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의족을 한 수감자에게는 손에 쇠고랑을 채운 채 잠을 자지 않고 서있는 고문을 실시하기도 했다.
성고문이나 심리 게임을 이용한 고문 방식도 자행됐다. 알몸 상태인 수감자들의 머리에 두건을 씌운 채 양쪽 복도를 오가면서 질질 끌고 다니거나 이 과정에서 구타를 가하기도 했다. 또한 수감자들의 가족을 상대로 협박을 일삼기도 했다. 대부분은 “네 엄마를 성폭행하겠다” “네 아이들에 해를 입히겠다”는 식이었다.
또한 수감자의 눈을 가린 채 머리 가까이에서 전동 드릴을 작동하거나 ‘러시안 룰렛’을 이용해 공포심을 유발하는 고문 방식도 사용됐다.
‘상자 안에 가두기’는 몸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의 작은 상자 안에 장시간 감금하는 식의 고문 형태였다. 주바이다의 경우에는 관 크기의 상자 안에 총 266시간 동안 감금된 적이 있었으며, 그보다 더 작은 박스 안에서는 29시간 동안 갇혀 지내기도 했었다. 그 과정에서 심문관은 주바이다가 벌레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상자 안에 벌레를 집어넣는 잔혹한 모습도 보였다.
이밖에 ABC 뉴스가 전현직 CIA 관계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밝힌 고문 수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가령 ‘움켜잡고 흔들기’ ‘손바닥으로 얼굴 때리기’ ‘복부 때리기’ 등이 그것이다. 턱과 귓불 사이를 손바닥으로 강하게 때릴 경우 다른 부위보다 수치심이 더하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 또한 손가락을 편 채 손등으로 복부를 때릴 경우에는 주먹을 사용할 때처럼 통증은 심하지만 내장기관에는 손상이 가지 않기 때문에 주로 이용하는 고문 방법이었다.
고문을 견디다 못해 결국 사망에 이른 경우도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테러조직의 요원이었던 굴 라만은 영하 10도의 감방 안에 팔다리가 묶인 상태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 심문관들은 그에게 주기적으로 차가운 물을 끼얹었으며, 비협조적이라고 판단될 경우에는 아예 옷을 다 벗도록 지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잔혹한 고문 수법에만 있지 않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CIA는 심문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있어 전직 군인 출신의 심리학자인 짐 미첼과 브루스 제센을 고용했으며, 이 과정에서 8100만 달러(약 890억 원)의 정부 보조금을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더 큰 문제는 두 심리학자들이 심문이나 대테러 작전 에 있어 비전문가라는 데 있었다. 더욱이 알카에다와 아랍 문화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었으며, 심지어 아랍어도 구사할 줄 몰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CIA에 의해 고용됐던 두 심리학자들은 2005년 고문 프로그램 개발 회사를 설립했으며, 지난 2009년까지 CIA에 고문에 필요한 학문적 지식과 고문 방법을 제공했다. CIA가 이들이 개발한 고문 프로그램을 직접 포로들에게 실시했던 것은 물론이었다. 이번 파문에 대해 미첼은 “CIA에는 목숨을 걸고 일하는 수많은 직원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는 9·11 테러 이후 미국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다”라면서 “이들이 심문 프로그램에 관한 내부 보고서를 조작해서 대통령과 의회를 속였다는 주장은 비열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처럼 고문이 정당한 행위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시 행정부 시절의 관료들이나 공화당 측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대부분의 고문이 부시 정부 시절 이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부시 전 대통령 역시 CIA를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CIA 직원들이 있다는 건 우리에게 행운이다. 그들은 애국자들”이라고 말했다.
반면 취임 직후부터 고문 행위를 일절 금지시킨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번 보고서 공개에 대해 찬성하면서 “CIA의 가혹한 고문 행위는 미국과 미국인들의 가치에 반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도 계속 대통령의 권한으로 고문을 금지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고문의 결과는 무엇? 수감자 고통 속 거짓 자백 일쑤 과연 고문을 당한 사람들은 진실만 털어 놓을까. 아니면 고통을 견디다 못해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더 많을까. 하지만 ‘선진 심문 프로그램’이 결국 테러 위협을 좌절시키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측은 정반대의 입장을 나타냈다. 이와 관련, 지난 2005년 ABC 뉴스는 “그렇게 받아낸 자백들은 신뢰할 수 없는 것들이다”라고 보도한 바 있다. 전 CIA 소속이었던 밥 베어는 “나쁜 심문 기법이다. 고문을 심하게 하면 누구에게서나 거짓으로라도 자백을 받아낼 수 있다”라고 꼬집었다. 이렇게 얻어낸 자백은 종종 그릇된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로 이어지게 된다. 알 립비가 제공한 정보가 바로 그러했다. 2주간 물고문과 함께 벌거벗고 차가운 감방 안에 서있는 고문을 당했던 그는 결국 자백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알 립비의 자백은 곧 부시 행정부를 통해 “이라크의 알 카에다 정예부대가 생화학 무기를 소지하고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는 모두 거짓말이었다. 알 립비는 사실 그런 훈련을 받은 적도 없었으며, 생화학 무기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문의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거짓으로 자백했던 결과였다. 이에 CIA의 한 관계자는 “물고문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너무 절박한 나머지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것을 거짓으로 말하게 된다”라고 지적했다. 상원 정보위원회 역시 “CIA는 잔혹한 심문으로 얻은 정보가 유용하다는 사실을 과장했다. 또한 고문 방법은 잔혹하고 야만적이었지만 그만큼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그 후에도 테러 위협이 계속됐다는 점은 고문 방법이 비효율적이었다는 것을 방증한다는 것이다. [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