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조사결과 이씨는 사채업자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뒤 승용차에 싣고가 강가에 내버린 것으로 밝혀졌다. 납치실종 사건이 살인사건으로 확대되는 순간이었다. 이씨는 숨진 사채업자 최덕만씨(가명•38) 밑에서 사채업을 함께 하던 박동수씨(가명•33)의 손위 손위 처남. 최근 매제 박씨가 최씨에게 갖은 모욕을 당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일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범행 후 이씨는 뉴스를 통해 자신의 모습이 CCTV에 찍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얼굴까지 뜯어고쳤다고 한다.
헬멧을 쓰고 범행을 하는 등 나름대로 용의주도하게 움직였던 이씨. 하지만 경찰의 추적을 끝까지 따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난 8월7일 오전 6시40분께 서울 청량리동 한 골목.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 차림의 한 사내가 포장마차 앞에 주차된 에쿠스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이윽고 승용차가 육중한 몸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일제 400cc 오토바이 한 대가 소리없이 뒤를 쫓기 시작했지만 승용차 운전자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40분쯤 달렸을까. 에쿠스 승용차가 멈춘 곳은 경기도 구리시 H아파트 지하 주차장. 차에서 내린 운전자가 엘리베이터에 올랐을 때 그때까지 조용히 뒤를 밟던 오토바이 운전자가 정체를 드러냈다. 갑작스레 품안에 있던 흉기를 꺼내든 것. 무방비 상태의 승용차 운전자는 변변한 반격도 해보지 못한 채 쓰러지고 말았다. 붉은 색 작업복을 상하로 입고 검은 헬멧을 착용한 오토바이 운전자는 이내 피해자를 에쿠스 승용차에 싣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른 아침이었던 탓에 목격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엘리베이터와 지하 주차장 곳곳에 설치된 CCTV 렌즈만이 말없이 사건 현장을 목도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파트에서 흉기 기습을 당한 피해자는 다름 아닌 사채업자 최덕만씨. 약관의 나이에 맨주먹 하나로 속칭 ‘청량리 588’에 진출했던 최씨. 거의 20년 가까이 그 일대에서 생활하는 동안 최씨에게는 자연스레 터줏대감이란 별칭이 붙게 됐다. 청량리 지역을 무대로 하는 토착조폭 ‘까불이파’ 조직원이라는 점은 그의 존재에 한층 무게감을 얹어 주었다.
최씨는 약 10년 전 또 다른 ‘건달’ 박동수씨를 알게 됐다. 같은 구역에서 활동했지만 뚜렷한 친분을 맺을 만한 계기는 없었다. 이 둘의 악연이 시작된 것은 신용카드 매출전표를 불법적으로 할인•유통시켜 이득을 얻는 속칭 ‘카드깡’ 사업 때문이었다. 몇 년전부터 신용카드가 일반화되면서 이곳 윤락가를 찾는 손님들도 카드로 화대를 결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문제는 업소가 신용카드 가맹점으로 등록하게 되면 높은 세금을 내야 한다는 점. 이 과정에서 허가받지 않은 윤락업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게 되는 ‘부작용’도 생길 수 있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윤락가에서 카드깡을 해주는 전문 업자들이 생기게 됐고, 이 ‘사업권’은 일대의 주요 이권으로 떠올랐다. 청량리 터줏대감 최씨와 박씨 가운데 카드깡사업에 먼저 뛰어든 것은 박씨였다. 일찍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그 규모라는 게 고작 2∼3곳의 업소를 기반으로 삼았던 만큼 영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지난해 2월 이곳 카드깡 업자들의 세력 판도에 커다란 변화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 용의자 이씨가 피해자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뒤승용차에 싣고 떠나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CCTV 녹화장면. | ||
상황이 이렇게 되니 비록 박씨가 2∼3년 먼저 사업에 손을 댄 ‘선배’였지만 큰 사업자로 부상한 최씨의 ‘아래’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힘이 지배하는 뒷골목의 생리가 카드깡업자 세계에서도 적용됐던 것. 게다가 최씨의 뒤에는 ‘까불이파’라는 무시못할 세력이 자리잡고 있었다. 경찰에 따르면 최씨와 박씨는 일정한 사무실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카드깡 사업을 하며 각각 ‘사장’과 ‘경리부장’ 정도로 역할을 분담했다고 한다. 최씨는 매달 2천만원 가량의 수입을 올렸고, 박씨는 최씨에게서 4백만원 가량의 월급을 받았다는 것.
이권으로 이어져 있던 최씨와 박씨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결국 돈문제 때문이었다. 사실 사장 역할을 하고 있던 최씨는 그날그날 수입만 점검할 뿐 모든 실무는 박씨가 맡고 있었다. 때문에 박씨가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수입 일부를 빼돌리는 게 가능했다고 한다. 실제로 박씨는 최씨 몰래 몇 차례 카드수수료를 가로채다 들켰고, 이때마다 최씨로부터 가차없이 심한 폭행을 당하곤 했다는 게 경찰과 인근 업주들의 설명이다.
심지어 박씨의 아내 이아무개씨(23)가 곁에서 보고 있을 때도 최씨의 폭행이 이어졌다고 한다. 가뜩이나 틀어지기 시작한 두 사람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 것은 지난 7월 중순. 경찰에 따르면 이 즈음 최씨는 박씨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에게까지 폭언을 퍼부었다고 한다. 박씨의 아내가 ‘밤거리 출신’이었다는 얘기까지 쏟아내며 그녀를 모욕했다는 것.
이 사건 이후 최씨와 박씨의 사이가 더욱 벌어진 것은 당연한 일. 견디다 못한 박씨는 “최씨 때문에 수입은 줄고 게다가 자꾸만 괴롭히니 못 살겠다”며 자신의 처지를 처남인 이준영씨에게 하소연하기에 이른다. 자신의 매제는 물론 어린 여동생마저 심한 모욕을 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이씨. 이에 그는 ‘(최씨를) 혼내주겠다’며 박씨와 함께 모종의 계획을 꾸몄다고 한다.
이때가 지난 8월3일이었다. 이틀 뒤 두 사람은 먼저 범행에 사용할 일제 400cc 오토바이를 구입했다. 최씨의 동선을 파악하기 위해 네 차례에 걸쳐 그의 집 근처를 사전답사하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마침내 범행당일인 지난 8월7일 오전. 청량리에서 일을 마치고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집으로 향하는 최씨를 미행한 이씨는 인적이 드문 지하 주차장 엘리베이터에서 그를 흉기로 찌른 뒤 서울 개화동 행주대교 중간지점 강물에 던졌다.
혹시 목격자가 범행장면을 지켜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작업복과 헬멧으로 자신을 위장했던 이씨. 하지만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다. 사건현장인 최씨의 아파트에 최근 신형 디지털 CCTV가 설치됐던 것.
그 CCTV 화면에는 아파트 주차장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가는 순간까지 이씨의 동작 하나하나가 선명히 담겨지고 있었다. 이 신형 CCTV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이씨는 결국 사건 발생 8일 만인 지난 15일 자신이 로드매니저로 일하던 인기 영화배우 P씨의 사무실에서 경찰에 검거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