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열린 통합진보당 해산심판청구 선고에서 헌법재판관 9명 중 8명의 찬성 의견으로 해산을 결정했다. 이후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와 소속 국회의원들이 선고 결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지난해 11월 5일, 통진당 해산심판 청구안이 국무회의를 통과 후 헌재에 청구된 이래 409일 만이다. 정당 해산의 시발점이 된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혐의에 따른 국정원의 압수수색은 지난해 8월 23일. 이를 기준으로 하면 통합진보당의 해산 절차는 1년 하고도 4개월이 걸렸다.
헌법재판소는 ‘이석기 의원이 주도하는 혁명적 급진 민족해방(NL) 세력이 과거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시절의 종북 이념을 진보당에서 유지하고 있고, 그 목적이 북한의 대남 혁명전략과 같다’는 법무부의 청구 이유를 받아들여 정당 해산을 선고했다. 통진당의 당헌 및 강령에 따른 목적과 당원들의 활동 내용이 ‘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해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헌법재판관 9명 중 김이수 재판관을 제외한 8명이 해산에 찬성을 표했다.
길고도 험난한 싸움이었다. 올해 1월 28일부터 지난 11월 25일까지 모두 18차례 공개변론이 있었다. 법무부는 2907건, 진보당은 908건의 서면 증거를 제출했다. 이는 A4 용지를 기준으로 16만 7000쪽의 분량이며, 종이 무게 880㎏, 높이 18m에 해당한다.
이에 따른 파장이 만만치 않다. 일단 오병윤(광주 서구을·원내대표), 이상규(서울 관악을), 김미희(경기 성남 중원), 이석기, 김재현(이상 비례대표) 등 현역 의원 5명은 19일부로 의원직이 상실됐다. 국회사무처는 이날 통합진보당 측에 현재 국회에서 제공하고 있는 본청 사무실과 의원들의 회관 사무실을 7일 내 비워줄 것을 통보했다. 예산 지원 역시 즉시 중단된다.
지방의회 소속 의원들의 처리는 아직 애매한 상황이다. 지방의원들의 자동 제명과 관련한 별도의 규정이 없기 때문에 소관 기관인 중앙선관위 역시 명확한 답을 유보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방의회 자체적인 결정이 판단의 기준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일각에선 각 지방의회에 설치돼 있는 윤리위원회를 통해 제명 절차가 진행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통진당 관련 송사 역시 큰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최근 통진당은 내부 교육 자료(추정)를 공개한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을 상대로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고소장을 제출한 바 있다. 이 밖에도 김미희, 이상규 의원은 ‘북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다’고 말한 김영환 시대정신 연구위원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상황이다.
이에 대해 한 법률학자는 “사례가 전혀 없기 때문에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다”라고 전제하면서도 “통진당이 고소한 사건과 반대로 고소당한 사건이 있지만 두 경우 모두 정당이 해산됐기 때문에 ‘당사자부적격’에 해당된다. 기각 혹은 각하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의원 개인의 명의로 고소한 사건은 추가적인 해석이 필요할 것”이라고 점쳤다.
현재 관련 송사 중 가장 관심이 모아지는 부분은 역시 정당 해산의 시발점이 된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혐의 최종심 결과다. 지난 8월 서울고법은 이 의원의 내란 음모 혐의에 대해 무죄로 판단했고 RO(혁명조직)의 실체도 없다고 판결했다. 다만 내란선동 혐의만 인정했다. 대법원의 최종 판결은 내년 1~2월께 나올 전망이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정당 해산 심판이 내년 이 의원의 최종심에 적잖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이 의원의 최종심 이후 헌재의 정당 해산 심판결과가 나오는 것이 올바른 순서 아니냐. 앞뒤가 맞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법조계 관계자에 따르면 대법원은 이미 이 의원의 상고심에 대한 심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통진당 해산 선고가 정치권에 던지는 파장은 가히 핵폭탄급이다. 선고 직후 여야는 앞 다퉈 입장을 내놨다. 새누리당 소속 김진태 의원은 보도자료를 내어 “사필귀정!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라고 환영했고 하태경 의원은 ‘486 동료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라는 논평으로 야당 486 의원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또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법원의 판결대로 존중하고 수용한다”고 했고 김문수 보수혁신위원장은 “대한민국 헌법을 수호하는 애국적인 결정을 용감하게 내려주신 박한철 헌법재판소장과 재판관에게 기립박수를 보낸다”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다음날인 지난 20일 박근혜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켜낸 역사적 결정”이라고 견해를 밝혀 눈길을 끌었다.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혐의에 대한 최종심 결과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또한 유기홍 새정치연합 수석대변인은 박근혜 대통령의 통진당 발언 내용이 보도되자 “박 대통령의 언급은 헌재 판결의 일면만을 평가한 것에 불과”하다며 “박 대통령과 청와대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지 않은지 뒤돌아봐야 한다”고 비판했다.
‘공식적’인 반응을 뒤로 하고 양대 정당 물밑에서는 향후 재·보궐 선거와 통진당 해산 사태가 가져올 손익 계산에 분주한 모습이다. 특히 새정치연합의 경우 이미 ‘헌재 자체에 대해 반발하지 않는 선’에서 스탠스를 맞추기로 어느 정도 내부 합의가 됐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 새정치연합 초선 의원은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기 얼마 전부터 (통진당) 해산 조짐을 느끼고 있었다. 당내에서 발언을 조심하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아무래도 최종결정자인 헌법재판소를 상대로 반발하긴 어렵다. 손 쓸 도리가 없는 까닭에서다. 당 입장이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새정치연합의 애매한 태도는 종북 논란에 휩싸인 통진당의 편을 들어주기도, 그렇다고 외면하기도 어려운 진퇴양난의 입장에 놓였기 때문이다. 김상진 뉴코리아연구소장은 “지금 새정치연합은 스탠스 취하기 애매하다. 이미 통진당 해산 반대 입장을 밝혀왔는데 묵묵부답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헌법재판소를 겨냥해 싸울 수도 없다”고 설명했다.
마땅히 목소리를 높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정당해산이라는 큰 물결에 휩쓸려 청와대를 겨냥해 왔던 야당의 동력도 힘을 잃게 됐다. 앞서의 초선 의원은 “정부가 통진당 해산 심판을 청구한 지난해 연말은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정국이 뜨거울 때였다. 이번에는 정윤회 문건 파문을 덮으려고 한다”고 주장했다. 심판 결과의 의도 여부를 떠나서 통진당 해산 선고가 향후 정치권의 ‘블랙홀’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수도권에 지역구를 두고 있는 새누리당 의원은 이렇게 평가했다.
“새누리당보다 청와대가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이득이다. 청와대는 정윤회 문건 파문으로 궁지에 몰리고 있었는데 그 근심을 털어낸 셈이다. 야당에서는 검찰 조사가 미진할 경우 국정조사를 해라, 특별검사를 해라 이런 분위기였다. 여론이 안 좋았기에 우리도 이것을 명확히 해결해야 빠져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정당해산은 엄청나게 큰 사건이다. 자연스럽게 정윤회 문건 파문이나 사자방(4대강·자원외교·방산 비리) 국조, 개헌 등의 이슈들이 묻히게 됐다.”
한 새누리당 고참 당직자는 “장기적으로 진보 진영이 위축될 것이다. 공안 관련 수사도 탄력을 받지 않을까 싶다. 새정치연합에는 운동권 출신들이 있지 않나. 새정치연합 당대표가 강경파가 된다면 또 (공안)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야당이 이슈를 놓치고 정당해산 정국 속에서 고심하고 있는 동안 청와대의 인적쇄신 여부에 대해서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청와대가 정윤회 문건 파문 관련, 검찰 수사가 종료되는대로 청와대를 개편하고 개각을 단행할 것이라는 예측이 힘을 얻고 있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지난 18일 춘추관에서 기자들을 만나 “언론에서 제시해주는 의견에 대해 눈여겨보고 있다. 쇄신요구에 대해 귀를 닫는다,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같은 언급은 앞서 국무총리와 비서실장 교체 등의 개각설에 대해 민 대변인이 “그런 움직임은 알고 있지 못하다”고 발언한 것과 사뭇 다르다.
청와대의 인사개편과 개각이 전략적으로도 유용하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김상진 소장은 “야당이 싸울 이슈가 사라진 상황에서, 박근혜 정권이 연말이나 연초에 청와대 인사개편과 개각 등으로 쇄신 분위기를 만들어 낼 경우 향후 국정운영에 유리해질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김다영 기자 lata1337@ilyo.co.kr
재창당 가능성 지도부 교체 후, 문제 강령 고치면… “오늘 저는 패배했다. 역사의 후퇴를 막지 못한 죄, 저에게 책임을 물어 달라. 오늘 정권은 진보당을 해산시켰고 저희의 손발을 묶을 것이다. 그러나 저희 마음속에 키워 온 진보정치의 꿈까지 해산시킬 수는 없다.” 지난 19일 헌법재판소의 정당 해산 선고 직후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가 심정을 표현한 말이다. 이 대표는 참담한 심정과 더불어 결의에 찬 재기의 의지 역시 동시에 표명한 셈이다. 통진당 해산 선고 이후 관심사 중 하나는 이정희 대표가 언급했듯, 잔존 세력의 재기 및 재창당에 대한 부분이다. 이미 오병윤 원내대표는 수차례에 걸쳐 ‘만약 정당이 해산된다면, 재창당하면 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 일단 법률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정당법 제40조에 따르면, ‘정당이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해산된 때에는 해산된 정당의 강령(또는 기본정책)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것으로 정당을 창당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물론 제41조에 따라 유사명칭의 정당 창당 역시 금지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비슷한 성격과 목적을 표방하는 정당 재창당은 금지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현재 헌재가 문제를 두고 있는 당헌과 강령의 일부를 적절히 수정하고 당명을 교체한다면 비슷한 성격의 ‘유사 정당’을 창당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통진당 해산 선고 후 한 새누리당 의원은 “법적으로 유사정당 출현은 언제든 가능하다”며 “여기에 이미 대중에 얼굴이 알려진 현 지도부 인사가 후방으로 빠지고, 이들을 대신할 제3의 인물을 ‘꼭두각시’로 내세운다면 사실상 재창당을 막긴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당 해산 직후 이상규 의원은 “지금 각계각층 인사와 의논 중이다. 계속 발전시켜서 진보정치를 새롭게 발전하는 기틀 만들고자 한다”며 “유사정당은 현재 법적으로 금지되기 때문에 법적 검토를 면밀히 거쳐서 진보정당을 다시 만드는 것을 포함해 다양한 방향을 추구할 것”이라고 밝혀, 이미 재창당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뒀다. 재창당과 별개로 통합진보당 소속 지역구 의원들의 내년 4월 재·보궐 선거 도전 가능성도 있다. 이날 이상규, 오병윤, 김미희 의원 모두 재보선 도전 여부를 속단하진 않았지만, 가능성 자체는 열어둔 상태다. 그렇게 되면, 재창당 이전 ‘무소속 연대’ 결성 후 소속 의원들의 국회 재입성을 노릴 수도 있게 된다. 범죄경력이 있는 전과자를 제외하고는 해산 정당 소속 인사들의 총선 재출마를 규제하고 있는 규정은 현재로서 없다. 역사에 길이 남을 통진당에 대한 헌재의 정당 해산 심판은 내려졌지만, 그에 따른 후폭풍과 잔존 세력의 재창당 가능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