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회 씨 국정 개입 문건’ 수사와 관련해 검찰은 박관천 경정의 1인 자작극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박 경정이 4일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는 모습.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최 경위와 한 경위의 폭로로 ‘민정수석실의 직권남용’은 새로운 의혹이자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청와대가 검찰에 수사를 의뢰한 상태에서 별도로 핵심 피의자를 만나 자백을 강요했다면 이는 명백한 수사 방해이자 직권남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당 언론의 보도가 나간 직후 한 경위가 변호인을 통해 인터뷰를 부인하면서 회유 여부는 미궁 속으로 들어갔다.
또 하나의 의혹은 박 경정이 과연 무엇 때문에 큰 파문을 일으킬 것을 알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청와대 문건을 외부로 반출한데 이어, 박지만 EG 회장에게 미행 보고서를 작성해 전달했느냐 하는 점이다. 박 경정은 그동안 자신이 한 일을 ‘사명감’이나 ‘업무의 일환’ 등의 표현으로서 항변해 왔다. 하지만 일개 경찰 중간 간부인 박 경정이 앞장 서 권력 암투를 조장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는 분석이다.
검찰은 박 경정이 허위 문건을 작성하고 유출한 배경이 무엇인지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와 관련, 박 경정의 청와대 재직 시절 직속상관이었던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이 박 경정 문건 작성과 반출에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 파악하는 데에도 공을 들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박 경정이 박지만 회장 측에 전달한 ‘박지만 미행설’ 문건의 경우 검찰은 완전한 날조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박 경정이 아무런 근거 없이 특정 인물의 실명을 거론하며 미행설을 퍼트리고 문건을 작성할 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문건에서 미행자로 지목됐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소재 유명 카페 대표의 아들 최 아무개 씨(49)는 검찰 조사에서 “정윤회도 모르고 박관천도 모른다. 내가 왜 문건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에서 최 씨는 20년 전에 오토바이를 탔고, 5년 전부터는 스쿠터를 1년 타다가 그마저도 이제는 안탄다고 밝혔다.
박 경정에게 ‘최 씨가 박 회장을 미행했다’고 전달했다는 전직 경찰관 A 씨는 검찰에서 “박 경정이 최 씨가 오토바이를 타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해 ‘최 씨가 젊었을 때 오토바이를 탔다고 하더라’는 얘기만 박 경정에게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박 경정은 과거 남양주 경찰서 형사과장으로 근무하면서 관내 유명 업소인 해당 카페의 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전직 경찰관 A 씨는 박 경정이 남양주서에서 근무할 때 박 경정 밑에서 팀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미행이 이뤄졌다고 알려진 지난해 11~12월에는 이미 경찰복을 벗은 상태였다.
검찰은 최 씨의 통화 내용 등을 추적했지만 박 경정 등과의 통화 흔적을 찾지 못했다. 검찰 측은 박 경정과 A 씨가 통화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해당 문건은 모두 허위라는 입장이다. 박 경정이 완전한 날조를 통해 문건을 작성했다는 얘기다. ‘그럴 만한 명분이 있었겠느냐’는 지적에 대해 일각에서는 소위 ‘출세’를 위해 박지만 회장 측에 관련 문건을 작성해 전달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제기되고 있다. 이와 관련, 한 경찰 관계자는 “박 경정은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장으로 있을 때 청 안팎에서는 ‘정략적으로 일 처리를 하는 스타일’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건이 검찰 발표대로 완전한 날조가 아닐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박 회장이 검찰 출두 전에 지인을 통해 ‘정윤회가 계속 거짓말을 하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다’는 식의 강력 발언을 내 놓으면서, 검찰 조사 때 미행자의 자술서를 제출할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오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박 회장은 정작 검찰에서 지인으로부터 미행을 당하고 있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 미행한 사람을 본 적도 없고 자술서도 없다고 돌연 태도를 바꾸는 모습을 보였다. 일각에서 ‘사건이 마무리 돼 가는 시점에서 굳이 누나인 박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밖에 검찰은 새정치민주연합이 ‘국정농단 의혹’을 제기하며 정윤회 씨와 청와대 비서진 등을 고발한 사건도 곧 수사에 착수할 예정이다.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언론 인터뷰 내용대로 정윤회 씨 부부가 문체부 국·과장 인사에 개입했는지 여부 등이 가려질 전망이지만 현재로서는 큰 기대를 하기 어렵다는 게 야당의 판단이다. 한 야당 관계자는 “우리는 검찰 수사에 더 이상 기댈 수 없다는 입장이다. 특검은 이미 새누리당 일각에서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위기다”고 전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이 공개적으로 특검과 국정조사, 청문회, 국회 운영위원회 소집 등 동원 가능한 모든 카드를 꺼내들며 정부와 여당을 압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새누리당도 선택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한 시사평론가는 “모든 일이 정윤회 씨의 뜻대로, 얘기한 대로 귀결이 됐다. 결국 모든 의혹은 없던 일로 정리가 돼 가는 분위기다. 박관천이라는 미꾸라지 한마리가 분탕질을 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만 제거하면 청와대 시스템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국정 운영을 앞으로도 그대로 하겠다는 뜻이다. 3인방의 역할도 그대로일 것이란 얘기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찌라시에 나라가 흔들리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국가의 최고급 비밀정보를 쥐고 있는 청와대에서 고작 찌라시나 생산하게 만드는 한심한 시스템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사과도 없었다. 그리고 정윤회 문건 파동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사태 등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수많은 의혹을 뒤로한 채 조용히 묻혀가고 있다.
이연호 기자 dew901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