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을 떠나 모교인 아주대 감독을 맡고 있는 하석주 감독은 “가족들이 웃음을 되찾았다”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사진제공=전남 드래곤즈
―지난 11월 29일, 인천유나이티드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를 끝으로 전남 드래곤즈와는 이별을 고했다. 아직도 마음속에는 전남이란 팀에 대한 회한이 남아 있을 것 같은데.
“학교로 돌아오니까 마음은 편하다. 하지만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정말 힘들었다. 그만두기로 결정한 것보다 그걸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걱정부터 앞섰다. 가족에 대한 얘기를 꺼내면 가족들이 부담스러워 할 것 같고, 그 얘기를 감추자니, 그만두려는 명분이 생기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가족들 얘길 꺼냈는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감독직에서 물러날 결심은 언제부터 한 건가.
“지난 5월에 결정했다. 어머니가 강원도 양양에서 혼자 지내시는데, 다리를 다치시는 바람에 거동이 불편하다. 이전에 어머님을 모셨던 큰형님 내외가 교통사고와 암으로 모두 돌아가셨다. 서울로 모시고 싶지만, 어머니는 절대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으셨다. 광양에서 어머님이 계시는 양양까지 가려면 차로 5시간 30분이 걸린다. 한 달에 한 번 찾아뵙는 것도 버거울 정도였다. 아내도 아파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갑상선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했지만, 모든 걸 혼자 감당해야 했다. 아들만 셋인데, 그중에서 중학교 1학년에 올라가는 막내가 축구를 시작했고, 쫓아다니면서 챙겨줘야 한다. 아픈 아내가 아이들을 챙기며 멀리 계시는 어머니까지 돌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렇듯 가족들이 힘들게 생활하는 걸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아들이, 남편이, 아빠가 필요한 가족들에게 내가 함께 있어줘야 했다. 그래서 광양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9월부터 사장님이 내년 준비 빨리 하자고 재촉하셨다. 그러면서 2년 재계약을 제안하셨고, 연봉도 지금 받고 있는 2억 5000만 원에서 1억 원을 더 인상해주겠다고 하시더라. 그렇게까지 배려하고 애써주시는데, 그만두겠다고 말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나한테는 연봉 5억, 10억이 전혀 의미가 없는 상황이었다. 사장님께 어렵게 사퇴 의사를 밝혔더니 한 마디로 난리가 났다. 아무리 집안 사정을 설명해드려도 쉽게 납득하지 못하셨다. 나 같아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웃음). 연봉을 1억이나 더 올리면서 2년 재계약하자고 나섰는데, 그걸 뿌리치고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제정신으로 보이겠나.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구단을 설득하고 있었다.”
―코치나 선수들의 반응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김병지, 스테보, 현영민 등은 내가 데려온 선수들이다. 날 믿고 전남에 왔더니 감독이 그만두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내가 그만두면 자기들도 축구 그만하겠다고 협박(?)해 왔다. 코치들의 반응은 더 했다. 행복한 고민이었지만, 그만두는 게 이토록 어려운 건지 처음 느꼈다.”
―가족들이 광양으로 이사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둘째가 내년이면 고3이다. 아이들은 어렸을 때 학교만 4번이나 옮겨 다녔다. 만약 광양에 왔다가 감독직에서 잘리면 또 이사해야 하는 처지다. 아빠의 잦은 이동으로 아이들이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가족들은 분당에서 살고, 내가 옮겨 다녔다. 광양으로 오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석주 감독 이임식장에서 박세연 전남 드래곤즈 사장이 하 감독에 감사패를 전달하는 모습. 사진제공=전남 드래곤즈
―2012년 전남 드래곤즈 감독으로 선임됐을 때, 가장 어려운 시기에 팀을 맡아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슈퍼스타도 없고, 베테랑 선수도 없었다. 구단 사정이 열악해지면서 선수단 지원이 대폭 줄어들었을 때 팀을 떠안으면서 말로 표현 못할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전남으로부터 처음 감독 제안을 받았을 때 뛸 듯이 기뻐했다. 당시 아주대와 3년 계약 후 1년 8개월을 보냈고 2011년 모교 부임하자마자 11년 만에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시키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프로 감독이 되는 걸 꿈꾸고 있었고, 정말 기다렸던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하니까 그걸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대학측에서 내 입장을 이해해줬고, 부푼 마음을 안고 광양으로 향한 것이다. 광양에서 척박한 현실을 인지하기까지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선수도 데려 올 수 없었고, 나이 어린 선수들을 데리고 어떻게 해서든 성적을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오죽했으면 ‘하석주 유치원’이라고 불렸을까. 무엇보다 내가 팀을 맡을 때부터 시작된 승강제로 인해 늘 강등과 성적 부담에 대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좋아했던 골프도 끊고, 사람들과의 연락도 단절한 채 광양에서 선수들과 동고동락했다. 성적이 안 좋을 때는 외출도 자제했다. 나랑 같이 대표팀이나 일본에서 함께 뛰었던 황선홍, 최용수는 우승을 놓고 고민했지만, 난 강등에서 탈출하려고 머리를 쥐어짰다. 자존심도 상했고, 열도 받고, 정말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감독은 되기도 힘들지만, 그걸 지켜나가기도 어려운 자리인 것 같다.
“난 순진해서 열심히만 하면 (프로)감독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이 바닥은 실력 외에 ‘끈’이 중요하다. 즉 정치적인 힘이 있어야 감독으로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난 오래 전부터 한 가지 원칙을 세웠었다. 정치를 타고 감독은 하지 않겠다고. 그래서 줄곧 코치만 하다가 감독이 되지 못하고 아주대 감독을 맡게 된 것이다. 전남에서의 감독 제의는 정치가 배제된 순수한 제안이었다. 그들의 부름에 눈물이 날 정도였다. 그런데 팀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불러주는 바람에 내가 미칠 지경이었다.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나에게 기회를 준 분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체중이 8kg이나 빠질 만큼 팀에 몰두했다. 그러다 조금씩 성적을 내고, 올시즌에는 베테랑 선수들도 데려오면서 울산 현대와 상위 스플릿 경쟁을 벌일 정도의 전력을 만들었다. 한 가지 더! 팀 전력 이탈에도 불구하고 이종호, 안용우, 김영욱 등 3명의 전남 선수가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발탁,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병역면제 혜택을 받았다. 만약 팀 성적이 여전히 바닥을 헤매고 있고, 선수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면, 팀을 떠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2년 5개월 동안 어느 정도 팀을 안정시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노상래 코치(현 전남 감독)에게 팀을 맡기고, 미련 없이 나올 수 있었다.”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하 감독이 선수들을 지도하는 모습, 7월 19일 성남전 승리 후 인터뷰, 8월 6일 이달의 감독상 수상, 11월 29일 인천과 시즌 마지막 경기이자 고별전을 마친 후 팬들에 사인해주는 모습. 사진제공=전남 드래곤즈
―축구인들도 하석주 감독의 선택을 지지하기 보다는 만류하는 분위기였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문자와 전화를 통해 안타까움을 표현해주셨다. 그중에서 홍명보의 얘기가 기억에 남는다. 그 사람도 힘든 처지인데, 오히려 날 더 걱정하더라. 그러면서 ‘형, 나도 어려운 일을 겪다보니까 가족이 최고의 위안이 된다는 걸 느꼈다. 형이 힘들게 결정한 만큼 뒤돌아보지 말고 가족을 위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믿고 가길 바란다’라고 얘길 해주더라. 최용수는 내가 전남에 있을 때 선수 좀 달라고 하면 절대 내주지 않았던 나쁜 X였다(웃음). 그러면서 내가 떠난다고 하니까 기자들에게 형님 그만두면 안 된다며 주옥같은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있을 때 좀 잘하지(웃음). (황)선홍이, 최강희 감독님, 모두 마음 아파하셨다. 올 시즌 전남과 마지막 경기를 치른 인천유나이티드의 김봉길 감독은 경기 후 꽃다발을 전해주더라. 모두 감사했다.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대학 감독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을 텐데, 언제쯤 다시 프로에 돌아올 생각인가.
“프로는 내가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지만, 감독으로 다시 가게 된다면 좀 더 나이 먹어서 도전해 보고 싶다. 당분간은 대학에서 어린 선수들 육성에 주력하겠다. 어쩌면 프로 지도자보다 학원 축구를 가르치며 선수들을 발굴하고 키워내는 것이 더 보람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석주 감독은 출퇴근이 가능한 아주대에서 다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희생으로 가족들은 웃음을 되찾았다는 얘기도 전한다. 그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