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의자 전씨가 홍씨를 살해한 뒤 불태워 암매장 한 구덩이에서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 ||
경찰에 따르면 피의자 전근호씨(가명·51)는 숨진 피해자가 수억원대의 재산을 지니고 있는 점을 노리고 내연녀 홍화자씨(가명·52)를 살해했다는 것.
특히 전씨는 이를 감추기 위해 또다른 내연의 여인을 내세워 홍씨 행세를 하게 하는 등 ‘완전범죄’를 꾀했다. 전씨를 도와 홍씨 행세를 한 내연녀 이명희씨(가명·51)는 사기 등의 혐의로 전씨와 함께 구속됐다.
완전범죄를 노린 전씨의 내연 여인 살인극을 쫓아가 봤다.
지난해 12월13일 오전 10시 서울 양천구 신정동 A아파트 ○○○호. 에서는 중년 여성의 외마디 비명이 새어나왔다. 날카로운 비명이 울린 것도 잠시, 이내 A아파트는 잠잠해졌다.
이날 이 아파트에서 울린 정체불명의 비명은 ○○○호의 주인 홍씨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육성이었다. 홍씨와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던 택시기사 전씨가 그녀의 수억원대 재산을 노리고 살해한 것이었다.
전씨가 홍씨를 알게 된 것은 사건이 일어나기 8년 전. 당시 전씨는 1t 화물트럭에 과일을 싣고 다니며 행상을 하고 있었다. 그의 주된 거래처는 과일을 고정적으로 필요로 하는 술집이나 음식점이었다.
당시 홍씨는 서울 강서구 화곡동 일대의 이른바 ‘곰달래길’에 즐비하게 늘어선 유흥업소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거의 매일 서로 얼굴을 마주치다 보니 나이가 비슷했던 홍씨와 전씨 두 사람은 이내 내연의 관계로 발전하게 됐다.
홍씨는 혼자 살고 있었기에 전혀 문제될 게 없었고, 전씨 또한 부인과 두 아이들이 있긴 했지만 바깥에서의 일에 대해서 가족들에게 일일이 간섭을 받는 처지는 아니었다
이따금 홍씨의 아파트에 들러 위험한 로맨스를 지속해가던 이 두 사람 사이에서 문제가 불거진 것은 지난해 닥쳐온 전씨의 금전적 어려움 때문이었다.
전씨는 자신을 포함해 네 식구가 단칸방에서 살 만큼 형편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헤픈 씀씀이 탓에 그동안 키워온 채무가 무려 1억원을 훌쩍 뛰어넘어 버린 것.
금융기관의 빚독촉이 차츰 심해지자 전씨의 마음속에서는 검은 야심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던 돈많은 독신녀 홍씨를 살해한 뒤 그녀의 재산을 가로채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서울에만 아파트 두 채와 상가 한 채를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부자였다. 게다가 그녀는 1억5천여만원이 넘는 예금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동안 홍씨와 내연의 관계를 맺고 지내면서 전씨는 홍씨의 재산 상태를 모두 알게 됐다. 특히 독신녀인 그녀가 가족들과 거의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낸다는 점이 전씨로서는 호재(?)였다.
비록 그녀가 저 세상으로 사라진다고 해도 자신만 입다물고 있으면 그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를 살해한 뒤의 일이었다. 비록 자신이 홍씨의 내연의 남자이긴 했지만 법적으로는 그녀의 재산을 상속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떠오른 묘안은 바로 ‘사람 바꿔치기’였다.
어차피 가족도 없는 홍씨이고보면 그녀와 비슷한 누군가가 홍씨 행세를 하고 다닌다고 해도 이를 의심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사람이 전씨의 또다른 내연녀 이씨였다. 마침 이씨는 나이도 홍씨와 비슷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이 같은 계획에 따라 지난해 12월13일 오전 10시 홍씨의 아파트에 들어선 전씨는 그녀의 복부와 가슴을 수회 걷어차 바닥에 쓰러뜨리는 등 마구 폭행해 살해했다.
또 사체는 자신의 차로 인천 계양구 하야동 도로변 옛 예비군 훈련용 참호로 가져가 남김없이 불태워 버렸다.
증거인멸에 성공한 전씨는 일단 지난해 12월13일부터 같은달 31일까지 8차례에 걸쳐 홍씨의 신용카드를 통해 2천4백만원 상당의 ‘카드깡’을 해 급전을 융통했다. 그 다음의 작업은 숨진 홍씨가 소유하고 있는 아파트에 자신이 전세를 들어온 것으로 위장하는 일이었다. 전세계약서를 통해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모든 계획이 뜻대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아파트 주인의 동의없이 전세계약서만으로 대출을 내주는 곳이 없었던 것. 이때부터 조금씩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한 전씨는 애초의 계획대로 내연녀 이씨를 동원해 홍씨의 재산 명의를 하나하나 자신에게 바꾸는 작업에 착수했다.
먼저 지난 1월9일 내연녀 이씨가 홍씨인 것처럼 위장해 전화국을 방문한 전씨는 전화국 직원들을 속이고 홍씨 집 전화의 명의변경에 성공했다. 다음에는 신길동 한 이동통신사를 방문해 똑같은 방법으로 휴대폰 명의를 자신에게 돌려놨다.
애초 계획에 따라 홍씨의 재산을 빼돌리는 절차를 하나하나 실행해가던 전씨. 완벽한 사체유기에 이은 감쪽같은 사람 바꿔치기까지, 거의 완전범죄를 이룰 것만 같았던 전씨의 범행은 여기까지였다.
바로 숨진 홍씨 오빠의 존재를 까맣게 몰랐던 것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홍씨의 오빠는 이따금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 12월13일 그녀가 전씨에게 살해당한 뒤 연락이 끊겨 몇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자 지난 2월 경찰에 홍씨의 실종신고를 하고 말았다.
경찰은 홍씨가 가출할 만한 뚜렷한 이유가 없다는 점을 수상하게 여겨 수사에 착수했다. 일단 경찰은 그녀가 근무하던 업소부터 찾았다. 업소 관계자 또한 “지난 2년 동안 이렇게 아무 연락없이 나오지 않은 적이 없었다”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는 마찬가지.
홍씨의 증발이 예사 가출이 아님을 직감한 경찰은 신고접수와 함께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고 마침내 지난 1일 전씨를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완전범죄’라는 허황된 꿈을 쫓은 전씨의 기도는 결국 끝장나고 말았다.
한편 수사를 담당했던 서울 양천경찰서 소속 관계자는 “피의자 전씨는 범행을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던 듯 거리낌없이 소환에 응하는 등 인면수심의 모습을 보였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