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의 중의원 선거 압승으로 엔화약세 정책이 가속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평일 점심시간. 회사원 오카노 씨(가명·46)는 치솟는 물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이전까지는 5000원이면 먹을 수 있던 고등어정식이 이제는 최소 1만원은 내야 한다. 회사 옆에 있던 패밀리레스토랑은 언제부턴가 부유층 전용 고급레스토랑으로 바뀌어 감히 발걸음을 들여놓을 수도 없게 됐다. 주가는 분명 오름세가 이어지고 있지만, 주식을 살 여유조차 없는 그에게는 언감생심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과거 아내와 즐겨 찾던 긴자백화점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점령했다. 유니클로 계산대는 절반 이상이 면세 대응 창구다. 엔화약세가 모든 것을 바꿔 버렸다. 전기요금도, 건강보험료도 오르면서 생활고는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 인근 공원에는 빵 한 조각 살 수 없는 실업자들을 위해 무료급식소가 마련돼 긴 행렬이 이어진다.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가 대학시절 친구의 모습을 발견한 오카노 씨는 차마 눈을 피하고 말았다.
이는 1달러당 160엔까지 엔화가 평가 절하됐을 때의 시나리오다. 현재 엔·달러 환율은 120엔을 넘나들고 있는 상황. 물론 “지나치게 과장된 시나리오”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도쿄대학의 와타나베 쓰토무 교수는 “터무니없는 소리로 치부하긴 어렵다”고 경고한다.
그의 설명을 빌리자면, “일본 정부는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단행함으로써 엔저를 가속화하고, 물가상승을 유도해 20년간 시달려왔던 디플레이션(물가하락과 경기침체의 악순환)을 탈출하겠다”는 그림을 그렸다. 시작은 약발이 통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지난 4월, 소비세 인상 여파로 수요가 주춤해질 것을 우려한 유통업계가 특가판매를 늘리면서 물가는 디플레 방향으로 환원됐다.
와타나베 교수는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일본 정부가 또 다시 금융완화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1달러=160엔’이라는 숫자는 바로 일본 정부가 목표로 하는 물가상승률 2%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적정 환율이라는 것. 그렇다면 실제로 환율이 1달러당 160엔까지 치솟을 경우 일본 경제는 어떻게 바뀔까.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물가 상승률에 맞는 임금인상이 없다면 일본 경제에 부정적인 여파만 커질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서민생활이 악화될 뿐만 아니라 긍정적 효과도 미비해 일부 기업만이 혜택을 누린다는 분석이다.
가령 전자업계를 살펴보면, 소니와 파나소닉은 엔저 혜택이 거의 없다. 특히 소니는 환율이 1엔 떨어질 때마다 영업이익이 30억 엔 날아간다. 소니가 주력하는 제품의 핵심부품 수입가격이 크게 오르기 때문이다. 이미 적자 상태인 소니는 더욱 궁지에 몰릴 공산이 크다.
소매업계에서도 엔화약세는 단점으로 작용한다. 해외에서 제품을 생산해 판매하는 유니클로의 경우 동남아보다 인건비가 싼 아프리카로 공장을 옮기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반면 일본 자동차 업계는 엔저에 따른 가격 경쟁력 강화로 가장 큰 이익을 볼 것으로 전망되지만, 문제는 미국의 대응이다. 도요타의 영업이익이 일정액을 넘으면 미국 공화당이 일본차 수입제한을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아베 정권이 탄생하기 2년 전 환율은 1달러=80엔대였다. 즉 1달러=160엔이라는 숫자는 외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 물가가 반액 수준이 된 것과 마찬가지다. 먼저 중국인들의 투자 열풍이 심상치 않다. 현재 중국인들은 임대수익률이 높은 도쿄 아파트를 중심으로 일본 내 부동산을 야금야금 사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엔저가 가속화되면 일본의 주요 부동산은 중국인들의 손에 넘어가 투기성으로 변질될 위험이 높다. 임대료가 급등하면서 정작 일본인 샐러리맨들은 도심에서 살 수 없는 상황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다.
부유층을 제외하고는 ‘먹고 살기 힘든 시대’가 도래한다. 일본은 식량 6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환율이 160엔대가 되면 결국 중산층의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 간장, 된장, 두부, 낫토 등 일본 요리의 핵심재료가 되는 콩 자급률은 7%에 불과하다. 만약 소비세 인상이라는 더블펀치를 맞는다면 일반 가계 살림살이는 더욱 휘청거릴 것이 분명하다.
일각에서는 “엔화가 약세를 보이면 대기업이 해외로 옮겼던 공장을 일본으로 다시 옮겨 일자리가 생기고, ‘제조업대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꿈을 꾸고 있지만, <주간겐다이>는 “그럴 가능성은 적다”고 지적한다. 이미 일본 대기업들은 환율이 변동돼도 실적에 영향을 받지 않는 체제구축 마련에 나섰으며, 엔화약세에 따른 수익력을 갖춘다하더라도 오히려 해외생산을 늘려 글로벌화를 밀어붙일 가능성이 크다. 설상가상, 중소제조업은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도산이 불가피해 서민들은 일자리를 잃을 위험성이 높은 편이다.
그래도 주가는 급등한다. 엔화약세로 해외투자자들에게는 일본 주식이 상당히 저렴해지기 때문이다. “2015년 닛케이 평균지수가 2만 엔까지 상승한다”는 견해가 많은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하지만 투자분석가 이노우에 데쓰오는 “이는 실물경제가 침체된 상태에서 주식만 오르는 거품에 불과하다”면서 “언젠 거품은 필연적으로 사라진다”고 일침을 가했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