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전 <일요신문>에서 ‘그 사람 지금은’이란 코너를 진행할 때 당시 거제고 감독이었던 김종부 감독을 만난 적이 있었다. 세월은 많이 흘렀는데, 여전히 지도자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나도 그 기억이 난다. 멀리 거제도까지 오셔서 날 인터뷰하셨던 장면들이. 서로 열심히 살다 보니까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 아닌가(웃음).”
―화성FC를 이끌고 있는 것을 얼마 전에 알았다. 챌린저스리그 우승 기사들 속에 김 감독 이름이 적혀 있더라.
“사실 3부리그인 챌린저스리그는 언론의 관심이 거의 없는 편이다. 챙겨서 보지 않으면 우리가 무슨 축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화성FC는 창단한 지 2년 된 팀이다. 창단 첫 해인 지난 시즌(2013년) 아깝게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지만 올 시즌(2014년) 챌린저스리그 통합 2위에 올라 챔피언결정전에서 포천시민축구단을 꺾고 첫 우승을 차지했다.”
―창단 2년 만에 우승까지 거뒀다는 게 놀랍다.
“화성시의 뒷받침과 선수들이 노력한 결과다. 현재 챌린저스리그에는 18개 팀이 있다. 그 팀들과의 경쟁에서 이긴 거니까 칭찬을 받을 만하지만, 내가 이 팀을 맡은 이유가 우승만이 아닌 화성시에 유소년 축구를 활성화시키고 초중고 축구부를 부흥시키는 등 전체적인 축구 붐 조성을 위해 이곳과 인연을 맺었다. 지금은 그 길을 가기 위한 걸음마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2014 KFA 어워드 시상식에서 일반부 최우수 지도자상 수상한 김종부 감독(맨왼쪽). 연합뉴스
―선수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
“순수 실업팀 선수가 30%, 2부리그에서 내려온 선수가 40%, 그리고 프로에서 뛰다가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 중인 선수들이 퇴근 후 우리 팀에서 훈련하는 선수들이 20%, 나머지 일반 선수가 10% 정도 된다. 여기서 좋은 모습을 보이는 선수는 2부리그 팀으로 올라가기도 한다. 우승도 기쁘지만, 좋은 팀으로 ‘승진’해서 올라가는 선수들이 나타날 때 표현 못할 기쁨을 맛본다.”
K3 챌린저스리그는 순수 아마추어를 표방하는 풀뿌리 축구로 2007년 창설됐다. 대부분 소규모 자본으로 창단돼 연봉 없이 승리 수당으로 평균 15만~20만 원 정도를 받는 게 전부라 공익근무를 하면서 잠시 프로 대신 뛰는 일부 선수들을 빼면 직업 선수는 찾아보기 힘들다.
―구단 버스나 숙소 등이 제대로 준비돼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축구할 만한 환경이 열악한 편인가.
“선수단 전용 버스는 없지만, 경기 때는 관광버스를 빌려 이동한다. 훈련할 때는 봉고차를 이용하기도 하고. 시에서 아파트 두 채를 선수단 숙소로 지원해주셨다. 다른 팀에 비해선 환경이 좋은 편이다. 다른 팀은 경기장에도 선수들이 각자 알아서 개별적으로 오기 때문에 유니폼 갈아입기 전에는 선수와 관중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운동 환경은 아마추어이지만, 실력은 뛰어나다. 선수 구성이 다양하고, 프로 경험을 한 선수들이 뛰고 있어 경기 내용이 수준급이다.”
2001년 7월 거제고 감독 시절 <일요신문>과 인터뷰를 했다.
―거제고 감독을 시작으로 많은 팀을 옮겨 다녔다. 동의대-중동고-양주시민축구단, 그리고 지금 화성 FC 감독을 맡고 있는데, 선수시절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지도자 생활이.
“뭐, 선수 때도 멕시코 청소년대회를 제외하곤 그리 화려하지 않았다. 이번 우승으로 선수들로부터 헹가래를 받았는데, 순간 뭉클한 감동과 함께 내가 걸어온 시간들이 동시에 떠오르더라. 주위에서는 너무 오랫동안 학원 축구에 머물다보니 정작 프로에 갈 수 있는 타이밍을 놓쳤다고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열심히 살았다. 거제고에서는 6년 동안 우승 1회, 준우승 4회를 이뤘고, 대학축구의 최하위권에 머물렀던 동의대 감독으로 부임 후에는 1년 반 만에 8강에 진출, 준우승까지 올라갔다. 양주시민축구단은 친구가 그 팀의 단장이라 도움을 주는 차원이었다. 그 다음 맡은 팀이 지금의 화성FC이다.”
―인터뷰 시작하기 전에 부업을 한다고 얼핏 들은 것 같은데, 어떤 일을 하는 건가.
“아는 선배와 화성에서 장어 포장마차를 하고 있다. 리어카 포차가 아닌 실내포장마차 같은 형태다. 내 고향이 통영이고, 거제에 아는 분들이 많아서 자연산 장어를 거제에서 직접 공수해온다. 최근에 오픈을 했기 때문에 아직 입소문이 나진 않았다. 그래도 장어가 맛있다며 찾는 분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종종 선수들 영양 보충도 시킬 겸, 집에 생활비도 갖다 줄 겸 해서 시작했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 불가리아 상대 동점골. 연합뉴스
―그래도 ‘김종부’ 하면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축구인들 사이에서도 찾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괜찮은 건가.
“‘김종부’란 이름을 지키려고 이 일을 시작했다. 생활이 어려우면 지도자들이 다른 길로 새기 마련이다. 학부모에게 손을 내밀고, 선수를 갖고 장사를 한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싶기 때문에, 나로선 그들을 뭐라 할 수 없다. 그런 ‘막장’을 가지 않으려고 이 일을 하게 됐다. 창피하지 않느냐는 사람들도 있는데, 뭐가 창피하나. 도둑질하는 것도 아닌데.”
―지도자 생활이 ‘배고픈 직업’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축구를 좋아하지 않고선 이 일을 할 수가 없다. 프로팀 감독이 아니고선 일반인보다 더 적은 보수를 받고 일한다. 그래도 은퇴 후 지금까지 쉼 없이 달려왔다. 잘린 적도 있고, 내 발로 나온 적도 있지만, 바로 다음 팀으로 연결이 됐다. 내가 실력이 형편없는 지도자는 아닌 모양이다(웃음).”
―고려대 4학년 때 벌어진 스카우트 파동이 김종부 축구 인생을 다른 길로 가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나. 만약 예정대로 현대에 입단을 했었다면 아무 문제없이 순항했을 텐데 하는 생각 말이다.
“그놈의 정이 뭔지…, 사소한 것에 인생을 건 셈이었다. 당시 현대와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건 내 대리인이었던 매형이었다. 물론 나도 매형이 도장 찍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자꾸 대우로 기울었다. 중동고 은사이신 고재욱 감독님이 팀을 맡고 계셨고, 고려대 시절 이차만 감독님도 고 감독님과 친분이 두터우셨기 때문에 은근히 대우행을 바라셨다. 그런데 갑자기 현대가 굉장히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서 날 영입하겠다고 나섰다. 당시 계약과 관련된 법률문제에 지식이 없던 우리로선 그 계약서가 나중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도장을 찍었다. 우여곡절 끝에 포항제철에 입단했지만,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고 그 후 대우-일화-대우를 거쳐 은퇴 수순을 밟았다.”
김종부 감독은 화성FC를 맡아 창단 2년만에 2014 K3챌린저스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그 일 이후로 김종부 하면 ‘비운의 스타’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소문도 무성했다. 정작 사고 한 번 안 친 내게 술만 먹고 돌아다닌다느니, 축구를 포기했다느니, 잠적했다느니 하면서 말들이 많았다. 모교인 거제고 코치로 들어갔다가 일찌감치 감독 생활을 하면서 많은 걸 내려놨다. 언론은 쳐다보기도 싫었다.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주더라. 지도자 생활하는 동안 또 다른 희로애락을 겪으면서 당시의 스카우트 파동은 ‘어제 내린 눈’이 돼버렸다.”
김종부 감독은 담담한 목소리로 지난 세월을 회상했다. “내 인생은 쉽게 가는 걸 허용하지 않는 모양이다”라고 말하는 부분에선 어떤 울림이 전해져왔다. 이런 그도 지도자의 마지막은 프로 경험을 해보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사명감을 갖고 ‘음지’에서 활약했다면, 50대 중반 이후부터는 프로 감독으로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소망이 있다. 순탄치 않았던 축구 인생이지만, 그 마지막은 봄날이었음 좋겠다. 아주 따뜻한 봄날 말이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