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설정을 가지고도 정반대의 영화가 완성될 수 있다. <첫 키스만 50번째>와 <내가 잠들기 전에>가 그렇다. 둘 다 아침에 일어나면 전날의 모든 일이 기억에서 사라지는 기억상실증을 다루고 있지만 <첫 키스만 50번째>는 로맨틱 코미디인 데 반해 <내가 잠들기 전에>는 미스터리 스릴러다.
기억상실증은 일치하지만 증상은 조금 다르다. <첫 키스만 50번째>는 사고가 나기 전날까지의 기억은 생생한데 그 이후는 기억이 없다. 그러다 보니 루시(드류 배리모어 분)는 수년째 자신이 기억상실증인지를 모르는 채 같은 날을 반복해서 살고 있다. 가족과 이웃들도 그런 루시를 몰래 돕고 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증상이 악화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루시의 일상에 헨리(아담 샌들러 분)가 끼어들면서 상황이 달라지는 데 결국 루시는 매일 헨리를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고 잠이 들면서 그날의 기억을 모두 잊는다.
헨리는 루시를 위해 지워지는 하루하루를 비디오카메라 등에 담아 놓는다. 그렇게 루시는 매일 새로운 사랑에 빠지며 매일 첫 키스를 하며 살게 된다. 기억상실증을 로맨틱 코미디로 엮어낸 탄탄한 대본이 빛나는 영화다.
그렇지만 기억상실증은 사실 미스터리 스릴러에 더 적합한 영화다. <메멘토> 등 기억상실증을 활용한 영화가 대부분 그러하다. <내가 잠들기 전에> 역시 기억상실증을 제대로 살려서 만들어낸 스릴러다. 주인공 크리스틴(니콜 키드먼) 입장에선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자신이 누구이며 옆에 잠든 남성이 누군지를 고민해야 하는 삶 자체가 미스터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영화의 장르는 미스터리 스릴러다.
<내가 잠들기 전에>에서 크리스틴의 증상은 매일 아침 아무런 기억도 없이 눈을 뜨는 것이다. 그나마 루시는 사고 직전까지의 기억은 생생한 데 반해 크리스틴은 자신이 누군지 조차 알지 못한다. 그렇게 눈을 뜨고 하루를 보내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그 전날의 기억 역시 사라져 버린다. 아침마다 똑같은 황당한 상황, 나는 누구이며 옆에 잠들어 있는 남성이 누군지 혼란에 빠진다.
크리스틴 역시 다양한 사진과 비디오카메라에 녹화돼 있는 영상을 통해 자신이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파악한다. 이 부분은 루시와 유사하다. 그렇지만 루시에겐 하루하루가 새로운 사랑의 시작인 데 반해 크리스틴에겐 하루하루가 악몽이다.
벽에 붙어 있는 사진을 통해 옆에 누워서 자고 있던 벤(콜린 퍼스 분)과 14년 전에 결혼했음을 알게 된다. 벤은 크리스틴이 사고를 당해 머리를 심하게 다쳐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설명해준다. 이것으로 크리스틴은 매일 아침 새로운 일상을 시작한다.
그리고 남편 벤이 출근한 뒤 걸려오는 전화 한통. 내쉬 박사(마크 스트롱)라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와서 침실 서랍장에 감춰 놓은 비디오카메라를 보라고 얘기한다. 거기에는 매일 크리스틴이 녹화해 놓은 영상이 들어 있다. 이를 통해 현재 자신은 남편 벤 몰래 내쉬 박사에게 치료를 받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는 크리스틴 자신이 남겨 놓은 매우 충격적이면서도 중요한 메시지도 있다. ‘남편 벤을 믿지 말라’는.
S. J. 왓슨의 동명 소설을 기반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기억 상실증에 걸린 여성 크리스틴과 전혀 다른 얘기를 들려주는 두 남성인 남편 벤과 내쉬 박사가 있다. 크리스틴은 누구의 말이 사실인지, 또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사고를 당했는지 혼란스럽다. 단편적으로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르지만 그것들만 가지고는 더 이상의 기억을 연결할 수가 없다. 게다가 뭔가 떠오른 게 있을 지라도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모든 걸 잊어버리고 만다. 이제 의지할 수 있는 거라곤 비디오카메라에 담긴 영상들뿐이다.
영화 <내가 잠들기 전에>는 92분의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으로 구성돼 있다. 영어 원제는 <Before I Go to Sleep>다. 반복되는 크리스틴의 일상을 다루고 있어 조금 지루할 수도 있는 한계를 빠른 전개와 응축된 스토리로 극복했다. 러닝타임 내내 팽팽하게 긴장감을 유지하며 결말을 향한 문을 하나하나씩 열어간다.
영화 시작 시점에는 관객들 역시 크리스틴과 동일한 입장이다. 기억을 잃은 크리스틴이나 그에 대해 전혀 모르는 관객이나 아무런 정보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여전히 아침마다 정보가 전혀 없는 크리스틴에 비해 관객들은 하나 둘 그를 둘러싼 비밀들을 알아가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감독은 거듭된 반전 카드를 뽑아 들어 관객들을 놀라게 만든다. 크리스틴과 함께 그의 지워진 기억의 실체에 다가가는 재미가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닌가 싶다.
결국 결말은 파격적인 반전으로 마무리 된다. 모든 반전 결말의 영화가 그러하듯 이 영화의 반전에 대해서도 호불호가 갈리고 있다. 그렇지만 영화 <내가 잠들기 전에>의 핵심은 충격적인 반전의 결말이 아닌 크리스틴과 함께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그의 지워진 기억을 하나 둘 맞춰가는 재미일 것이다.
@ 배틀M이 추천 ‘초이스 기준’ : 영화 <폰부스>를 재밌게 봤다면 클릭
기자는 영화 <내가 잠들기 전에>를 보며 무슨 까닭에서인지 영화 <폰부스>가 떠올랐다. 러닝타임 81분으로 짧은 시간 동안 팽팽한 긴장감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폰부스>가 이 영화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폰부스라는 좁은 공간을 배경으로 자신이 왜 이런 상황이 놓였는지를 전혀 모르는 <폰부스>의 스튜 쉐퍼드(콜린 파렐 분)와 매일 아침 모든 기억을 잃고 눈을 뜨는 크리스틴의 반복되는 일상 역시 유사한 설정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 동안 팽팽한 긴장감이 유지되며 응축된 스토리의 영화를 원한다면 한 번쯤 클릭하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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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반전의 결말을 가진 영화는 호불호가 분명하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결말에서의 짜릿한 반전을 기대하게 만드는 영화는 관객들에게 과정보단 결말로 평가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반전이 시시했다’ ‘반전이 신선했다’로 영화에 대한 반응도 갈리기 마련이다. 이 영화의 반전이 시시한지 신선한지에 대한 판단은 오로지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몫인 만큼 거기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이 영화는 반전의 결말 외에도 평가할 만한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결말로 다가가는 과정에서의 팽팽한 긴장감, 그리고 점점 크리스틴과 관객의 정보에 격차(관객은 영화를 보며 조금씩 다양한 크리스틴의 기억을 알아가지만 크리스틴은 매일 아침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가 생기는 것을 활용한 로완 조페의 탄탄한 연출력은 분명 좋은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